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수필] 산수동일기

2023.06.30 | 조회 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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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춤추는 거북이 무구가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꿈속에 친구들이 나왔다. 평소에 자주 만나는 애들도 아닌데 무척이나 반가웠다. 깨고서 꿈인 걸 알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 후로 종종 몇 번이나 친구들이 꿈에 나왔다. 다 다른 그룹의 친구들. 수도권의 이런저런 동네에서 만나던 친구들. 연락해 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괜히 더 그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나고 자란 인천을 떠나 광주에 왔다. 새로운 도시에 터전을 잡는 일에는 내심 자신 있었다. 나름 국내외로 단기, 장기 여행 경험이 잦았고,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낯선 환경에도 꽤 잘 적응하는 사람인 걸 발견했다. 그래서 신혼 생활의 도시를 타지로 결정하는 데에도 그다지 큰 거부감이나 불편함이 없었다. 게다가 광주는 남편을 만나기 전에도 세 번이나 여행을 왔던 곳, 연애를 시작한 뒤에는 더 자주 방문했던 곳이었다.

 

정신없이 인천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2주가량의 신혼여행 뒤에 돌아온 우리집에서, 나는 꽤 잘 적응해서 잘 살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첫 일 주일은 시차 적응에 실패한 탓이기도 했지만, 오전에 깨어있던 날이 하루도 없었다. 눈을 뜨면 이미 점심때가 지나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밥을 오후에 먹고, 일 때문에 나갔던 남편을 기다리며 침대나 소파 따위에 눕거나 앉아서 뒹굴뒹굴하다가, 잠들었다가, 깼다가, 군것질하다가 저녁을 맞이했다.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는 날도 있었고, 아닌 날도 있었다. 별일 없이 하루를 보낸 것 같았는데, 침대에 누워 잠을 자려다 눈물을 왈칵 쏟아내던 밤도 있었다. 힘들지 않은 줄 알았는데 힘들었던 것 같다.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어서 집에 돌아와서 내 기분을 살펴주고, 산책이나 카페 데이트를 자주 권했지만, 그다지 그 제안에 응하고픈 마음이 아니었다. 그냥 집에서 쉴래. 그렇게 말하곤 집안 살림들을 좀 만지다가, 또다시 침대나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쉽게 잠들었다. 그리고 자꾸만 꿈을 꾸었다. 친구들이 나오는 꿈을.

 

하루는 연애 시절 남편이 소개해 준 찻집에서 약속을 잡았다. 광주에 이사를 오면 자주 가야지 마음먹었던 곳이었으나, 막상 결혼하고 나서는 약속이 잡혀야 나갈만한 곳에 있었다. 광주에 이사 온 지 3주가 지나갈 즈음이었고, 처음으로 남편 없이 홀로 잡은 약속이었다. 

찻집에서 만난 사람은 전에도 광주에서 몇 번 만났던 선배 간사님이었다. 간사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생각지도 않게 또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한 시간 정도 대화를 이어가다가 이야기가 끝날 무렵, 간사님이 내게 해주고픈 말이 있다고 했다.

네가 이 도시에 뿌리내리길 바란다고. 그건 누군가의 아내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이 도시에서 사는 거라고. 

그 말을 들으니 선선한 바람이 마음에 불어왔다. 그래, 나는 누군가의 아내여서 어쩔 수 없이 이 도시에 내려왔던 것이 아니었지.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 몇 번이고 내게 정말로 광주에서 사는 것이 괜찮으냐고 물었다. 수도권에서 비수도권으로 생활반경을 바꾸는 것이 어떤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름의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신혼 생활지를 광주로 선택했다. 그건 분명한 나의 선택이 맞았다. 그리고 내 마음은 평온했다.

 

광주는 내가 선택한 도시.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묻는다면, 그중에 하나는 무등산이었다. 1187번 시내버스를 타기만 해도 무등산 중턱에 갈 수 있다. 이곳은 역사적 의미가 깊은 장소를 도시 곳곳에 품고 간직하는, 기억하려 애쓰고 수고하는 도시. 예로부터 수도에서 멀어 많은 이들이 유배되고는 했지만, 오히려 그 끝자락 동네의 한적함과 느긋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꽃피웠던 예술의 도시. 

내겐 이곳이 기회의 땅으로 보였다. 내게 새로운 기회들을 제공해 줄, 느긋하고 여유롭고, 좋은 곳. 빛고을 광주.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선택했다. 남편과 함께.

 

내가 사는 산수동 우리 집에선 고개만 돌려도 무등산이 보인다. 저녁 설거지를 할 때면 싱크대 앞 작은 창으로 지는 햇빛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다시 한번, 나는 우리 집이 있는 산수동이, 그리고 내가 선택한 도시 광주가 좋아진다. 그곳에서 나는 이렇게 일기를 쓴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이다. 내가 선택한 이 도시에서 뿌리를 조금씩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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