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만난사이_24년상반기

형님, 인생 이 녀석 어떻게 처리할까요

<서로서로 인터뷰>, 적문이 수염왕에게 묻고 쓰다

2024.05.02 | 조회 68 |
0
|

글로만난사이

짧은 글 한 편으로 매일 아침 새로운 기분을 받아보세요

#0 돈까스 저녁

 “원재가 몇 년생이지?”

 저녁으로 돈까스를 사주시겠다며 가는 길, 대뜸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물어보는 형님. 1999년이요. 오, 그래? 생일은? 2월 16일입니다. 오우 씨, 2월이 생일이라는 답변을 받자 그가 보인 단말마(?)다. 알고보니, 공교롭게도 형님이 격투 선수의 뜻을 펼치고자 체육관을 처음으로 등록한 게 1999년 2월 중이었다. 요컨대 내가 세상에 막 발을 들일 때 형님은 그 해에 격투기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제 내가 왜 그를 ‘형님’으로 부르는지 이해가 되겠지.

옳게 된 돈까스. 먹는 동안 행복했다.
옳게 된 돈까스. 먹는 동안 행복했다.

 “잘 먹겠습니다, 형님.”

 누군가와 라포르(rapport;두 사람 사이의 공감적인 인간관계. 또는 그 친밀도)를 형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같이 뭔가를 먹는 거랬다. 오케이, 일단 식사는 됐다. 그리고 남자들이 제일 많이 먹는 세 개 대 봐, 하면 돈까스, 제육볶음 그리고 김치볶음밥 요 세 개는 절대 빠지지 않으니까, 아니 빠질 수 없으니까, 그 세 개를 한 끼니에 다 먹은 우리는 진짜 사나이의 라포르를 쌓을 것이 틀림없었다. 오뚜기 크림스프까지 나오는 사나이 정식을 정신 없이 해치우며 행복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인터뷰 준비를 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것도 질문에 곁다리 질문까지 예상 질문 리스트를 뽑아서 아주 호구조사마냥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놓았는데, 오히려 그래서 자칫하면 호구조사 내지 취조가 될 것만 같은 예감이 엄습한 거다. 슬쩍 내 핸드폰 메모장 화면을 보고 체할 것 같다며 경악하는 형님의 말씀도 그에 한몫했다. 이런, 이래서야 돈까스로 다져진 사나이의 라포르고 뭐고 소용이 없지 않은가. 과연 고민하는 사이 형님의 돈까스 접시는 이미 남김없이 비워져있었다.

 맥주 한잔 하자고 하시는 형님과 함께 형님이 운영하시는 사진관, 백십볼트 스튜디오로 돌아가는 길.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봤다. 준비해둔 질문은 너무 시시콜콜하고, 그렇다고 실없고 뻔한 소리로 인터뷰를 대신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맥주와 칼몬드와 함께 시작된 이원재의 즉흥 원맨쇼, 아니지, 실상 답변을 한 건 형님이니 형님의 원맨쇼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쇼’라고 할 만큼 형님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두고 보시라.

#1 개막

스튜디오는 외풍이라도 드는지 왠지 시원하다. 원재가 앉아있는 소파 한 귀퉁이에는 이케 아 강아지 인형이 곤히 누워있고, 테이블 위엔 권투 글러브 키링이 놓여져있다.
스튜디오는 외풍이라도 드는지 왠지 시원하다. 원재가 앉아있는 소파 한 귀퉁이에는 이케 아 강아지 인형이 곤히 누워있고, 테이블 위엔 권투 글러브 키링이 놓여져있다.

원재: 제가 좀 물밑 조사를 좀 했습니다. 옛날 자료들도 제가 조금이나마 블로그에서 봤고요. 그래서 조금 딥한 내용일 수도 있다, 이런 말씀을 일단 먼저 드립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형님: (원재의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기네, 이거 이렇게 하니까.

형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면, 원재의 빨간 수첩이 보인다. 아마 웃긴다는 말은 이 수첩을 두고 하는 말일 터. 뜨끔한 원재는 은근슬쩍 첫 질문을 바꿔본다.

원재: 이거부터 하고 싶어요. 돈까스,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형님: ...돈까스?
원재: 네, 보기를 드릴게요. 1번 두툼한 고기. 2번 바삭한 튀김. 3번 달콤새콤한 소스. 4 번 가격, 5번 기타.

이어지는 긴 침묵. 원재, 눈치를 살핀다.

형님: 돈까스는 고기가 어느 정도 두툼한 게 중요한 것 같아. 고기를 이빠이 때려서 펼치잖아. 고기가 얇아도 맛있는 데가 있거든. 그러면은 중요한 게 고기 두께는 아닌 거야. 그리고 바삭한 것도 사실 딱히 의미 없는 게, 소스를 어차피 위에 뿌리잖아. 그러니까 어느 정도 그냥 갓 튀겨 나오기만 하면 돼. 그럼 결국엔, 소스 맛이네? 소스 맛인데, 그거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경험해본 그거에 최대한 가까운 맛이 나면 맛있다고 느껴지더라고. 가족끼리 외식 나갔을 때 먹었던 그거.

원재: (깨달음의 장탄식을 한다)

형님: 가격은 그냥 싸면 좋은데, 그, 내가 좋아하는 그 잉글랜드 돈까스라고 인천에 있는 거는 만 원인가 만 천 원 인가, 되게 비싸졌어. 그래도 사 먹어. 그거는 추억이 있으니까. 여기 스튜디오 근처는 돈까스 육천 원인데, 한 팔천 원 정도까지 되도 난 사 먹어. (침묵) 답이 되었나? 결국 제일 중요한 게 뭐야, 소스네. 근데 추억의 돈까스 맛인데 이 만원이다. 그럼 안 사 먹겠지. 아무튼 근데 소스가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어차피 튀긴 거 다 똑같애. 신발도 튀기면 맛있는데.

원재: 그게 생각나는데,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삼천삼백 원 돈카츠집 있었어요. 돈까스 말고. 가격도 싸고 맛도 있었거든요? 근데 잘 안 가게 되더라고요. 제가 봤을 땐 그 돈카츠와 돈까스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아요.

이해를 돕기 위한 돈'카츠'의 예시
이해를 돕기 위한 돈'카츠'의 예시

형님: 돈카츠 별로야. 그냥 있으면 맛있게 먹는데, 내가 생각하는 돈까스는 튀김옷에 소스가 뿌려져 가지고, 소스가 좌지우지하는 건데. 돈카츠는 (승부처가) 고기거든. 그냥 수육 먹는 거 같애.

원재: 그거 먹을 바엔 수육 먹지?

형님: 아니 그 정돈 아닌데, 수육에 가깝다. 내가 생각하는 돈까스는 고기 납작하게 두들겨 가지고, 칼질하면서, (칼질하는 시늉을 내며) 이렇게... 칼질하면서, 이렇게 먹는 건데. 돈카츠는 일단 다 썰어져서 오잖아. 그러니 재미도 없다.

원재: 그러면 정리하자면은, 돈카츠는 유사 수육이다? 썰어먹는 재미도 없고.

형님: 아니 유사 수육은 빼줘. 돈카츠 먹을 바엔 돈까스 먹는다, 이런 거지.

원재, 문득 형님의 유튜브 채널 수염왕TV 가 떠오른다.

원재: 맞아, 그래요. 왜, 형님이 유튜브 쇼츠로도 만드셨잖아요. 그 영상이 남자들의 돈까스 사랑은 남다르다, 뭐 이런 주제였던 것 같아요. 남자친구가 속상한 일 있으면 돈까스 사주고, 기분 좋은 일 있으면 또 사주고. 이렇게 말씀하신 거 봤는데 정작 나온 걸 보니깐 돈까스가 아니라 돈카츠던데요?

형님: 그때가 마지막으로 간 거였어. (웃으며) 왜냐하면 그 영상을 찍을 때 (오늘 저녁 먹으러 간) 거기를 몰랐어. 사실 그거 옛날에 찍어놓은 거 그때 올린 거야. (머쓱해한다)

원재: (웃으며) 유튜브 얘기 나왔으니까, 유튜브 얘기 좀 해볼까요. 지금 유튜브 ‘수염왕 TV’ 운영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일단 구독했어요. 아무튼 운영 중이신데 구체적인 목표가 있으실까요?

형님: ...이런 주제로 인터뷰를 해왔다고? 형편 없는데?

원재: 그, 그, 그냥 하는 거죠.

#2 ‘단발’부터 ‘수염왕TV’까지, 형님이 “그냥” 해왔던 일들

형님: 나도 그냥 하는 거야. 그냥... 포트폴리오 용으로 내가 처음에 한 거고. 그리고 가끔 (손님한테) 영상을 만들어준다고 얘기를 하고 다니는데, 내 것도 안 해보고 어떻게 할 수 있나 싶어서. 그래서 내가 내 일을 위해서... 그냥 샘플 같은 거야. 아직까지도 별 생각이 없지. 전문성이 없다보니까. 그냥, 그냥 해보고 싶었어. 뭐 이렇게 의미를 크게 두지 않고. 그냥 뭐라도 해야 되는데, 코로나로 일도 없는데 뭐라도 해야 되지 않나, 그래서 해봤지, 응.

원재: 그래서 주제도 되게 다양한 거네요, 브이로그부터 <밤양갱> 커버까지.

형님이 직접 부른 <밤양갱> 커버 영상은 기존 영상보다 조회수가 5배는 많았다. 수염왕TV 절찬 상영 중.
형님이 직접 부른 <밤양갱> 커버 영상은 기존 영상보다 조회수가 5배는 많았다. 수염왕TV 절찬 상영 중.

형님: 그치, 주제를 삼아서 해야 되는데, 딱히 주제가 떠오르는 게 없으니까, ’그럼 나를 주제로 이것저것 만들어보자’ 해서, 보면 영상이 되게 다양해. 어떤 의뢰가 들어왔을 때, 야 그런 걸 해본 경험이 있어야지 원활하게 하잖아. 그래서 되게 다양한 분야, 뭐 인터뷰도 해보고, 설명도 해보고, 그것(밤양갱)도 해보고.

 이걸로 느낀 게 반응 위주로 좀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왜냐면 원래 영상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 거의 한 이, 삼일을 써야 돼. 10~15분짜리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 촬영하는데 하루를 쓰고, 편집하는데 하루 이틀.

 근데 밤양갱 이거는, 그날 내가 머리를 깎았어. 머리 세팅을 또 딱 해줬어요. 아깝잖아. 그냥 집에 가려고 그랬거든. 근데 미용사가 “어디 가세요?” 하니까 “아, 그냥 친구 만나려고요.” 그러니까 또 “친구랑은 뭐 드세요?”.

원재: 아 막 짜내야 돼 이제.

형님: (웃음) 그니까 이제부터 거짓말이 막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야! 시뮬레이션을 만들어야 돼. 그러던 중에 생각한 게, ‘아 머리 아까운데 이거나 찍어보자’ 한 거거든. 타이밍이 딱 좋게 나온 거지. 그런 쪽에서 또 의외의 소문이 나오는 법이니까. 내가 이걸 조회수 잘 나오길 기대하고 공들여서 찍는 게 아니었거든. 되게 공 많이 들인 거는 아무도 관심 없고. 영상 찍는데 한 30분 걸리고, 편집 30분 걸려서 고작 1시간 걸려서 영상 올렸더니 갑자기 조회수가 막 올라가. 내가 막 사흘 동안 공들이는 것보다 훨씬 많이 나오는 거야. (웃음) 재밌더라고.

 그러니 이게 내가 해야 할 방향이다,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해 볼 건 다 해봤거든.

누가 그러던가, 수염과 민머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 분야에 십 년 이상 종사한 전 문가의 느낌을 낼 수 있게 한다고. 과연 그의 눈빛에선 연륜이 느껴졌다. 그 연륜이 담길 수 있게 한 형님의 만화·격투기·사진 인생, 거기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원재, 이때를 노린다.

원재: 아까 제가 물밑 작업을 좀 했다고 말씀드렸죠.

형님: 왜 그래, 불안하게.

원재: 이 질문은 형편없지 않을 겁니다. (웃음) 닉네임을 여러 가지 쓰신 걸 봤어요. 만화 그리실 때는 이제 '단발'이셨고, 그리고 그리고 또 어떤 습작에서는 ‘링위의들소’도 쓰셨어요. 그 리고 지금은 이제 ‘수염왕’을 하시는데...

형님: 왜 그건 안 해, 인스타그램 아이디.

원재: 그건 이제 백십볼트 스튜디오랑 같이 하려고 그랬어요.

형님: 아 오케이.

원재: 서운해하지 마세요. (웃음) 아무튼 제일 궁금한 건 단발입니다. 설명해주시죠.

 형님은 이런 것까지 조사해올 줄은 몰랐다는 듯 반갑게 얘기를 시작했다. 여기, 형님이 밝힌 그의 여러 이름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첨부한다.

1) 단발

 체육관에서 통용되던 오른손 스트레이트 공격의 다른 이름. ‘얼마나 단발이 이상형이면 닉 네임으로까지 썼을까’ 했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을 따름이었다. 아무튼 형님은 “단발!” 소리만 들리면 조건 반사로 오른손이 나갔다고 한다. 명실공히 형님의 주특기.

 그렇게 ‘단발’은 한동안 형님의 아이디 및 닉네임으로 애용되었다고. 그러나 의외로 형님은 왼손잡이다. 사실 사범님이 무서워 왼손잡이를 왼손잡이라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격투기 의 세계에서 형님은 오른손잡이로 남았다는 슬픈 전설.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했다.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했다.

2) 링위의들소

 왠지 이름만 들었는데도 그 사람의 외형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기적의 네이밍의 산물인 이 이름은 다름아닌 형님의 선수 닉네임이다. 왜 있잖은가, 격투 경기에서 우렁찬 소리로 울려퍼지는 “홍코너에~ 코리안좀비 OOO 선수!”에서 듣는 그거. 뛰어다니는 게 꼭 파워풀한 들소의 모습과도 같아 그렇게 닉네임으로 정착되었다는 이야기.

 다만 핸드페인팅 동호회라는 깜찍한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을 당시 아무 생각없이 선택했던 이 닉네임 덕분에, 오프라인 모임에서 “안녕하세요 링위의들소입니다” 와 같은 끔찍한 수치를 겪어야 했다는 후문이 들려온다.

3) 수염왕

 외형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기적의 네이밍의 산물. 스타벅스 아이디로도 쓴다고 하는데, “수염왕님~ 음료 나왔습니다” 소리에 가면 별 다른 확인 없이도 ‘수염왕’이 온 줄 안다고 한다. 당연하다. 누가 봐도 수염왕이니까.

4) 백십볼트 스튜디오

 형님이 운영하는 사진관의 이름이다. 연상을 쉽게 하기 위해 ‘볼트’라는 단어를 집어넣자 했다고 한다. ‘볼트’를 골자로 한 간단한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1안: 썬더볼트 -> 너무 번개 맞은 것 같아서 패스. 2안: 백만볼트 -> 포켓몬 따라한 것 같아서 패스. 3안: 이백이십볼트 -> 입에도 안 감기고 너무 길어서 패스. 4안: 백십볼트 -> 입에도 감기고 ‘볼트’도 들어가서 당첨!

#3 만화가 지망생이던 격투기 선수 청년이 어린이집에서 일하다가 나이지리아를 거쳐 사진관을 차렸더니 중년

원재: 이름하니까 또 생각나는 게 형님 인스타그램 아이디, ‘킹콩월드’인데.

형님: 유아 체육할 때 내가 ‘킹콩’ 선생님이었어. 애들이 “킹콩쌤, 킹콩쌤” 하는 게 그때 가 너무 좋아서 ‘킹콩’이라는 느낌을 되게 좋아해.

원재: 그러니까 유아 체육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육, 그런 건가 보네요. 그 유아 체육은 또 언제 하셨던 거예요?

형님: 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돼서. 내가 체육학과를 나왔어. 근데 이게 유아 체육이 세부 전공이나 그런 게 아니야. 학교에서 체험 연수같은 걸 받아서 자격증을 딸 수가 있었거든? 근데 그게 그냥 민간 자격증이었어.

원재: 국가공인자격증이 아니라는 거죠?

형님: 그렇지. 그런 식으로 따는 거 되게 많았어. 근데 난 그냥 유치원 선생님들한테 혼 나가면서 배웠지. 내가 뭐 하고 있으면 유치원 선생님이 오셔서 막, “선생님 뭐하세요? 애들은 바닥에서 못 굴러요!” (그러면 내가) “아 그럼 어떻게..” “매트 까셔야죠!”

원재: 현장에서 직접 구르면서 하신 거네요, 말하자면.

형님: 그렇지. 어쩔 때는 애들한테, “얘들아, 우리 동물 흉내내기 해보자!” 하면서 개구리 뜀뛰기 시키고 오리걸음 시키고... 애들이 엄청 좋아하더라고. 그때도 ‘이거구나’ 싶었지. 그때는 또 고관절이 괜찮을 때라(...) 내가 다 시범 보이면서 했거든. 그런 걸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만의 체육을 한 거지.

그러니까 실제로 해봐야 많이 알게 되더라고. 직접 해보니까 서점에 가서 어린이 관련한 서적도 사서 보고, 관련 연수회 같은 거 있으면 가고. 해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

원재: 수요에 따른 공급이네요.

형님: (웃으며) 그렇지. 그러다보니 그 회사에 진심으로 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어.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면서 그만두게 된 거지. 나는 그냥 애들 가르치는 게 너무 좋았어. 원장님들도 다 나한테 잘해주시고. (한숨을 내쉬며) 지금 생각해보니까 계속 그걸 했어야 됐는데.

원재: 왜요?

형님: 그러면은 내가 유치원 선생님이랑 적당히 잘 결혼했을 텐데.

원재: 인기가 있으셨...

형님: 아유, 그럼! 얼마나 멋있냐! 애기들한테 맨날 시달리면서도 애들이 “킹콩쌤 왔다” 하면서 막 난리 나고. 어린이집 연예인이야! 애들한테 좋게 보이니까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나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 되게 많았어.

원재: 영광의 시대였네요.

형님: 영광의 시대였지.

 그렇게 얘기하며 맥주를 크게 들이키는 형님은 어쩐지 슬퍼보인다. 눈가가 촉촉해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허나 그에게 있어 영광의 시대가 그때뿐이랴.

원재: 지금은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원래는 말씀하셨듯이 체육 쪽에 종사를 하셨는데, 어쩌다 이렇게 전향(?)을 하셔서 이 세계에 입문하신거예요?

형님: 그러게 말이다...(??) 원래 체육관 차렸어야 됐는데 사진관을 차리고 이러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원재: 예?

형님: 아, 그전에 나 나이지리아 있었던 얘기는 했었나?

원재: 예????

나이지리아 인테리어 디자이너 겸 회계 겸 캐드 디자이너 겸 라이더 시절의 형님.
나이지리아 인테리어 디자이너 겸 회계 겸 캐드 디자이너 겸 라이더 시절의 형님.

형님: 그 유아체육 일을 몇 년 하다가 그만뒀지? 하고싶은 거 한다고. 연예계 쪽으로 가고 싶어서 방송국 시험도 보고, 개그맨 시험 보고 그랬어. 근데 다 안 됐었어. 계속 떨어지니까 조급해지잖아. 물론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려. 그때가 스물일고여덟살인데, 그때는 지금 안되면 다 끝난 거라고 생각하니까.

원재: 그쵸, 사실 저도 지금 그래요.

형님: 그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아무튼 유아체육 하던 거, 내가 좋아하는 거 접고 이렇게 됐는데도 안 되니까 어떡하지 싶었던 거지.

 형님의 나이지리아 인생은 5년동안 이어졌다. 인테리어 회사의 말단 파견 직원으로 시작한 형님은 어느새 나이지리아 사무실의 필수 인력으로 남았다고 하는데, 숱한 고생을 해서 힘들었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형님의 얼굴은 꿈꾸듯 즐거워보였다.

형님: 일단 1년은 반쯤 쉬어야겠다, 이런 마인드로 갔어. 근데 1년 지나니까 아쉬워서 ‘1년만 더 있어볼까?’ 하고 2년. 2년 하니까 ‘좀만 더 있으면 월급이 오를 텐데’ 싶어서 또 1년 더. 이러면서 3년 되고 나니까 이제 기술이 쌓였잖아. 영어도 엄청 늘고. 그니까 그냥 여기서 버티고만 있으면은 수입이 계속 들어오게 되더라고. 그래가지고 썩 내키진 않지만 1년 더. 그렇게 어쩌다 5년이 됐지.

원재: 진짜 어쩌다 되는 일들이 정말 많네요.

형님: 그런데 그만큼 또 엄청 우여곡절이 많았지. 원래는 인테리어 회사에서 잡일 같은 거 하다가, 거기 있던 회계 담당이 너무 힘들다고 그만둔대.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되잖아? 나보고 하래. 했지.

원재: 헐. 그냥 그렇게?

형님: 그냥 하는 거야 막. 그러다가 디자이너도 도망갔어. 그러니까 그걸 또 나보고 하래. 일단 스케치북 갖다가 뭘 그려보래. 또 했지. 캐드하는 3D 디자이너가 또 그만둔다네? 또 또 배우래. 결국에는 다 그만두고 나 혼자만 남아서 만능 오각형이 된 거야. 회계도 하고, 디자이너도 하고, 캐드 디자이너도 하고 그냥 다 했어.

 과연 형님의 원맨쇼가 맞았다.

원재: 저라면 그렇게 못해요.

형님: 나라고 뭐 다르지 않았어. 처음에는 막 치고 박고 싸웠어. 그만둔다고 난리치고. 혈기왕성할 때니까. 나간다고 씩씩대면서 회사에 얘기하려는데, 같이 일했던 목수 아저씨가 그러는 거야. “한국 가면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친구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어?”

...듣고 보니까 그런 거야. 이렇게 해외까지 나왔는데 어쩌겠어, 해야지. 그 이후로는 진짜 열심히 했지. 회계, 디자인, 캐드 다 하면서 목수 아저씨 일하시는 현장도 직접 가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전까진.

원재: 그래서 이제 다른 길을 좀 생각해보신 거네요.

형님: 그렇지. 나이지리아에서 ‘한국 가면 뭐할까’ 고민하다가 직장 상사가 사진 쪽을 권유했어. 좀 관심 있어하니까 갑자기 강의를 기초부터 막 가르쳐. 근데 배우다 보니까 이게 뭔가 익숙한 거야. 만화책을 하도 많이 보니까 구도며 공백이며 황금 비율이며 그런 게 다.

원재: 배우지만 않았다뿐이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죠?

형님: 만화를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계속 봐왔으니까. 만화도 직접 많이 그려봤었고. 나 만화가 되고 싶어서 외고 일본어과까지 지원했었거든. 그니까 네모가 나한테 익숙한 거야. 네모 안에 그림이 있는 거 자체가. 그렇게 사진을 찍는 걸 재밌어하다가 한국에 왔을 때 이렇게 차리게 된 거지.

#4 형님, 그래서 인생은 어떻게..?

원재: 들어보니까 형님 인생 전반이 되게 우연찮은 계기들이 모이고 모인 것 같네요. 이게 뭐랄까, 결국에는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흘러가게 되는구나 싶어요.

 일순 형님은 지을 수 있는 가장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형님: 아니야. 그렇게 흘러가기 어려워. 내가 이력서 써보잖아? 이 사람 뭐지 싶어. 말도 안 되는 이력이야. 하나도 아귀가 맞는 게 없어. 그냥 그때 그때 하는 일에 열심히 하는 거였으니까.

그럼에도 제일 중요한 건, ‘난 뭘 해야 되지? 어떻게 살아야 되지?’ 계속 고민하는 거야. 그 와중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같은 생각도 할 수 있으면 좋은 거고. 인생 뭐 있냐, 그냥 뭐든 열심히 해보면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게 돼.

원재: 뭔가 마무리 멘트 같은데요.

형님: ...맞아. 이제 그만하자, (슬쩍 시계를 보며) 벌써 1시간 반 지났어.

원재: (웃음)

 

 스튜디오를 나선 원재는 제법 불콰한 얼굴이다. 제 손에 쥐어진 오밀조밀하게 짜여진 질문 이 활자로 수놓인 질문지를 한동안 바라본다. 제법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형님과 닮은 투박한 돈까스에 대한 지론부터, 이름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시시콜콜한 형님의 인생사까지. 질문지에 있었던 내용은 아니지만 보석처럼 영롱히 빛나는 이야기들. 정해진 질문지대로만 했다면 듣지 못했을 깊고 내밀한 이야기들. 그래서 더욱 값진 이야기들. 그 모습이 우리네 인생과 크게 다르진 않은 듯하다.

 아무렴, 정해진 길이 없는 우리 인생이지 않은가.

형님, 인생 제가 해치워보겠습니다. 그냥, 열심히. 멋지게.
형님, 인생 제가 해치워보겠습니다. 그냥, 열심히. 멋지게.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글로만난사이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글로만난사이

짧은 글 한 편으로 매일 아침 새로운 기분을 받아보세요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