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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

<기억의 배반>에 대하여, 금요지기 수염왕이 쓰다

2024.03.22 | 조회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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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난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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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네게 내 바닥을 다 보인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어.”

 미도리가 내게 전한 마지막 말이다. 나를 향한 미도리의 감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으니, 그간 그녀의 눈치만 살피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미도리는 언제부터 바람을 피웠던 걸까. 내가 결혼 얘기를 꺼내자 급히 말을 돌리던 그날, 여러 관계에 얽매이기 싫다며 인스타그램을 탈퇴했던 그날, 평소와 달리 주말에 굳이 우리 집 앞으로 오겠다던 그날, 나는 그 날들에 눈치챘어야 했다. 아니, 눈치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 나를 속이며 보내는 그녀의 하루는 어땠을까. 나는 애써 차분히, 터져버릴 것 같은 머릿속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은 정리하고 우리 처음 그때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미도리는 마지막 말을 차갑게 던지고 어둠 속 내리는 빗물 사이로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미도리는 한 번도 먼저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먼저 한 적이 없다. 연애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 했던가. 나는 그녀를 좋아할수록 패배감에 짓눌려졌고 함께한 시간 안에서 늘 외로웠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면 진작에 나를 놓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먼저 떠나버리지. 내게 진심이었던 적이 있긴 했을까. 그랬다. 미도리와 함께한 5년은 내게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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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이후 두 번째 봄. 출근길에 보이는 언덕에 초록이 많아질 때면 미도리가 생각난다. 그녀는 자기 이름처럼 초록색 같은 사람이었다. (미도리みどり:초록색) 초록이 가득한 숲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지듯, 그녀를 보고 있으면 편안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녀도 자기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종종 초록색 신발을 신고 자기를 ‘미도미도리’라고 불러 달라며 어린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오랜만에 든 미도리 생각으로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졌다. 생각을 떨쳐내야 한다는 의지로 손을 뻗어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QUEEN’의 ‘Love of my lif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도리를 처음 만난 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봤던 극장 안에서였다. (영국의 록밴드 ‘QUEEN’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자전 영화) 미도리도 나처럼 혼자 영화를 보러 와 있었고 엔딩크레딧을 보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에 반해 극장 출구 앞에서 말을 걸었다. 내가 던진 추파를 미도리는 덤덤하게 받아주었고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내가 미도리를 좋아한 이유를 떠올려보니, 미도리는 언제나 나의 질문에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줬다.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그저 조용히 내 말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대답해주고 웃어주는 게 좋았다. 우리가 세 번째 만났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미도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어진 나의 고백으로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여느 연인과 같이, 우리는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생겼을 때는 서로에게 위로와 응원을 남겼다. 그때의 나는, 미도리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렇다. 미도리와 함께한 시간 동안 나는 행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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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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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3일3:29:59

    0
    about 2 months 전

    기억은 옅어지는데 추억은 요동치는 봄🍀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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