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9월이 되었습니다.
9월에는 제 생일이 있고, 엄마랑 같은 날 생일 하기 싫어서 예정일보다 열 흘 뒤에 태어난 딸의 생일도 있는 달이랍니다. 저는 벌써부터 생일에는 서프라이즈를 해달라는 딸의 주문으로 골치가 아프네요.
그래도 늦여름과 초 가을 사이 지금의 날씨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여름에 가지 못했던 바다를 지금이라면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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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마흔 일기 / 집
집이라는 삶의 방식
이번 여름에는 아빠의 고향인 포항으로 가족여행을 가기로 되어있었다. 아빠의 사촌 누나이자 나에게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고모의 초대 덕분이었다. 고모는 바닷가 앞에서 숙박업소를 오래 운영하셨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그만 두실 생각이라고 하셨다. 문을 닫기 전에 친척들을 다 초대해서 쉬었다 가면 좋겠다고, 8월 초 일주일을 비워 둘 테니 언제든 오라는 소식에 가뜩이나 포항 이야기를 자주 하시던 아빠는 이때다 싶어 온 가족 여름휴가를 추진했다.
아빠와 남편, 남동생의 휴가 날짜를 여러 번 조율해서 어렵게 3박 4일 시간을 맞췄다. 워낙 바다를 좋아하는 터라 사실은 내가 아이들만큼이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의 여행을 무산되었다. 하필이면 포항을 콕 찍어 지나간다는 밉살맞은 태풍 때문에.
떠나기 전날까지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터라 대비책을 마련하기는 이미 늦어버렸고, 하는 수없이 친정집에라도 모이기로 했다. 바다에 못 간다며 우는 둘째를 달래서 대신 할머니 집에서 일주일 내내 놀자고, 여행 가려고 싸두었던 짐 그대로 친정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여행에서 쓰려고 모아 놓은 돈을 장 보는데 다 쓰셨다고 한다. 짐이 많다고 해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더니 아빠 차 트렁크에서 박스가 끊임없이 나왔다. 두 노인네가 이걸 다 어떻게 들고 왔는지.... 덕분에 7명 대 가족은 일주일 동안 넘치는 술과 고기로 휴가 내내 잔치를 벌였다.
친정에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 집과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아이들은 잘 시간을 잊고 놀았고 느지막이 일어났다. 나는 애들보다 더 열심히 노느라 더 늦게 잠들고 가장 나중에 일어났다. 아이들의 기상시간이 곧 내 하루의 시작이었던 평소와 다르게 여기서만큼은 느긋했다. 내가 세상모르고 자다 나와도, 아이들은 할머니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티브이를 보며 볼록한 배를 통통거리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평소 낮잠을 자지 않는 편인데 친정에 가면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죽은 듯이 잘 때가 많았다. 엄마 집에 왔으니 낮잠을 좀 자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낮이고 밤이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결에 간간이 방 문 닫아주는 소리, 문밖에서 울리는 내 핸드폰 전원이 꺼지는 소리. 엄마 자니까 들어가지 말아라 아이들을 제지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럴 때는 친정집 침대가 마치 방공호같이 느껴진다. 내가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잠결에도 아이들은 아무 문제없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이 집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거다.
친정집은 18평의 작은 아파트라 우리 네 식구에 남동생까지 오면 잠잘 곳이 없어 요리조리 테트리스를 해야 했다. 식탁을 벽에 붙이고 그 자리에 접이식 매트리스를 펴고 한 명, 거실에 둘, 안방에서 할머니랑 한 명, 작은방에는 짐이 너무 많아서 할아버지 혼자. 그러면 남은 한 명은 소파에서 자거나, 남는 바닥 어딘가에 이불을 두 개 겹쳐 깔고 쪽잠을 잤다.
오늘은 누가 어디에서 잘까 매번 빈자리를 찾아야 했지만 불만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우리는 집 안 곳곳에 흩어져서 나사가 빠진 태엽 인형처럼 반쯤 누운 자세로 쉴 뿐.
지금 친정집은 내가 결혼한 후 엄마가 세 번째로 이사한 집이다. 청약에 미끄러지길 여러 해 만에 드디어 임대 아파트 당첨되었다. 40평의 신축 아파트에서 재개발 예정지의 연립으로, 그리고 다시 방 두 칸 임대 아파트로, 우리 집 이사의 역사는 내가 어릴 적부터 무척 파란만장했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의 신혼 시절부터 내 집 마련이라는 거대한 꿈을 위해 같은 동네 안에서 계속 이사를 다녔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집만 여덟 개인데 그중 가장 좋았던 곳은 다세대 주택의 2층 집이었다.
엄마 아빠는 저녁을 먹고 집 안에 모기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놓은 뒤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행선지는 항상 언젠가 진짜 우리 집이 될 거라는 다세대 주택이었다.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려주고 그 근처를 배회하면서 아빠는 자주 저 언덕 위 주택이 우리 집이라는 얘기를 했다.
‘저기가 우리 집이야. 나중에는 우리가 저기 살 거야.’
철없는 동생과 나는 당장 내 입에 들어와 있는 아이스크림이 좋을 뿐, 저 집이 우리 집이라면서 왜 당장 저기서 살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내일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싶다는 생각만 했겠지.
언젠가 내 집에 살게 될 날을 꿈꾸던 부모님은 밤마다 그 집을 보며 얼마나 달콤한 꿈을 꾸셨을까. 지금에서야 그 밤 산책이 부모님께 희망이었겠구나 짠하다. 매일 밤 그 집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을 보며 얼마나 많은 꿈을 꾸셨을까.
우리는 그 주택에서는 꽤 오래 살았다. 교복을 입었던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그 2층 집과 함께였다. 창문 밖으로 벚꽃 나무가 보이고, 현관에는 라일락 향기가 나던 곳.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동네 특유의 소박한 화단과 나이 많은 나무들 덕분에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체감하며 자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내 결혼을 앞둔 시점에 엄마는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그야말로 고생 끝에 낙이라고 부를 만했다. 평생 살 집이라 생각한 엄마는 거금을 들여 커튼을 맞추고, 이제 둘이 된 딸 부부와 훗날 태어날 손주들까지 온 가족이 둘러앉기 좋은 8인용짜리 원목 식탁도 마련했다.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식탁은 엄마의 오랜 소원이었다. 넓은 거실이 있는 집에서만 가능한 소원.
식탁과 같은 브랜드의 커다란 소파와 침대까지 집은 세트로 채워졌다. 처음으로 집 안에 가구가 비슷한 색을 띠게 되었다. 엄마는 그 꿈같은 새 집으로 옛날에 쓰던 프라이팬 하나도 가져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지리멸렬 자질구레하던 것과의 안녕이자 엄마 인생 리셋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보아오던, 엄마가 평생을 기다린 그 집은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왜 그런 사연 하나쯤 어느 집이나 있지 않나. 아빠의 사업이 망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곤 하는. 우리 집도 그랬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을 먹고산다는 데, 우리 집이 그 정도는 아니었는지 당장 먹을 것과 살 곳을 걱정해야 했다. 다행히 재개발을 위해 빈 집을 사두었던 지인의 도움으로 부모님은 오래된 연립에 들어갈 수 있었다. 14평짜리 작은 집은 시간을 거슬러 다시 과거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가난이 익숙한 탓일까,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장미 연립은 얇은 나무틀로 된 유리창 하나가 단열의 전부인 곳이었다. 여름에는 주민센터에 가서 에어컨 바람을 쐬지 않으면 질식할 정도의 찜통이었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난방 텐트를 치고 살았다. 가장 큰 문제는 벽마다 핀 곰팡이였는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외갓집만 다녀오면 감기에 걸렸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 초라하고 열악한 집을 우리 가족은 미워하지 않았다.
‘이 집은 낡았는데도 이상하게 정감이 가.’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으려고 커다란 비닐로 창문을 덮으면서도 이 집에 느끼는 희한한 애정에 대한 얘기를 자주 했다. 갈 곳 없는 친정식구들을 받아준 곳이어서였을까. 실제 우리가 느끼는 온도와 별개로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막 기어다니는 아기를 씻기기에는 화장실이 너무 좁고 추워서 대야를 거실로 가지고 나와 끓는 물을 부어가며 목욕을 시키면서도 웃음이 났다.
결혼 후에 부모님의 거주지가 바뀔 때마다, 나고 자란 집이 아니면서도 편안함을 느낀다는 게 참 신기했다. 내 방이 없음은 물론이고, 그렇다 할 추억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친정집 현관문을 열면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고 넓은 신축 아파트였을 때도, 낡고 허름한 연립이었을 때도, 잘 곳을 찾아 테트리스를 해야 하는 임대 아파트도, 엄마가 머무는 곳은 크기나 누추함의 정도와 상관없이 언제나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엄마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필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눈과 손이 있었다. 친정에 가면 결혼 전 내가 쓰던 침대가 고치고 고쳐 조금 낡은 모습으로 엄마의 침대로 변해 있었다. 베란다가 있는 집에서는 어김없이 작은 화단이 만들어졌고, 그럴 공간이 없으면 창틀에라도 조르르 엄마가 키운 화초가 줄지어 있었다. 비싼 원목 의자였을 때나, 플라스틱 접이식 의자였을 때나 변함없이 엄마는 직접 코바늘로 뜬 방석을 만들어 올렸다. 눈길이 자주 머무는 빈 공간 어딘가에는 물이 담긴 작은 접시가 수반이 되어 길에서 꺾은 들꽃이 동동 떠다녔다. 도마를 올려놓을 공간이 없는 작은 주방에서도 엄마의 음식 냄새가 나면 군침이 돌았다. 엄마의 살림은 없어도 초라하지 않았고 있을 때도 익숙한 듯 자연스러웠다. 엄마가 삶을 다루는 방식이 그랬던 것처럼.
집에 대한 글을 쓰다가 자연스럽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떠오르는 건, 나에게 집이란 엄마와 동의어라서 그런 것일까.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쓰는 여자의 시작에는 엄마가 있다고 했던 것처럼 내 모든 것의 시작이 엄마라서? 그래서 살다가 궁금한 게 생기면 고단한 엄마에게 묻지 않고 엄마가 돌봐왔던 집을 떠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내가 집에 갖고 있는 유별난 애정의 근원이 무엇일까 항상 궁금했었다. 집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나는 건축가도 아니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의 사는 모습과 동네와 주거의 형태를 물어 물어 책으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
집에 대한 글을 쓰고, 다른 사람의 살림을 엿보며 깨달은 것은 결국 삶의 방향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거였다. 내가 갈피를 잃고 헤매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찾은 각자의 해답이 궁금했다. 그건 그들 성과를 묻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았다. 9월에 끝내야 하는 책 작업도 아직이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나만의 해답도 찾지 못지만, 엄마에게 집이 삶의 방식이듯, 나도 나에게 맞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길 바란다.
글을 쓰는 여자의 시작? 근원? 이라고 막연히 기억하고 있었던 글의 정확한 글귀는 이거였네요.
"글을 쓰는 여성이라면 어머니를 통해 생각이 거슬러 올라간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23. 9. 7.
희정.
💌문화다방 소식
가을학기 글쓰기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글쓰기 반은 강의 형식의 수업 노트에서 에세이와 워크지 형식으로 바꿔 처음 글을 써보려는 분들이 더 쉽게 함께할 수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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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수업 설명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올 가을 막연히 그를 써보고 싶으셨거나, 나만의 책을 만들어 보고 싶으셨던 분은 함께해요. 다정히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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