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만난사이_24년상반기

눈 녹듯

<영원히 머금고 갈 기억>에 대하여, 월요지기 용PD가 쓰다

2024.05.06 | 조회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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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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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터널의 끝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옆 자리 아이는 양 손을 가져다 안경을 쓴 눈을 가리었다. 차양막을 쳐 줄까 손을 뻗으려다가 이내 관두고 말았다. 네 눈도 금방 적응하겠지. 대신 호아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을 옮겨보았다. 내 망막은 네 것보다 수십 년 닳아버렸으니, 그리고 곧 영원한 어둠으로 닫힐 테니, 구태여 눈을 가릴 필요가 없어졌구나. 아니다. 삶을 돌아보자면 터널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호아가 꼭 저만한 꼬마였을 때 아버지는 아무런 암시 없이 종적을 감췄다. 수억 원의 빚을 어머니와 그가 짊어져야 한다는 소식도, 10년째 악착같이 버티던 어머니가 난치병 판정을 받은 일도 벼락같은 습격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 이번 생애의 유일한 하양이라 믿던 사람마저 떠나갔다. 이보다 암울할 수가 있을까 싶을 때마다 새로운 고통은 그를 더 짙은 어둠으로, 별안간에 밀어 넣었다. 그래서 호아는 그의 마지막 장소로 설국을 골랐다. 내 삶은 헤어날 길 없는 어둠을 방황하다 끝이 나게 되었으니, 마침표만큼은 하얀 점으로 찍고 싶다. 세상에 내려와 고통과 불행만을 담고 갈 그의 영혼에게 마지막 배려를 베풀고 싶다. 세상이 온통 하얗다는 기분을 찰나만이라도 느끼고 가련다. 최후의 순간에서조차 스스로를 존중한 사람으로 남겠다는 존엄한 마음으로 그는 설국을 여행했다. 누군가처럼 탄성을 지르지도, 환한 웃음을 사진으로 저장하지도 않았지만, 다신 없을 하얀 세상을 두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묘한 사람들이구나. 아까 그 모자가 설국을 만끽하는 방식도 남들과는 다른 듯했다. 가장 유명하다는 종탑이나 바글거리는 사진 촬영지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에게 구경을 시켜주기보다는 먼 풍경으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아이는 그 옆에 쪼그린 채 눈 위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한창 낙서가 어울릴 나이라는 생각과 함께, 호아의 기억 아래편에서는 그 사람이 돌아서며 남긴 말이 솟아올랐다. 사랑은 눈 위에 글씨를 쓰는 일일 뿐이야. 우린 두 손을 호호 불어 가면서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지만, 계절이 바뀌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밤 그는 여기서 죽는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손목을 긋고, 수면제와 함께 잠에 들면, 내일의 빛은 그를 찾아오지 않는다. 죽는 이유를 글로 남겨둬야 할까. 일면식도 없는 경찰관밖에는 읽는 이도 없을 텐데. 그보단 곧 녹아 없어질 저 도화지야말로 나의 마지막에 어울리겠구나. 호아는 마당에 쌓인 눈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계절이 바뀌면 사랑도 사라진다 말했지. 계절이 멈춰버린 풍경의 설국에서라면 녹지 않을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나의 이야기 안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어. 다음 계절에 녹아내릴 이 눈과 함께 그 흔적들도 사라지겠지. 안녕.
 한동안의 서성임까지 마무리했다. 현관에서는 엄마와 아이가 여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그 아이였다. 아이의 안경은 뿌옇게 변해 있었다. 방금 들어온 모양이구나. 차가운 바깥에서, 따뜻한 안으로. 호아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아⋯⋯. 괜찮아요.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는 안경을 닦지 않았다. 엄마도 닦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호아가 주춤한 사이, 아이가 안경을 벗었다. 가려져 있던 두 눈은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안경 속에서도 아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부터 뜨인 적이 없었을 게다. "고맙습니다 해야지?" "고맙습니다아-" 아이는 자신이 어떤 호의를 받았는지 알고 고마움을 말했을까.

 황황히 인사를 되돌려준 뒤, 호아는 방에 주저앉았다. 아까 눈은 왜 가렸니? 어떻게 글씨를 쓸 수 있었던 거니? 묻지 않았다. 물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이의 빛을 물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빛을 선망하고 어둠을 성토하는 본능조차도 보이는 자의 오만함이 아닐까. 빛은 터널이 끝나기 전부터 조금씩, 아주 희미하게나마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는데, 터널 속에 스스로를 영원히 가두려 했던 건 나 자신이었구나. 호아는 다시 마당으로, 터널 바깥으로 향했다. 보지 못하는 아이로부터 받은 하이얀 빛으로. 새로운 글씨를 쓰기 위해서.

 나의 이야기 안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고, 있고, 있을 거야. 비록 우리가 만나기 전의 이야기라 해도. 심지어 우리가 헤어진 후의 이야기라 해도. 언젠가 나의 모든 이야기들이 녹아내린다면, 이 물방울들이 네 이야기를 강물에게 들려주기를. 태평양에 퍼뜨리기를. 그리하여 하늘에 올라 마침내 이곳으로 고스란히 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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