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스포츠 정규리그의 사상 첫 지상파 생중계로 화제가 되었던 2025 LCK 결승전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지난 28일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2025 LCK 결승전에서는 젠지가 한화생명e스포츠를 3:1로 제압하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매년 이맘때 즈음에는 LCK의 챔피언을 칭송하고 다가올 월즈(롤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익숙한 루틴이지만, 올해 LCK는 지상파 방송국 MBC를 통해 송출된 덕분에 색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LCK 결승전을 어떻게 시청하셨나요?
저는 이번에 MBC를 통해서 결승전을 시청했습니다. 모바일이나 PC로 혼자 e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에는 당당히 거실에서 LCK를 보기로 한 것이죠. 비록 와이프는 '롤알못'이지만 그래도 e스포츠가 한 때 제가 몸 담았던 업계이기도 하고, 과거에 함께 롤파크에 가보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함께 시청해주었습니다.
다행이도 중계는 큰 사건 사고 없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버그나 현장 이슈로 인한 경기 중단 사태(Pause)도 없었고, 지나치게 경기가 길어짐으로 인한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중단합니다' 상황도 없었죠. LCK 결승전을 위해 MBC가 꾸린 중계진 역시 기존 LCK 중계진들이었던 덕분에 평소처럼 시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시청률은 발표되지 않았고, 조회 가능한 Top 20 안에 LCK의 이름은 찾을 수 없지만, 괜찮습니다. e스포츠 정규리그의 역사적인 첫 지상파 중계는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박까진 아니더라도 MBC를 통해 '저게 e스포츠구나', '저게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거구나'라고 알게 된 사람들이 있다면 꽤 의미있는 일일테니까요.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MBC의 LCK 결승전 중계를 시청한 제 나름대로의 후기를 남겨보려고 합니다. 대단한 의미 부여나 분석이라기보다는 소소한 감상 모음 정도가 될 것 같은데요. 그래도 최대한 제 시선에서 볼 수 있었던 부분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롤알못과 롤잘알 그 중간 어디쯤

MBC가 LCK 결승전을 생중계하겠다고 했을 때, LCK 프로덕션의 화면을 그대로 받아 송출하는 것이 아닌 자체적으로 중계진을 꾸리겠다고 했을 때, 많은 e스포츠 팬들은 과연 MBC가 어떤 눈높이로 생방송을 제작할 것인지 궁금해했습니다.
e스포츠는 해당 게임을 플레이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규칙과 설정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규칙을 알아야 하고,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보이는 것은 야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에 비해 게임은 훨씬 더 복잡하고 많은 규칙을 가지고 있죠. 그 중에서도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은 170개가 넘는 챔피언과 각자 가지고 있는 스킬들, 룬 세팅, 아이템을 비롯해 소환사의 협곡 내 규칙과 각 팀들이 선호하는 메타 등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LoL 유저들을 온전히 타겟팅해도 되는 LCK 프로덕션과 달리 MBC는 실로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했던 것이죠. LoL을 모르는 사람은 LCK를 볼 수 있도록, LoL 유저들은 지루하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 숙제 말입니다. MBC의 LCK 결승전 중계가 '롤알못과 롤잘알 그 중간 어디쯤'을 지향하는 것은 안전한 목표이었을 것이고, 제가 보기에 그 의도는 나름대로 잘 구현되었던 것 같습니다.
롤알못을 위한 장치들

MBC는 LCK 결승전을 앞두고 '챔피언스 오브 e스포츠'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를 제작, 송출하여 일반 시청자들이 e스포츠와 LoL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LCK 결승전으로 관심이 이어질 수 있게끔 유도했습니다. 뉴스데스크 스포츠뉴스에서도 LCK를 중요한 꼭지로 다루기도 했죠.
LCK 결승전에서도 중계진은 '롤알못' 시청자들이 LCK 경기를 보고 최소한의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넥서스를 파괴하면 승리한다', 'CS를 먹고 킬을 올리는 것은 골드를 벌어 아이템을 구입하는 과정이다', '바론이나 드래곤 버프는 팀 전체의 공격력을 올려준다'는 주요 규칙을 설명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중계 중 그래픽으로 주요 요소들을 설명하는 배려도 있었고요.
롤잘알들도 중요해
하지만 MBC에게 롤잘알들도 중요했습니다. 지상파 MBC보다 유튜브, 치지직, SOOP 등 스트리밍 플랫폼의 LCK 공식 채널 또는 스트리머들의 Co-스트리밍 방송을 시청하는 것이 더 익숙한 LCK 팬들이 TV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만약, MBC의 스포츠기획사업팀이 프로야구, 프로축구와 겹치지 않는 10~20대 시청자들을 사로 잡고자 했다면 '롤잘알'을 잡는 것이 '롤알못'을 잡는 것보다 더 중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MBC는 LCK 팬들에게 익숙한 성승헌 캐스터, 정노철, 고수진 해설위원이 중계를 맡고, 윤수빈 아나운서와 '쿠로' 이서행, '엄티' 엄성현이 분석 데스크를 맡았습니다. 중간 광고 때에는 우상단 예고 그래픽에 '성승헌-정노철-고수진 중계'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는 LCK 팬들의 시청을 유도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일반 시청자에게 중계진들의 이름은 매력적인 '후킹'이 되진 않을테니까요.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MBC가 TV로 LCK를 시청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화면 설정을 하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했다는 것입니다. 픽셀 단위로 정확하게 출력되는 PC나 모바일과 달리 TV는 화면의 가장자리를 잘라내고 확대하여 보여주는 '오버스캔(Overscan)' 기능이 기본 설정으로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죠. TV를 켰는데 경기 화면이 잘려보이면 LCK 팬들은 곧바로 이탈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를 최대한 막기 위한 안내였습니다.
정규방송 엔딩은 없었다
MBC는 LCK 파이널을 위해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의 편성 시간을 확보했었는데요. 만약 LCK 결승전이 오후 6시를 넘기게 되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e스포츠에서는 불의의 경기 중단 사태나 장기전, 풀세트 접전 등으로 인해 예정된 것보다 중계 시간이 크게 늘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MBC는 정규방송 관계로 LCK 파이널 중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 이번 결승전은 큰 사건 사고 없이 6시 15분 쯤 마무리 된 것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MBC는 LCK 파이널을 온전히 송출하고자 인기 음악 예능 프로그램인 '복면가왕'을 결방하면서 최대한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했습니다.
복면가왕 결방 결정은 경기가 풀세트 접전으로 흘러갔어도 MBC가 LCK 파이널을 끝까지 중계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상 첫 e스포츠 정규대회 결승전 송출을 '정규방송 엔딩'으로 끝내버리면 안하느니만 못한 일이 되었을테니까요.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MBC가 나름대로 첫 e스포츠 대회 생중계에 꽤 무게를 두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측)우리은행만 생존했던 이유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포인트가 있었는데, 과연 MBC 중계에서 LCK의 많은 스폰서 기업들이 어떻게 노출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스포츠 중계라고 해도 지상파에 기업의 이름이나 로고가 노출되려면 가상광고와 관련된 엄격한 규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죠.
실제로 제가 트위치 코리아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MBC가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면서 다음팟 대신 트위치를 활용하기로 결정했고, 트위치 코리아는 MBC와 사전 접촉하여 기술 지원, 홍보 지원 등을 논의했습니다. 하지만 '트위치'라는 이름과 '글리치 로고'는 MBC에 등장하지 못했는데요. 모두가 트위치인 것은 알았지만 방송에 트위치를 노출시킬 수 없었던 것은 상당히 큰 가상광고 비용 때문이었습니다.

가상광고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TV 방송 프로그램 속에 가상의 광고 이미지를 삽입하는 광고를 뜻합니다. 야구 경기장, 축구 경기장 잔디밭 위에 뿌려지는 그래픽이 대표적인데요. 소환사의 협곡과 LCK의 중계 화면 구석구석에 배치된 스폰서 배너들 역시 지상파에서는 가상광고의 영역인 것이죠.
결과적으로 우리은행 외에 다른 스폰서들은 지상파에 전혀 노출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은행이 노출된 것은 우리은행이나 라이엇 게임즈가 기꺼이 가상광고 비용을 감당했을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기업들은 비용 이슈 또는 가상 광고 관련 규제(ex, 주류 금지)로 인해 제외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LCK는 지상파 송출용 화면을 별도로 준비하여 클린 피드로 전달을 했을텐데요. 지상파 송출을 위해서 MBC와 LCK가 상당히 많은 협의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봤습니다.

가상광고는 아니었지만 LCK 스폰서 중 하나인 업비트가 중간 광고를 활용해 페이커가 등장하는 광고를 여러번 내보내며 MBC의 LCK 파이널 송출 효과를 최대한 누리기 위해 과감히 투자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한화생명e스포츠와 젠지의 유니폼에 새겨진 스폰서들은 별다른 방해 없이 그대로 노출되었는데요, 이번 만큼은 리그 스폰서보다 팀 스폰서들이 지상파의 수혜를 받은 셈입니다.
첫 지상파 e스포츠 중계가 남긴 의미

'LCK 파이널 시청률 대박', 'e스포츠 저력 과시' 같은 이야기들로 떡밥이 한 번 불타 올랐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적도 있는데요. 뭐 꼭 대박이 나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큰 사건 사고 없이 e스포츠가 어떤 것인지, 우리나라 e스포츠 중 최고의 위상을 가진 LCK가 어느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지 지상파를 통해 잘 전달된 것 만으로도 좋은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LCK 결승전을 통해 e스포츠가 다른 스포츠와 차별화 된 화려한 무대와 연출이 있고, K-POP 콘서트를 연상케하는 현장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MBC가 상당한 비중으로 다큐멘터리, 뉴스 보도 등을 통해 LCK와 e스포츠를 국민들에게 소개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 e스포츠 산업은 높은 홍보 효과를 누렸을 것입니다.
LCK는 이제 차기 시즌 스폰서십 비즈니스를 진행함에 있어서 'MBC 생중계'라는 성과를 대표적으로 앞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MBC와는 앞으로 더 많은 협업이 논의될 가능성, 중계권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지상파 외에 OTT와의 협상이 적극 고려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투자를 유치하고자 하는 LCK 팀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IR 자료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e스포츠 종목, 기업, 팀들도 간접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지역자치단체나 정부기관들도 e스포츠를 활용한 캠페인이나 프로젝트를 조금 더 힘있게 추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LCK와 꾸준히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국가보훈부의 실무담당자는 아마도 조직 내에서 조금 더 좋은 인사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와 제도권이 e스포츠와 게임을 진흥하는데에도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게임특위 2기를 운영한다면 1기때보다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고, 현재 개정안이 발의된 e스포츠 진흥법의 통과와 함께 실질적인 제도적 개선도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지상파를 통해 e스포츠의 위상은 분명 조금이나마 올랐을 것이고, 이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주요 결정권자들에게 e스포츠를 설명하고 진흥 정책 도입을 설득하는데 좋은 재료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번 LCK 파이널 한 번만으로 천지가 개벽하진 않을 것입니다. 단숨에 e스포츠가 주류 문화가 되고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e스포츠가 정식 체육 종목이 되진 않을거란 말이죠.
그래도 여전히 게임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계층이 존재하고, e스포츠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점에 MBC의 LCK 파이널 생중계는 e스포츠 산업에게 좋은 모멘텀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이 추진력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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