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어찌나 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던지. 그만큼 사랑을 겪고 있거나, 겪었거나, 겪을 사람이 이 세상에 많이 존재한다는 말이겠지요. 사랑 이야기가 주제로 나오면 괜히 움츠러들고 자신 없던 때가 있었는데, 그건 제가 사랑에 대해 꽤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사랑이 무엇이라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을 오해하는 일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인가요?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길가에 맨몸으로 있던 미스테리한 인물 미하일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또한 밝혀집니다.
답은 이미 아시다시피, 사랑입니다. 사랑. 사람을 살게 만드는 것, 결국 살아가게 하는 힘. 너무 종교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과하게 교훈적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 사랑. 이 단순명료한 이야기가 요즘은 좀 판타지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환상을 믿으며 살고 싶어요.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는 인물과 인물들 사이 사랑의 작대기가 처참하게 엇갈립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극 중에서 ‘바냐 아저씨(외삼촌)’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 소냐를 좋아합니다. 소냐는 바냐의 친구인 의사 아스트로프를 짝사랑하거든요. 하지만 아스트로프는 소냐의 새엄마인 젊고 예쁜 엘레나를 좋아하고, 사실 바냐도 엘레나에게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소냐의 아빠와 엘레나는 떠나고, 아스트로프도 떠나고, 바냐와 소냐는 남아서 그동안 해왔던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열병 같은 사랑이 떠나가고, 남은 삶은 어찌해야 할까요. 소냐는 눈물 흘리는 바냐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해요. 삼촌, 그래도 우리 살아가요.
처음 짝사랑에 실패했을 때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게 사랑인지 뭔지 잘 모르겠고, 이 감정의 존재 자체가 힘들고 어려워서 어영부영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동거리던 서투름.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짝사랑하고 실패하고, 사랑하고 실패하고를 반복했는지. 조금 반복하면 능숙해지고 어려움도 줄어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단지 연애 상대를 향한 사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삶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늘 짝사랑인 것 같아요. 내 마음과 열정을 상대방이, 세상이 오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인정하는 일이 어디 쉽게 일어나던가요.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가요.
이승우의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아주 독특하게 사랑을 설명합니다. 사랑은 겪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의 몸을 숙주 삼아 기생함으로 시작된다고요. 그래서 숙주로서의 조건은 있을 수 있지만, 자격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고요. 자격은, 사랑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부여하는 것이라고요.
사람이든 삶이든, 사랑을 한다면, 내가 자격이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고 있는 사랑으로 인해 이미 그 자격이 부여되었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려봅니다. 사랑해도 될까 아닐까, 그런 소모적인 질문은 이제 그치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 보려 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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