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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

<영원으로 머금고 갈 기억>에 대하여, 화요지기 적문이 쓰다

2024.05.07 | 조회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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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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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 편지를 읽기 앞서 이 문장의 빈칸을 채워주십사 합니다.

  • 의 한 장면을 천국에 가져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           )?

 좋습니다. 다음 문장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삶의 한 장면“만”을 천국에 가져갈 수 있다면 얼마나 (           )?

 

 선생께선 두 문장을 어떻게 완성하셨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제가 완성한 두번째 문장의 분위기는 그리 낭만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가봅니다. 저희더러 스스로의 삶을 기억할 단 한 가지의 장면을 고르라고 하신 과정이 고뇌의 연속인 이유가요.

 과제를 주셨으니 어쩌겠습니까, 골라야죠. 선생을 뵐려면 영원히 간직할 만한 단 하나의 기억을 골라가야 한다니 누군들 고르지 않겠습니까. 저도 지난 밤을 끙끙 앓며 지새웠습니다. 때론 불이라도 번진 듯 화끈거리는 두 뺨과 함께, 때로는 그 위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눈물과 함께 말입니다.

 나머지 기억들은 영영 어둠 속에 잠겨 다시 떠오르지 못한다고 하니 그 얼마나 신중해야겠습니까. 켜켜이 쌓인 삶의 조각을 한데 모아 체로 거르는 작업은 가혹하기까지 합니다. 누군 무릎까지 꿇고 다 해진 기억을 끌어안은 채, 그것도 모자랐는지 떨어진 것들은 또 하나 하나 주워담으며 이건 잊히기 너무 아까운 기억인데, 저건 꼭 갖고 가야 하는데 어떡하지, 하더랍니다.

 그래요, 선생. 숨이 끊어져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하나의 기억만으로 ‘나’의 존재가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고심하고 고심해서 고른 기억이니 얼마나 황홀하고 즐거울까요. 한데 티끌같은 “만” 자 하나만도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바뀌는데, 하물며 생(生)이라뇨.

 선생, 하나로서 귀결되기엔 삶은 너무나도 감칩니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라고 내리신 삶 아니었습니까? 펼쳐진 일생 동안 온전한 “나”를 겪고 오라고 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이름 붙어 있는 모든 것에 매이지 않게 되어, 그리하여 선생이 어떤 보상을 베풀어주시리라는 기대를 갖지 않는 마음을 품는 것이 바로 선생께 인도하는 길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차라리, 이곳을 선생께서 저희에게 선사한 연옥(煉獄)*이리라 생각합니다. 성찰의 불로써 우리를 불살라, 집착하고 남기는 마음 없이 가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되돌아보는 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위 천국이라 하는 곳에서 끊임없는 기억을 쳇바퀴처럼 돌리고만 있는다 하겠습니까. 걸을 꽃길이야 있겠지만 과실 없는 꽃나무 위에서 두견이가 불여귀(不如歸)**, 불여귀 하고 울 겁니다.

 그러니 저는 감히 고르지 않고자 합니다. 기억 속에 남겨질 ‘나’의 파편에 대한 동정심이나, 망각이라는 무지막지한 놈에게 요만큼도 내어주고 싶지 않은 우악스러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선생께 치켜들 고개를 대신한다고만 생각해주십시오.

 말이 다소 거칠어졌으나 선생께선 제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아실 겁니다. 끝이 있다는 걸 알려주셨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선생께 드릴 말이 많았으나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또 이야기 나눌 날 오겠죠. 지금처럼만 계셔 주십시오. 때가 되면 금을 밟지도 않고 뛰어넘어 선생을 찾아가, 곧은 고개로 선생과 독대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이원재 올림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하여 불로써 단련받는 곳.

**‘돌아가고 싶다’ 라는 뜻. 중국 촉(蜀)나라 망제(望帝)의 혼이 두견새가 되었다는 동물 유래담에서 비롯된 의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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