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1. 마흔 일기 / 살림

어느 날 살림을 놓았다

2022.08.01 | 조회 1.05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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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첫 번째 마흔 일기를 보내드립니다. 목차에는 없었던 살림에 대한 글이에요. 목적이 없는 저의 일상을 글로 쓰다 보니 아무래도 생각해두었던 글감보다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오게 되네요. 

인스타에 그동안 왜 저희 집 사진은 올릴 수 없었는지 여기에서 밝힙니다. 우리 집은 정말이지 개.판. 이거든요. 어릴 적부터 맥시멀 리스트인 데다가 가구 배치는 폐쇄적인 걸 좋아해서(침대를 삥 둘러 책장으로 벽을 쌓고 아늑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엄마는 제 방에만 들어오면 답답해하셨지요. 그때는 '얘가 예술가가 될 건가 보다. 예술가들은 이러고 산다더니 진짜인가 보다.' 하셨다는데 막상 제가 한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니 이게 무척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잘하지도 못하는 걸 나 혼자서, 매일, 당연하게 해야 한다니요. 

저는 투사 스타일이 아닙니다. 싸우고 쟁취하기를 꺼려 해요. 비겁한 제가 저의 에너지를 투쟁에 쏟지 않으며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이거였습니다. 구독자 님은 저보다 더 현명하고 정당하게 살림과 관계 맺고 계시길 바랍니다.

 


 

1. 마흔 일기 / 살림

어느 날 살림을 놓았다

 

 

 

 

살림을 포기한 것은 일종의 저항이었다. 육아의 98%를 도맡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소와 빨래까지 다 끝내고 다시 내 시간을 만들어 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어떻게든 해내려고 했었다. 아직은 아기가 어려서, 그래도 집에 있는 내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언젠가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지만 살림을 대신해 줄 사람을 들일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살림을 놓는 것이었다. 

의식적으로 살림을 포기했다. 설거지를 며칠 쌓아놓는다거나 바닥 걸레질을 게을리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이들을 먹이기 위한 요리와 당장 입히기 위한 옷 빨래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요리와 빨래 말고 살림에 뭐가 더 있나 의아한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스스로 1인분의 삶을 책임져 본 후에 다시 얘기하자) 

 

내가 요리와 빨래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끼를 해 먹이느라 설거지통이 가득 차면 남편은 하는 수 없이 늦은 밤까지 설거지를 했다. 야근하고 와도, 회식하고 와도 설거지는 했다. 더 정확하게는 설거지만 했다. 설거지가 되어있지 않으면 다음 날 세끼를 모두 사다 먹었기 때문에 주방을 다시 요리할 수 있는 환경으로 되돌리는 건 내가 남편에게 의도적으로 남겨둔 몫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하지 않으면 남편이 할 거라는 기대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노림수를 써가며 작전을 짤 정도로 여유 있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하지 않으면 남편도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곧 집이 엉망이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화장실에 휴지를 다 쓰면 빈 휴지심이 화장실 아래 잡지 걸이에 쌓였다.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지만 나도 남편도 게으른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냥 살았다. 누군가는 모아서 버려야 하는데 살림을 놓으니까 그것마저도 하기 싫었다. 살림이란 아주 짧은 시간이 촘촘히 쌓여 결국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쓰게 되는 중노동 아닌가. 가족들의 생활과 성장, 사건, 날씨, 계절에 따라 움직이는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면밀하게 해결해 놓으니 티가 안 날 뿐이다.

나는 마치 이 집을 정리하고 치우는 데 단 1분도 시간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모른 척 지냈다. 다 쓴 휴지심은 계속 변기 옆에 쌓였고 잡지 걸이 밖으로 밀려 나와 축축한 화장실 바닥에서 머리카락과 뒤엉켰다. (내가 세어본 것은 최대 9개까지다)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나야 그렇지만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 남편은 변기에 앉을 때마다 어떻게 이걸 그대로 두고 볼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손대지 않았다. 당신이 좀 치우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도 하지 말고 나도 하지 않고. 그래, 그렇게 살아보자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많이 커서 온 집안을 기어다니며 물고 빠는 시기는 아니었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집안 꼴이 이게 뭐냐는 적반하장의 대사를 읊을 정도로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그런 상태로 지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최소한의 살림만 하면서. 엉망진창으로.

 

점점 우리 집은 아무도 초대할 수 없는 거대한 창고처럼 변했다. 더 솔직하게는 쓰레기장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들고 내려놓을 빈 바닥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했고, 나는 바닥을 치워 빈 공간을 마련하기보다 더 빠르고 간편한 방법으로 아이에게 침대 위로 올라가 놀라고 했다. 저녁을 차리기 위해서는 테이블 위 물건들을 먼저 치워야 했고, 아이들 옷장은 잠옷과 외출복, 상하의가 뒤섞여 옷장 문이 닫히지 않았다. 베란다에 짐은 창문 밖 풍경을 다 가릴 정도로 쌓였고, 문간방에는 철 지난 옷 박스와 작업실을 처분하며 가져온 짐이 질서 없이 놓여있었다. 택배 상자도 같은 방에 아무렇게나 던져놔서 방문이 다 열리지 않았다. 아무도 담당하지 않은 화장실과 욕실은 서로 최소한의 청소만 하며 아동학대로 신고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근근이 유지됐다.

집안 꼴이 엉망인 탓에 우리 집은 '가족 외 금지구역'이 되었지만 '가스 점검'과 '정수기 점검'만은 피할 수 없었다. 우리 집에 누가 오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어쩌겠나. 정수기 코디님이 방문하는 전날이면 정수기 주변만 겨우 정리하고 집안 꼴을 보이는 게 낯 뜨거워 방에 들어가 애써 모른 척했다. 이러고 사는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애 엄마가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 아무도 들일 수 없는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것이 창피해서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내 사정이야 결심이야 어떻든 간에 창피했다.

가끔 친정엄마가 집에 오신다고 하면 이틀 전부터 대청소를 했다. 그래 봤자 거지꼴인 집이었지만 거실에 앉을 자리는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런데도 엄마는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어떻게 이러고 사냐며 혀를 내두르셨다. 올 때마다 집 좀 치우고 살아라 잔소리를 하다 하다 포기하신 엄마는 ‘네가 청소할 시간이 어디 있겠니. 일하면서 애들 보기도 바쁜데.’로 태도를 바꾸셨다. 엄마도 그렇게 여기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았으리라.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게 집은 편안한 휴식의 공간이 아닐 거라는 불안이 항상 따라왔다. 하지만 적응의 동물답게 우리 가족은 놀랍게도 이 집에 익숙해졌다. 온 가족이 거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놀고 일하다 놀 때는 침대 위로 올라와 옹기종기 모였다. 가끔 거실 바닥을 좀 치운 날에는 하원하고 온 아이들은 우리 집이 넓어졌다며 놀라워했다. 심지어 남편은 어질러진 집에서 자란 아이들이 창의력의 좋다는 헛소리도 했다. 핑계도 정도껏이어야 말이지.

집은 갈수록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해졌지만, 반대로 내 분노와 억울함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번듯한 집에서 사는 만족감보다 거지 소굴 같은 곳에서 내 시간을 찾는 것이 더 좋다니. 더는 살림과 내 일을 두고 시간 싸움을 하지 않았고 아이들이 없는 시간은 100% 날 위해 썼다. 물론 살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놀거나 쉴 수는 없었지만,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엄마가 온전히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장받는다는 건 깨끗한 집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살림은 더 이상 내 시간을 갉아먹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역할 중 가장 자신 없던 것을 가장 잘할 필요가 없어졌다. 남편과 다툼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 마감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고, 아이들과 노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하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대신 집이 주는 안정감은 사라졌다. 우리는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놀려고 했다. 청결하지 못한 집은 계속 날 괴롭히는 숙제였다. 이 집을, 이놈의 집을, 언제까지 방치하고 살아야 할까.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 역시 아이들 때문이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 오늘은 저이 집 내일은 우리 집 서로 돌아가며 놀러 다니게 되자, 더 이상 우리 집은 안 된다는 말로 버틸 수 없었다. ‘엄마가 집에서 일하니까 안돼.’라는 변명도 한두 번이지. 사실은 집이 지저분해서 친구들을 부를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입 밖에 꺼내나. 어느 날은 큰 아이 친구가 내게 직접 전화를 했다. 이미 아이에게 안 된다고 얘기했지만, 그 친구는 자기가 전화하면 뭔가 좀 다를까 싶어 굳이 내 번호를 물어 전화한 것이다. 이번에 안 되면 언제 갈 수 있냐고 다음 주라도 날짜를 받아야겠다는 입장이었다. 아이에게 안 된다고 얘기하던 것과는 또 다른 심정으로 친구의 아이에게 '언젠가'라고 부질없는 약속을 하며 조금 참담했다.

유치원을 다니는 딸아이에게도 장난감 정리 잘하면 친구들 초대하자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자주 놀러 가는 친구 집 엄마에게도 눈치가 보이고, 자기도 이모네 가보고 싶다고 토끼 같은 눈망울로 내 팔에 매달리는 딸아이의 친구를 보는데 더 버티고 있을 재간이 없었다.

 

남편이 원룸텔을 얻기로 하고 조만간 주말부부가 되는 이 시점에, 나는 다시 살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이 집에 살림을 볼모로 저항할 사람이 없으니까. 애초부터 아이 둘과 나 우리 셋이라고 생각하면 미룰 이유가 없다. 미혼모의 마음으로 살기는 이미 익숙했다. 다시 차분히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살림을 시작했다. 당근 마켓으로 아기 때 쓰던 가구를 팔고, 흰색으로 깔끔한 분리수거 통을 베란다에 설치했다. 살림 못 하는 사람답게 청소도구과 정리 용품도 엄청나게 사들였다. 무엇보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던 음식물 쓰레기통 카드를 찾아 사용법을 알아냈다.

우리 집은 천천히 다시 예전의 쾌적함과 평안함을 되찾을 것이다. 그건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일주일에 한두 번 올 남편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다만 언젠가 다시 넷이 된다면 나는 또 어떤 마음으로 이 집 살림을 하게 될까. 그때는 살림이 더 이상 우리 부부의 영역 다툼이 아니길 바란다. 이까짓 거 한 번 놓았는데 두 번은 못 놓으리란 법 없으니까 말이다.

 

 

 

 

 

다시 살림을 하기로 마음먹고 가장 먼저 거실을 치운 날
다시 살림을 하기로 마음먹고 가장 먼저 거실을 치운 날

 


다음 편지는 여름휴가를 다녀온 후가 될 것 같습니다. 무탈한 여름을 보내고 까맣게 탄 얼굴로 인사드릴게요. 혹-시 터져 나오는 입을 막지 못하고 할 말이 생기면 더 일찍 보내게 될지도 모르고요. 

그때까지 건강하고 무탈한 날 보내시길.

22.8.1.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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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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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네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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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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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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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마음인 지 백퍼알아요, 나도 겪었고 겪고 있으니까요^^ (남편이 원룸텔에 가게 된 것은 기폭제가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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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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