🖱️ 엔비디아, 젠슨 황 그리고 '뜻밖의' e스포츠

출처 - 서울경제

경주에서 열린 APEC 2025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정말 많은 이슈와 대한민국의 성과가 화제가 되었는데요. 정치, 경제 뉴스를 다루지도 않으면서 왜 갑자기 APEC 이야기냐 하실 수도 있겠지만, 뜻밖에도 그곳에 대한민국 e스포츠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e스포츠 팬 또는 산업 종사자들에게는 흐뭇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e스포츠 크리틱 뉴스레터는 APEC 기간 중 만나게 된 대한민국 e스포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GPU 26만 장 슈퍼딜에 대한 이해

출처 - 뉴시스

다들 아시다시피 엔비디아는 우리나라에 무려 26만 장의 GPU(그래픽처리장치)를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 이슈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야 다음에 나올 e스포츠 이야기가 더 극적으로 느껴질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AI용 GPU가 4만 장 정도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즉, 26만 장을 구매하기로 한 이번 거래는 말 그대로 '슈퍼딜'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딜은 단순히 GPU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하며 AI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으면서 100조 원 투자, AI 고속도로 구축, AI 미래기획수석실 신설을 통한 거버넌스 및 제도 정비, 인재 양성 및 교육, 친환경 에너지 및 AI 데이터센터 건설 등의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 열쇠가 GPU 확보였는데요. 당초 5만 개 확보를 하겠다던 공약을 무려 5배, 그것도 취임 약 5개월 만에 초과달성한 것이죠.

이는 단일 국가 기준으로 최대 공급 규모인데요. 단순히 GPU를 판다는 것을 넘어 엔비디아가 한국 시장을 새로운 AI의 중심지로 여기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우리나라의 탄탄한 산업 생태계와 반도체, 통신, 자동차 등 제조 역량, 피지컬 인공지능 등 AI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포석, 빅테크 기업들의 독자적 AI칩 개발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판매처 다변화, 한국 정부의 강력한 AI 육성 의지가 복합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친한국' 엔비디아에 기여한 e스포츠

엔비디아는 이 '슈퍼딜' 발표 직후 공식 유튜브를 통해 'Korea's Next Industrial Revolution(한국의 차세대 산업 혁명)'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는데요. 엔비디아가 한국 시장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러한 인식이 만들어졌는지를 친절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단순히 GPU 26만 장을 팔아먹기 위한 시장을 넘어 탄탄한 산업 생태계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이 곳에서 새로운 AI 시대를 맞이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영상 제작을 메인으로 하는 마케팅 대행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 영상은 남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요즘 아무리 AI 툴이 발달했다고 해도 영상이라는 것은 단숨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즉, 엔비디아는 꽤 오래 전부터 한국과의 'K-AI 동맹'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 '슈퍼딜'에 의미있는 서사를 부여하여 엔비디아의 미래 비전과 계획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마 이 영상은 상당한 시간을 들여 기획, 제작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런 류의 영상은 '영상미'보다 '스토리'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데요. 어떤 연유로 엔비디아가 AI를 통한 한국의 차세대 산업 혁명에 함께하기로 했는지에 대한 배경과 계기를 설명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e스포츠는 이 영상에서 상당히 높은 비중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그래픽 카드 회사'로 원래부터 유명한 엔비디아에게 e스포츠 산업의 종주국인 한국은 큰 매출을 안겨준 고마운 시장이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e스포츠 산업의 폭발적 성장 배경에는 스타크래프트 출시와 함께 불어온 PC방 열풍이 큰 기여를 했으며, 대부분의 PC방에는 엔비디아 그래픽 카드가 탑재되었으니까요.

통계에 따르면 2001년에는 무려 2만 3천 5백개가 넘는 PC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계산은 아니겠지만 평균적으로 PC방마다 50개의 PC가 있다고 치고, 평균적으로 그래픽 카드의 가격이 30만원 정도라고 한다면, PC방 열풍이 시작된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에 초반까지 그래픽 카드 판매로만 누적 약 3,500억 원 정도의 매출이 발생한 것이죠. 게다가 PC방에서는 게임에 맞춰 업그레이드를 꾸준히 해야하고, 그래픽 카드의 가격이 계속 상승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매출은 계속 큰 폭으로 상승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했을 때, 그래픽 카드가 AI, 블록체인의 핵심 도구로 활용되기 전, 엔비디아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특수한 시장이 한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 중 하나가 PC방과 e스포츠였다는거죠. 이렇게 중요한 영상에 스타크래프트와 T1 베이스캠프 PC방이 나왔고, 젠슨 황이 엔비디아 25주년 기념 행사 무대 위에서 '페이커'를 연호한 것은 그냥 깜짝 이벤트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영상 속 스타리그 장면의 디테일

영상 속에서 저는 상당한 디테일을 발견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PC방, e스포츠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 스타리그의 한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뭐 그냥 '흔한 스타리그 중 한 장면 아니야?'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요. 영상 프로덕션을 메인으로 하는 마케팅 대행사에 일하는 입장에서는 결단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단 저 장면은 2009년 바투 스타리그 16강 A조 1경기 송병구 vs 김택용의 한 장면입니다. 하고 많은 스타리그 경기 중에 왜 이 장면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엔비디아가 굉장한 디테일로 상당히 정성스럽게 이 영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송병구는 당시 삼성전자 칸 프로게임단 소속이었습니다. 김택용은 SK텔레콤 T1 소속이었죠. 그리고 우리는 깐부회동을 떠올려야 합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과의 깐부치킨 회동을 앞둔 엔비디아가 하필이면 삼성전자 칸의 간판스타였던 송병구의 경기 중 일부를 사용한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요? 25주년 이벤트에서 젠슨 황의 페이커 연호와 T1 소속이었던 김택용의 경기 장면이 선택된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요?

물론...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에서 약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대한민국 e스포츠 산업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이 영상이 기획되었고, 엔비디아가 이 영상을 만드는데 굉장한 진심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 엔비디아가 우리나라와의 'K-AI 동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전자와 e스포츠

사실 삼성전자는 대한민국 e스포츠 산업의 태동 및 성장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회사입니다. 개인적으로 e스포츠 기자를 하던 시절 삼성전자 칸 프로게임단을 담당했었는데요. 김가을 감독, 송병구, 주영달, 최우범, 이성은, 허영무, 박성훈, 임채성, 이재황, 유준희, 김동건, 이영한, 삼성준 등등 정말 많은 선수들과 가까이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삼성전자 칸은 LoL 시대에는 삼성 갤럭시가 되어 롤드컵을 들어올리기도 했으나, 이후 KSV에게 인수되어 지금의 젠지 게임단의 모체가 되었고, 삼성전자라는 기업은 e스포츠 산업에서 퇴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스폰서십의 형태로 e스포츠에 다양하게 참여하고는 있지만요.

이건희 회장의 '게임 올림픽'의 꿈은 WCG를 통해 화려하게 실현되었었다.(출처-채널A)

특히, 이번 젠슨 황-이재용-정의선의 깐부회동을 통해서 삼성전자와 e스포츠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더 공개되었습니다.

그 옛날 1996년, e스포츠라는 개념 자체가 세상에 없던 시절, 이메일이 아니라 '종이편지'를 통해 전해진 이건희 회장의 통찰력이 화제가 되었는데요. 바로 이 편지에서 언급되었던 '게임 올림픽'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월드 사이버 게임즈(World Cyber Games)'였던 것입니다.

WCG는 2000년 'e스포츠의 올림픽'을 표방하며 개최되었던 최초의 국가대항 글로벌 e스포츠 대회였습니다. 삼성전자가 파격적인 지원을 통해 메인 스폰서이자 후원사로 참여했습니다. 2000년 에버랜드에서 WCG 챌린지라는 이벤트성 대회를 통해 가능성을 타진한 뒤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세계 주요 도시들에서 개최되는 올림픽 타입의 대회로 거듭났습니다.

e스포츠 기자였던 저에게도 WCG는 아주 특별한 대회였습니다. e스포츠 대회 취재를 위해 해외를 갈 수 있었고, 'e스포츠로 국가대표를 선발한다'는 과정 역시 뜻깊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외에 워크래프트3,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아스팔트, 피파 등 다양한 e스포츠 종목을 경험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e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개인적으로는 직접 취재를 하러 갔었던 2009년 청두 대회는 '꿈을 칼라(color)로 꿀 정도'로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회장님, 삼성전자 칸 한 번 더, 어때요?

저는 이번 엔비디아, 젠슨 황의 방한 과정에서 삼성전자 칸, WCG를 떠올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에 뜻밖에 만난 e스포츠라서 유난히 반가웠고 그래서 약간 뽕도 차오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담인데, 현대자동차도 e스포츠와 인연이 깊습니다. 현재 기아자동차는 LCK의 디플러스의 네이밍 스폰서이고, 현대자동차는 젠지와 파트너십 관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먼 옛날 2004년에는 MBC게임이 개최했던 팀 리그를 후원하며 '현대자동차 투싼 MBC게임 팀 리그'가 열린 적도 있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e스포츠씨

출처 - 영화 신과함께 中

대단한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건 좀 오그라들어서 잘 못하거든요. 그런데 뭔가 차오른다는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요.

먼 옛날의 추억 여행을 해서 그럴까요? 페이커, 롤드컵, EWC, 아시안게임 등 글로벌 메이저 문화 산업으로 높아지고 있는 e스포츠 위상을 실감한 덕분일까요? 어쩌면 불안한 인프라 위에서 치열하게 지속가능성을 위해 싸우고 있는 대한민국 e스포츠 산업 종사자들이 떠올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대한민국의 e스포츠가 중요하게 다뤄졌다는 사실은 꽤나 즐겁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e스포츠가 산업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에서 건강하게 잘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e스포츠씨. 우리 비주류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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