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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저는 3개월간의 글쓰기 수업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조금 여유로운 주말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편지도 필요한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8. 마흔 일기 / 며느리
전화 감옥
몇 해 전인가 김장하는 날 남편의 외가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모여서 김장을 하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그때 아버님이 하신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다른 친척들이 이제 시간이 흐르면 김장도 안 하지 않겠냐고 하자 아버님은 짐짓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으시며 '김장하라고 하면 희정이는 아마 배추 농사부터 지을 아이'라고 하셨다.
그런 며느리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것은 온전히 내 탓이었다. 잘하고 싶었다. 착하고 참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으니까.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서울에 사셔서 나는 시골집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었다. 툇마루와 마당, 오래된 감나무와 항아리 같은 것들. 어릴 때 명절이면 뉴스에서 시골집에 내려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있는 풍경들을 보여줬다. 나는 경험해 본 적은 따뜻한 장면이 궁금하고 부러웠었다. 그런던 나에게 남편의 외갓집은 처음 경험하는 시골집이었다. 마당이 있고 뒷마당에는 정말 커다란 감나무가 있고, 나무로 된 미닫이 격자 창살이 있는 한옥 집. 김장하는 날이면 온 가족이 그 집으로 모였다. 집 안에는 빈티지 숍에서 팔 것 같은 광택 나는 커튼이 걸려있고, 이불장 위에는 무거운 목화솜 이불이, 자개로 된 찬장에는 요즘 유행하는 밀크 글라스 그릇들 있는 오래된 집이었다.
나는 그 집이 좋았다. 가끔은 동네 양조장에서 막걸리도 받아오고, 석쇠에 고기도 구워 먹으며 보내는 조금 불편한 시골집이, 뉴스에서 보던 딱 그 풍경이어서 좋았다. 시가 식구들은 오래되고 불편한 것들을 반겨하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셨다.
김장을 할 때도 딱히 내가 할 몫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빴고, 갓난아기와 둘이 따뜻한 아랫목에서 꾸벅꾸벅 졸다 올 때도 있었다. 다만 딸과 사위는 올 필요 없지만 아들과 며느리는 그래도 얼굴은 비춰야 한다는 암묵적 당연함이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을 때가 있었다.
평소에도 내가 시가에 가서 크게 하는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설거지와 과일 깎기, 커피 타는 정도가 내 몫이었다.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었고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물론, 결혼하고 한 번도 설거지를 시킨 적 없다는 시가, 며느리가 들어와 제사를 없앴다는 시가, 명절마다 호캉스를 보내준다는 시가 등등 유니콘처럼 들어 본 적 있지만 나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시가도 확실히 존재했다. 심지어 점점 많아졌다. 목이 콱 막혀서 불편할 때마다 위아래로 비교하자면 끝이 없으니 지금에 만족하자 스스로를 타이르며 괜찮은 이유를 찾았다. 우리 부모도 완벽한 장인 장모님은 아니니까. 남편도 나름 고생했으니까. 어른들은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실 테니까. 그래도 예뻐해 주시니까. 내가 도우면 어머님이 조금 편해지시니까. 정작 '나'를 뺀 이유들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답답함이 사라지길 바랐다.
대답한 시집살이가 있는 결혼생활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일들은 많았다.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식사 자리에서 다 드신 국그릇을 며느리인 나에게 건네주신 아버님. 임신한 며느리에게 설거지를 시키지 않은 것을 고마워하길 바라는 어머님. 몇 해 전 추석에 전을 부치고 있는데 인사를 하러 오신 손님께서 '아이고 형수님 힘드시겠어요.' 하자 어머님은 '아니에요. 이제 일할 사람 와서 괜찮아요.'라고 했던 순간들.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실제로 일은 어머니가 다 하셨음에도 나는 그 갸우뚱한 순간들마다 숨이 막혔다. 하지만 초보 며느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헤헤 웃으며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일할 사람? 내가 어머님 일들 거들어 드리고 있지만 일하러 온 사람인가? 며느리가 떠주는 국을 드시고 싶으셨나? 설거지에서 제외해 줬다고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애초에 설거지가 당연히 내 몫인 건가? 온갖 질문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머리를 감으면서도 그때의 상황들이, 그때의 말이 계속 반복해서 재생됐다. 그때 내가 어떻게 말해야, 행동했어야 적절한 걸까 곱씹으며 결혼 초반 몇 년을 괴로워했다.
어느 날은 우리 집에서 설거지하는 나를 보시던 시어머니가 수세미를 두 개 쓰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하나는 거품을 내는 용도로, 다른 하나는 헹굴 때 씻어내는 용도로.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네네' 외에는 대답할 줄 모르던 며느리였으므로 나는 그때부터 수세미 두 개로 설거지를 했다. 그릇에 눌어붙어있는 밥알 하나까지 놓치는 법 없이 뽀득뽀득 정말 깨끗하게 닦였다. 하지만 설거지를 할 때마다 묘하게 불편했다. 설거지라는 아주 간단하고 일상적인 것을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리라. 쌀은 이렇게 씻어라, 그릇은 이렇게 세워두어라, 현관은 항상 깨끗이 해라, 화장실 문은 꼭 닫아라, 그 이후로도 시어머니는 살림을 가르쳐주고자 하셨고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기꺼이 따르면서도 매 순간 언짢은 기분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부인의 딸 말고 당신의 아들에게도 이 지혜를 나누어 주셨는지 묻고 싶었다. 아들에게 일찌감치 알려주셨다면 굳이 나에게까지 알려줄 필요 없는 조언이었다. 어느 날은 설거지를 하다가 이제 설거지도 내 마음대로 못하나! 반항심이 들어 충동적으로 수세미를 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수세미 한 개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주변을 보면 몇 년은 시가에 맞추려고 노력하다가 크게 다투고 끝내는 왕래하지 않거나 거리를 두는 것으로 대부분 비슷한 결말을 맞는듯 보였다. 나는 10년이 걸렸다. 물론, 사근사근 애교 많은 타입은 아니라 평소에도 살가운 며느리는 아니었지만 말과 행동에 항상 진심을 담았었다. 내 가치관과 다른 두 어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니까.
노력하기를 그만둔 것은 올해 5월부터였다. 어버이날 친정 식구들과 부산에 다녀오는 길, 12시에 체크아웃하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6시가 다 되어있었다. 긴 시간 차 안에서 멀미하는 큰 아이와 끊임없이 간식을 찾는 둘째 시중을 드느라 진이 다 빠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어디서 또 에너지가 생겨났는지 놀이터로 뛰어갔고 나도 따라가면서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다. 수화기 너머 어머님은 기다렸다는 듯 기분 나쁜 속내를 감추지 않고 이야기하셨다. 어버이날 이 시간에 전화를 하냐, 여행하며 아이들이 친할아버지랑 친할머니는 안 보고 싶어 했냐, 내가 잘 못 키웠나 보다 같은 말들이었다. 친정식구들과 좋은 시간 보내다 왔냐라는 말이 나올 거라 예상했던 나는 당황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헤헤 웃으며 네네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팽팽하게 당겨진 끈이 탁! 소리를 내며 끊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는 연결될 수 없으리라 직감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난 10년 동안 전화 공포증을 견디며 3일에 한 번씩 전화를 걸고, 영상통화로 아이들 얼굴을 보여드리고, 생일날 용돈을 봉투에 담고, 선물을 고르고, 케이크를 주문하고, 꽃다발을 예약하던 것이 어버이날 전화를 늦게 한 것으로 다 소용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 모든 것들이 아들이 아닌 며느리의 수고였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매년 여름 시가 식구들과 여행 계획을 세우고 숙소를 알아보는 것 역시 며느리의 노력이었음을. 주말에 시가에 간 지 오래된 것 같으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보러 갈까 먼저 이야기한 것도, 동네에 좋은 맛집을 가게 되면 다음에 아버님 어머님 모시고 오자 한 것도, 여행지에 가면 맛있는 걸 택배로 보내드리는 것도, 제 때에 전화를 드리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다 허무해졌다.
생각해 보니 결혼하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친정 식구들과 간 여행이었다. 엄마를 모시고 간 적은 있었지만, 아이들을 봐주시기 위해 우리 여행에 동행하셨던 거지 우리가 모시고 가는 여행은 아니었다. 차마 짧게 설명할 수 없는 여러 이유들로 아빠와 다시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렇게 부산으로 겨우 1박을 처음 함께 한 건데 뭐가 문제였을까. 잘못 키웠다면 아들에게 이야기하실 것이지 나를 키운 적 없는 사람에게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아이들이라면 간이고 쓸개도 다 빼주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여행을 갔는데 내 아이가 왜 어버이날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를 보고 싶어 해야 할까. 하나부터 열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전화를 끊고도 심장이 두근거려서 진정이 안 됐다. 결혼하고 2년 만에 시골로 내려오면서 시댁 근처에 사는 동안 잘하겠다 마음먹었고 실제로 그랬다. 주말마다 자주 찾아뵙고, 생신이나 어버이날 꼬박꼬박 함께 식사했다. 그동안 어버이날 대부분을 시가에서 보냈음은 물론이다.
그날부터 다시 전화를 받지 않게 되었다. 걸 수도 없었다. 전화라면 아주 치가 떨렸다. 전화기를 없애버리고 싶어서 진지하게 며칠을 고민했다가 학교나 유치원의 연락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포기했다.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내가 안부전화를 자주 하지 않자 시어머니가 하셨던 말이 있다.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니?' 이제야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그걸 알아차리는 데 너무 긴 시간이 걸렸구나. 나는 절대로 편해지면 안 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전하기 위해, 잘하기 위해, 가까워지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이나 시도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남편이 조심스럽게 그래도 아이들 영상통화는 좀 해주면 안 되겠느냐 아버지가 애들 얼굴 보고 싶어 하신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한 달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의 전화 통화를 곱씹으며 잠 못 이루던 때였다. 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것이 괴롭고 힘들었다.
"당신이 결혼해서 지금까지 우리 엄마한테 애들 영상통화시켜 준 적 있어? 나는 10년 동안 매주 두세 번씩 했어. 3일 정도 지나면 전화 안 한 지 좀 되었다고 바로 전화가 올 거라는 걸 아니까 날짜 세어가며 했었어. 그런데 지금 딱 한 달. 겨우 한 달 안 한 거잖아. 이런걸로 나 나쁜 년 만들지 마."
결혼 초에 날씨며 저녁 메뉴 같은 것을 미리 생각해 두었다가 딱히 할 이야기도 없는 시어머니를 붙잡고 전화했던 노력 같은 것들을 당신은 절대 모르겠지. 애초에 남편이 했으면 될 일이었다. 손주들 얼굴이 보고 싶은 아버지가 신경 쓰인다면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면 될 일었다. 그랬다면 어버이날 전화를 드리지 않아 잘 못 키웠다는 얘기도 엉뚱한 며느리가 아닌 아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갔을 것이다.
며칠 뒤 어머님 무릎이 안 좋아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점심이라도 먹지 않겠느냐 아버님께 전화가 왔다. 물론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로 남겨 놓으신 내용이었다. 다시 가슴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덜컥 집으로 오시지 않을까 겁나서 메시지를 보자마자 노트북을 들고 뛰쳐나왔다. 빠르게 걸으며 일이 많아 어렵다고 답장을 보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실 때도 있었다. 전화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또다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남편에게 전화해서 다짜고짜 소리쳤다.
"우리 엄마가 손가락 아프다고 당신한테 전화한 적 있어? 손가락 수술하고 나서도 당신이 괜찮으시냐 전화 안 했다고 뭐라 한 적 있어? 엄마 아빠 생신날 당신이 선물 고민하고 꽃다발 준비한 적 있어? 우리 엄마 아빠랑 여행 가려고 당신이 스케줄 잡은 적 있어? 아니잖아. 내가 하니까 당시한테 안 바라잖아. 당신은 한 번도 안 한 걸,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걸, 나도 안 하는 것뿐이야. 어머님 무릎 안 좋아서 병원 다녀오셨다고 아버님이 전화 왔어. 이런 전화 안 받게 해 줘. 안 하겠다는 게 아냐 내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어 정말로."
우습게도 나는 아직도 집에 도착하면 주차장에서부터 파블로프의 개처럼 시가에 전화해야겠다는 생각부터 한다. 습관이란 무섭지, 저녁을 먹고 잘 준비를 할 때면 여전히 아버님께 영상 통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내 노력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때로는 괘씸해하는 사람에게, 편안해지길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길들여져 버렸다. 시가와 거리를 두었다고 해서 통쾌하거나 홀가분해졌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 않아서 슬프다. 그것도 내가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 오래 보아야 하는 사람, 연민을 느끼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직도 알 길이 없다. 지난 10년 동안은 이해하려고 노력해 봤으니 앞으로는 방어하고 지키려고 시도할 뿐이다. 여전히 나는 좋은 며느리이고 싶다. 좋은 분들이고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하고 있으므로. 다만 그동안의 노력을 그만두고도 온전한 내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서로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뉴스레터로 어떤 이야기를 보내야겠다 마음먹었다가도 눈앞에 닥친 일들에 대해 먼저 쓰게 되네요. 삶에 희망이 넘치고 멋지게 늙어가는 마흔에 대해 쓰고 싶은데 여전히 속이 문드러지는 갑갑한 중년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모호한 날들에 선명한 기준이 생기고 있다는 거지요. 노력하기를 그만두기처럼요. 그러다 보면 곧 기쁜 날에 대해 쓰는 날도 올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모두 안녕히!
22.11.29. 희정.
💌문화다방 소식
문화다방에서는 매년 연말 기부를 하고 있어요.
올해로 6년째 이어가고 있는 이벤트인데 이번에는 제 뉴스레터 수익 전액과+a를 기부하려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보내주신 구독료와 커피 쿠폰도 수익화 하지 않고 잘 모아두었어요.
선물하기와 응원하기로도 기부에 동참해 주실 수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https://maily.so/moonzakka
주소를 복사해서 마흔 일기를 주변에 알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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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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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뉴스레터에는 뭐든 써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나와 같은 상황과 마음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들어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마음으로 쓰고 있답니다. 저도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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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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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저도 딱 불편함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때인 것 같아요.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마흔을 핑계로 이제야 저를 제대로 돌본다는 기분이 들어요. 조금씩 더 편해지겠지요.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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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lp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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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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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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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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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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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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