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숏숏픽션_무연고 상속

이 돈 전해 받으면 그 사람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을까?

2023.05.05 | 조회 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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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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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채씨
ⓒ민채씨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나 요즘 바쁜데. 누구 좀 찾느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진이라고 기억하지? 고2 때 나랑 같은 반이었던. 내가 몇 번 같이 너네 교실에도 갔던 것 같은데. 응 맞아 맞아, 안경 안 끼고 갈색 머리에, 바지 교복 입던 친구. 나랑 친했지. 졸업하고도 계속 연락하고 종종 얼굴 보고 지냈어. 내가 얘기 한 적 없나? 암튼 그 친구가 뭘 좀 부탁해서.

 

돈 때문에. 일기장 같은 걸 남겼는데, 거기 적힌 사람들 좀 만나러 다니고 있거든. 상속 문제인데, 아, 아니, 사고는 아니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다가… 응 그렇게 됐어, 한 달쯤 전에. 음, 가족이 없어. 형제 없고, 어릴 때부터 할머니랑 살았는데, 맡겨진 뒤로 한 번도 부모님 얼굴 본 적 없었대. 소식도 모르고. 할머니도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친척들도 없었고. 고3 때였는데 며칠 학교에 안 왔던 것만 기억나. 그땐 나도 뭐 어떻게 뭘 도와야 하는지 몰랐지. 지금 와서 보니까 진이 혼자 어떻게 보내드렸나 싶어. 어렸는데 도와줄 어른도 없고. 마지막 울타리였을 텐데.

 

큰돈이냐고? 진이 입장에선 그랬겠지. 내가 상속이라고 말해서 엄청 거창하게 들렸나보네. 원룸 보증금 삼백만 원이랑 통장에 있던 이백만 원 정돈데… 어, 할머니랑 살던 집도 보증금 조금 걸고 월세 내던 데였는데, 그거 보증금 받아서 쪼그만 원룸 구해서 들어갔었거든. 응 그렇지. 아프셔서 병원비로 많이 쓰셨을 테니까. 진이도 계속 알바 했어.

 

좀 애매해. 자기가 제일 사랑했던 것 같은 사람한테 주라고만 써놨더라고. 그 돈 가지고 비행기 타고 멀리 여행 다녀오라고. 그게 싫으면 탕진하든 뭐든 하라고. 하고 싶었던 거. 응, 유서처럼 쓴 건데 내 앞으로 남긴 내용이야. 그 사람이 누군지 찾아보라고. 근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사귀는 남자들 얘기 듣긴 했어도 결국 진심은 본인만 아는 건데. 그래서 일기장도 다 읽어보고, 방에 남은 물건들 하나씩 꺼내서 살펴봤지. 편지 같은 거. 사진도 전부 보고. 안 되겠다 싶어서 전화번호부에 연락되는 사람은 만나보기도 하고 그러고 있었어.

 

어떻게 그래 아니, 만나본 사람 중에 한 명 짐작되는 사람은 있긴 한데 잘 모르겠어. 진이랑 같이 알바 했던 남자 앤데. 헤어진 지 꽤 됐었어. 음… 위태로워 보였어. 사는 데 지쳐서 어디든 누워 잠들 수 있을 것처럼. 피곤해 보인달까. 응, 돈 얘긴 안 했어. 진이 소식 전하고, 그냥 전해줄 게 있다고만 했어. 보내는 사람 부분에 그 사람 이름 적힌 편지만 다 모아서 들고 나가서 줬어. 꽤 많았거든. 난 신기하더라. 이 안에 다 무슨 말이 들었을까. 날마다 만나서 사랑한다 좋아한다 속삭이고는 여기에 또 얼마나 넘치게 담았을까.

 

근데 상상은 해봤어. 이 돈 전해 받으면 그 사람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을까? 진이 바람처럼. 먹고사는 게 고달파서 포기했던 거 할까? 다녀오면, 해보면, 조금 덜 위태로울까? 벗어날 수 있을까? 그 피곤한 매일매일을. 달라질까? 진이가 원한 게 그걸까? 미안. 얘기하다보니까 격해져서. 넌 잘 모르는 앤데. 계속 이 얘기만 했네. 미안 이제 끊어야겠다. 아냐 안 울어. 그냥 좀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조만간 만나.

 

아냐, 걱정하지 마. 응. 괜찮아. 괜찮아 정말.

 

 


{읽고 쓰는 마음}은 8주 연재 후 2주 휴식 사이클을 반복하며 이어갑니다. :-) 5월 26일에 다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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