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야!”
엄마가 나를 부른다. 오랜만에 집에 함께 있으며 지켜보니 엄마는 생각보다 더 자주 나를 찾았다.
대학에 입학하며 독립한 뒤로 생활이 아무리 궁해져도 집으로 돌아간 적은 없었다.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점을 가득 채워 들으며 상위권에 속할 평점을 유지하고, 남들 다 하는 휴학 한 번 하지 않은 채 한 학기 조기 졸업을 했다. 몇 달 쉬면서 여행이라도 하고 입사했으면 좋았으련만, 졸업 후에는 바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10년이 조금 넘는 세월을 나는 혼자 악바리처럼 견뎠다.
흔한 K장녀. 힘들게 아등바등 버티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뿐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너희 딸 대견하다’는 엄마 친구의 말을 수화기 너머 엄마가 하이톤으로 내게 고스란히 전해줄 때면, 더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무엇으로 엄마와 아빠를 충족시켜줘야 할까? 잘난 사위를 데려가야 하나. 내가 홀로 공부며 일이며 살림이며 무엇이든 척척 잘해낼수록 가족들은 기뻐했고 동시에 나의 성취에 무뎌져갔다.
두 살 터울의 동생이 무엇을 하며 사는지 나는 잘 몰랐다. 매사 치열하고 열심히 하는 나와 대조되는 그 애의 게으름과 무계획성을 물론 알고 있었다. 그 애도 나처럼 스무 살에 집을 떠났는데, 그 애에게 신경을 쓸 여력은 없었다. 그저 나만이 부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 된다는 일념 하에 달려왔다. 알면서 모르는 척, 내가 사는 일에만 몰두하면 아무 잡음이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명절에나 이따금 얼굴을 보는 식구들은 화목한 듯 시간을 보냈고,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힘든지 꺼내지 않는 이상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 도리가 없었다.
*
서울의 자취방에서 평소처럼 잠이 든 어느 날, 날이 밝아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 이제 엄마와 아빠만 사는 본가 말이다. 지방 소도시의 오래된 아파트. 익숙한 소파와 흔들의자, 탁자가 보이는 거실에 내가 있다. 전날 회사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한잔하긴 했는데 아무리 되짚어도 분명 멀쩡하게 자취방으로 돌아간 기억뿐이다. 술이 덜 깨서 첫차라도 타고 온 건가? 눈은 떴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엄마!”
고요한 집. 아무도 없나 싶어 숨죽이고 가만 기다려보았는데, 저쪽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
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신경하게 부엌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 다니며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여지질 않으니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그 정도만 추측할 수 있었다. 내가 뭐 실수라도 해서 엄마가 화났나. 왜 아는 척을 안 해주지. 나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몸이 안 좋은데.
한참을 바쁘게 오가던 엄마는 드디어 거실로 와 소파 옆에 외따로 놓인 흔들의자에 등을 붙이고 편히 앉았다.
“엄마! 엄마?”
엄마는 한참을 또 말없이 앉아 있더니 뭔가 생각난 듯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지니야!”
“띠링!”
“오늘 날씨 어때?”
“오늘 OO동은 흐려요. 12시경 비 예보가 있으니, 외출하실 때 우산 꼭 챙기세요.”
“지니야. …….”
“네, 말씀하세요.”
“지니야. …….”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어요.”
“지니야.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 틀어줘.”
“네, 들려드릴게요.”
이내, 내 몸에서 흥겨운 박자의 노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은 분명 내 몸이었다. 이 몸에선 녹음된 멘트만이 흘러나올 수 있구나. 내 목소리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구나. 누가 묻고 시키는 것에만 응답할 수 있겠구나.
음악이 나오고 엄마가 다시 등을 의자에 기대어 힘을 풀었을 때, 나는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엄마에게 내가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아니, 자그마한 스마트 스피커로 보이는구나. 나는 난데 내가 아니라서 엄마는 나를 못 알아봤다. 엄마의 의자가 앞뒤로 몇 번 흔들렸다. 나는 몇 번 더 엄마를 외쳐보고, 아니면 어젯밤처럼 확 잠이 들어보자고 암시를 걸어보고, 그것도 잘 되지 않아 내 맘대로 노래를 도중에 꺼버리기도 했는데, 도무지 이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신나는 노래가 멈추자 고요가 엄습했다. 이번에는 엄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등을 뒤로 기댄 채 머물러 있다. 지금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없는 집으로 이따금 엄마를 찾아왔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까. 아무 소리도 없는 집에서 나는 엄마를 관찰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에 함께 있는 거구나. 신나는 노래라도 마저 들려드려볼까. 나는 아까 일시 정지되었던 노래를 내 맘대로 다시 재생해버렸다. 꺼진 줄 알았던 기계가 마음대로 작동하자 엄마는 놀라 벌떡 몸을 세웠다.
“지니야!”
“네?”
“노래 꺼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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