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識滿天下(상식만천하) 知心能幾人(지심능기인)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명심보감에 있는 문장이기도 하고, 영화 <벌새>에서 주인공 은희가 영지 선생님에게 학원에서 배우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얼굴을 아는 사이와 마음을 아는 사이.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알아가고, 놀랍게도 후자의 경험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심지어는 가족 사이에서도, 오히려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 사실은 내 마음을 정말 모르는 사람이란 것을 경험해 본 적 있으신가요? 마음 안에 꽤 큰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면서 그럴 때마다 저는 절실하게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나 말고요, 누군가 나보다 먼저 이런 경험을 해본 적 있는 사람을 말이에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상황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그래서 내 아픈 부분을 쑤시지 않고 차근하게 처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만한, 그런 어른을요.
꽤 오랫동안 간절하게 찾았지만, 만날 수가 없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찾던 어른은 현재에는 존재할 수 없는 ‘미래의 나’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마음에 위안이 되는 건, 그런 어른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사실은 모두가, 그런 어른의 존재를, 심지어는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최근에는 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그런 어른을 만나고, 함께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실감하지 못한 채로 정신없이 일 처리를 하다가 잠시 여유가 생겼을 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어떻게 이런 행운이 나에게 찾아왔지? 맞아요, 좋은 어른을 만난다는 것은 나의 재능과 애씀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운에 따른 것 같아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에요. 그저 어딘가에서 주어지는 것이죠.
1994년, 서울 대치동에 살던 은희는 1남 2녀가 있는 떡집 막내딸로, 남자 친구도 있고 단짝도 있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입니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청소년기에 겪을 다양한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라는 시대적 사건이 한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까지도, 우리는 영화 속 은희의 삶을 쫓아가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영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서울대를 다니지만, 꽤 오래 휴학했다는 영지 선생님은 어쩌면 지금의 저보다 더 어린 나이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은희의 시선으로 영지 선생님을 보게 됩니다. 영화 속에는 은희 주변의 많은 어른들의 얼굴이 나옵니다. 아빠와 엄마, 오빠와 언니, 담임 선생님, 의사 선생님, 문방구 주인 등. 하지만 자기 자신을 싫어하기도 하고, 자주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던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이야말로 은희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먼저 그 길을 가본 사람, 은희의 어른이었으리라 생각해요.
내 마음을 알아주고, 쉽게 불쌍히 여기지 않고 존중해주는 어른을 만나는 일. 그런 행운이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 1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돤이
우리 모두에겐 어쩌면 어른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느 날 상담을 받게 되었을 때 상담사님이 제게 평생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말해주더라구요. 내 마음 속에 찾고 있던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어른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작가님께서 좋은 어른을 만나셨다니 저도 행복할 따름입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