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만난사이_24년상반기

RLAALSTJR7305

<영원히 머금고 갈 기억>에 대하여, 금요지기 수염왕이 쓰다

2024.05.10 | 조회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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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짧은 글 한 편으로 매일 아침 새로운 기분을 받아보세요

 독일 볼프스부르크 폭스바겐 자동차 공장에서 만들어진 13년식 흰색 골프, RLAALSTJR7305. 그는 수출을 위해 이제 막 롤온롤오프선에 선적되었다. 롤온롤오프선에는 그와 같은 공장에서 생산된 여러 자동차가 줄지어 있었다. 수많은 자동차들 사이에서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자신의 주인이 누가 될지 궁금해하던 그때, 옆에 있던 빨간색 골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야, 우리는 한국으로 간대.”

 폭스바겐 골프 자동차는 대부분 유럽이나 일본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 한국은 그에게 조금 생소했다. 어리둥절하게 있는 그를 향해 빨간색 골프가 말을 이었다.

 “나는 주인이 좀 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젊은 사람들이 액셀레이터를 쌔게 밟잖아. 내 꿈이 아우토반에서 한계까지 달리는 거였거든. 그래서 내수용으로 만들어지길 바랐는데 한국이라니. 안타깝지만 뭐, 한국에도 고속도로는 있다고 하니까, 나는 꼭 젊은 주인 만나서 신나게 달릴거야. 너는 어때?”

 이 말을 들은 RLAALSTJR7305은 생각에 잠겼다. 대답 없는 그를 대신해 뒤에 있던 검은색 골프가 껴들며 말을 던졌다.

 “나는 차고가 있는 주인을 만났으면 좋겠어. 내 몸이 검은색이다 보니 먼지가 조금만 쌓여도 지저분해 보이거든. 기왕이면 기사도 있는 주인이었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고급 세단은 아니니까 그럴 수는 없을 거고, 암튼 차고만 있으면 돼 나는.”

 RLAALSTJR7305은 빨간색 골프처럼 신나게 달리고 싶지도, 검은색 골프처럼 차고가 있는 주인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어떤 주인을 만나, 어떻게 살아야 소중하고 행복한 삶이 되는 걸까? 이런 생각으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한국에 도착했다.


 RLAALSTJR7305의 첫 번째 주인은 신혼부부였다. 결혼한 지 3개월 정도 되는 부부가 생에 첫차로 그를 선택했다. 이 신혼부부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운전했는데 남편의 경우 새 차인 그를 애지중지하며 다뤄주고 주말이면 집 근처 세차장에서 2시간, 3시간 동안 닦고 광내 주었다. 반면 아내는 운전이 서툰 바람에 종종 RLAALSTJR7305를 힘들게 했다.

 “자기야, 이거 뭐야? 또 문콕 했어? 주차할 때 잘 보고 주차를 했어야지. 트럭 옆에 주차했던 거 아니야? 주차할 때 트럭 옆은 피하라니깐, 그리고 휠은 언제 또 이런거야?“

 남편이 RLAALSTJR7305의 옆구리에 찍힌 자국과 긁혀있는 전방 우측 휠을 보며 아내를 다그쳤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짜증 내며 남편에게 소리쳤다.

 “그걸 왜 나한테 그래? 내가 찍은 거야? 다른 사람이 그런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휠도 다른 사람이 그랬겠지, 난 모른다고.”

 RLAALSTJR7305는 자신 때문에 주인들이 다툴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자신을 아껴주는 남편 주인이 있어 너무 좋았지만, 만약 차고가 있었다면 주차하다가 이리저리 상처가 나진 않았을 텐데, 또 이런 일로 주인들이 싸우진 않을 텐데 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신혼부부였던 주인들에게 아기가 생겼다. 잔뜩 신이난 남편 주인은 차 뒷유리에 BABY IN CAR 라는 스티커를 붙였고 아내 주인은 아기를 돌보기 위해 더 이상 운전하지 않았다. 아기가 타고 있어서인지 남편은 전보다 더 천천히 운전했고 내부 청소도 자주 해줬다. 하루하루가 어찌나 평화롭던지. RLAALSTJR7305는 생각했다. ‘이런 게 행복일까?’ 하지만 이런 행복감을 느꼈던 것도 잠시, 주인 부부는 그를 중고차 매장에 팔았다.


 “이 차, 정말 새 차나 다름없어요. 전에 타시던 분이 아기가 있어서 운전도 아주 섬세하게 하시고 아껴서 타고 다녔는데 아기 때문에 SUV로 바꿔야 한다고 해서어쩔 수 없이 내놓은 거라니까요. 손님은 아직 결혼 안 하셨죠? 그럼 딱이네!”

 중고차 매장에 전시 되어있는 RLAALSTJR7305의 앞에서 중고차 딜러가 손님을 향해 한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손님은 바로 계약하고 RLAALSTJR7305를 집으로 데려왔다. 두 번째 주인은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RLAALSTJR7305가 중고차이긴 했지만, 두 번째 주인에게는 첫차라 첫 번째 주인만큼 차를 아꼈다. 운전이 서툴러 산 지 2주 만에 옆구리를 전봇대에 몽땅 긁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때 수리로 전 주인이 만들어 놓은 자잘한 상처들을 전부 지울 수 있었다. 이제 전 주인의 흔적은 햇빛에 그을려 남아 있는 뒷유리 BABY IN CAR 스티커 자국뿐이다. 이 자국 때문에, 총각이었던 두 번째 주인은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날 때마다 여기 붙어 있었던 스티커는 자신이 붙인 게 아니라고 해명해야 했다.

 두 번째 주인 역시 차고는 없었지만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어서 주말마다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여자친구를 만나기 전날에는 세차도 깔끔하게 해줬다. 이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RLAALSTJR7305는 오랜만에 다시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행복에 이상이 생긴 건 두 번째 주인이 장거리 연애중이던 여자친구와 이별하고 나서부터였다.

 두 번째 주인은 여자친구와 이별한 후 운전하는 날이 적어졌다. 그 뒤로 2년 가까이 되도록 실내 세차는 단 한 번도 안 하고 외부 세차도 아주 못 볼 지경이 돼서야 간간히 자동 세차를 돌릴 뿐이었다. 어느날 두 번째 주인은 RLAALSTJR7305를 전문 세차 업체에 맡겼다. RLAALSTJR7305는 이제 드디어 주인이 자신을 다시 아껴주기로 한거라 생각하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날, RLAALSTJR7305는 오랜만에 도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렸다. 달리고 나니 답답했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면서 다시 시작될 행복도 기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시골의 주택. 집 옆에는 승용차가 두 대나 들어갈 만큼 커다란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주인은 그 창고 안에 RLAALSTJR7305를 세워두고는 자리를 떠났다. RLAALSTJR7305는 그 뒤로 두 번째 주인을 만날 수 없었다.


 세 번째 주인은 70대 할아버지었다. 이 새로운 주인은 나이가 많은 탓인지 자주 RLAALSTJR7305와 함께하진 않았지만 창고에 있는 그에 먼지가 쌓이면 닦아주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주택 앞마당에서 지하수 물을 끌어와 시원하게 세차도 해주곤 했다. 가끔, 자식 손주들이 버스를 타고 올 때면 주인은 기꺼이 RLAALSTJR7305를 끌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이들을 픽업해왔다. 한번은 차안에서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이름이 뭐에요? 나는 채은인데. 할아버지 차도 이름있어요? 없으면 내가 지어줄래요. 흰색에다가 둥글둥글하게 생겼으니까 흰둥이. 할아버지 차는 이제 흰둥이에요."

 손녀딸은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엉덩이를 들었다놨다 하며 깔깔대고 웃었다. 주인은 이런 손녀의 모습이 마냥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런 평온함 속에서, 처음으로 가진 이름과 함께 RLAALSTJR7305는 다시 행복을 찾은 듯해 기뻤다. 그리고 이번에는 행복이 오래갈 거라 믿었다.

 세 번째 주인이 RLAALSTJR7305를 찾지 않은 지 어느덧 아홉 달째.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던 탓에 배터리는 방전이 되었고 타이어 바람도 다 빠져나간 상태다. 기다림에 지쳐 삶을 포기하고 싶어졌을 때, 창고에 있는 그를 찾아 나타난 건 세 번째 주인의 아들이었다. 인제야 알게 된 건데, 주인은 8개월 전에 쓰러져 그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한 달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들은 RLAALSTJR7305와 함께 읍내 카센터로 가서 타이어와 밧데리를 조금 손봤다. 차량이 수리되고 있는 내내 RLAALSTJR7305는 아들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제 볼 수 없는 세번째 주인을 그리워했다. 이런 마음을 아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슬픈 표정을 하고 내내 담배만 피울 뿐이다. 카센터 사장이 배터리와 타이어를 새것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들은 슬피 고개를 저었다.


 RLAALSTJR7305가 폐차장에 온 지 일주일이 되었다. RLAALSTJR7305는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되면 저 커다란 프레스 기계에 눌려 한낱 고철덩이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 봤다. 그리고 스쳐간 사람들을 하나 둘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언제가 가장 소중한 기억인가.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는가. 마지막으로 머금고 갈 기억은 무엇인가.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알기에, RLAALSTJR7305는 서둘러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 프레스 기계 아래 서고 나서야 그는 스스로 던진 질문의 답을 찾았다.

 '기억은 모두 소중해. 사람들이 나를 슬프게 만든 기억도 있지만 그게 진심은 아니었을 거야. 내가 모든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만난 사람들 모두, 나와의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머금고 갈 것은 기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날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13년식 흰색 골프 RLAALSTJR7305, 흰둥이. 그는 커다란 프레스 기계에 눌려 지난 15년간의 삶을 조용히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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