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들지 않는 하루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해도, 가끔은 이 일은 언제 끝나는 걸까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도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누워있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드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술을 찾는다. 끊어야지, 하고 다음날 후회할 걸 알면서도 말이다. 술의 효과는 정확하다. 우선 생각을 지워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걸 즐기게 해준다. 그리고 몸을 마비시킨다. 잠에 드는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혼자서 소주 두 병 반 정도면 효과가 확실히 올라오는 편이지만, 이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이 겨우 말린 덕에 한 병에서 멈추곤 한다. 어제도 그렇게 휴일을 보냈다. 밥 먹다가 한 잔 하고, 책 읽다가 한 잔 하고, 화장실 갔다 와서 또 한 잔 하는 식으로. 내 정신을 지우고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그곳은 마치 진공 상태와 비슷하다. 모든 사물들이 쥐 죽은 듯 움직이지 않거나,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나는 그것들을 현실세계에서와는 달리 붙잡을 수 있고 매달릴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가질 수 있다. 그리하여 얻게 되는 풍요는 내 정신의 풍요로 이어지고, 이것은 내가 무언갈 다시 시도할 수 있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이 원동력의 원료는 내성이 없는 우리 문화의 역사이자, 내 개인의 사소한 사건들일 테지만 이것들이 환기하는 슬픔과 기쁨의 에너지는 강력한 것이라서 나라는 존재 자체를 물들이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술을 마시고 슬픔과 기쁨의 원천을 불러내는 이 일은 일종의 제례의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신을 믿고 있는 것인가. 이 신은 정말 믿을만 한 것인가. 이 신을 믿음으로써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이 떠오르게 되고, 그것을 다 차치한다 할지라도 내게는 지금 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정체불명의 시련이 이미 도착해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나는 무용해져버리고 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분명하게 방치되고 있다. 타인을 비롯하여 스스로에게조차. 나는 왜 나를 방관할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이토록 많은데, 도무지 과학적 접근이 어려워진 까닭엔 이미 물들어버린 하루들이, 더러운 것들에 면역력이 세진 하루들이 켜켜이 쌓여버렸기 때문이다. 이 견고한 하루들을 하루 빨리 청산하지 않고서는 나는 조만간 실패자가 되고 말 것이다. 중독자가 되고 말 것이다. 오래 전 나는 문학에 중독된 적 있었다.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세계와의 대결의식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문학하는 인간들을 투사처럼 묘사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는 술이었고, 담배였으며, 빼쪽한 만년필이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사람이 아닌 문화와 역사와 정치를 때려잡고 있었다. 이념과 구조를 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추앙하는 인간의 관념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었는데,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현란한 말솜씨에 속아 사랑과 지구가 분리된 어떤 물성인 줄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실패했던 것이다. 우리의 썩어빠진 문화와 역사와 정치로부터 구출하고자 했던 사랑은 실제로 문화와 역사와 정치의 심장이었으므로. 우리가 지구라는 별에 정착하여, 환경에 우리의 신체를 맞춰가는 동안 사랑 또한 정확한 박자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열정을 갖고 싸울 때 사랑 또한 평화가 아닌 전쟁을 택했고, 우리가 온화한 미소로 악수를 건넬 때, 사랑도 소매 밑으론 칼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영리한 사랑을 신으로 받들었던 수많은 사랑론자들이 이제는 혐오와 배타적 윤리로부터 사랑을 구출하고자 하지만, 그 어떤 뿌리는 모두 사랑에 닿아 연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이 사랑의 총체인 것이다.
나는 이제 문학에의 중독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무기에 중독되어 이-세계를 탐닉하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지만, 나 또한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졌던 개인으로서 지금부터 말하고 싶은 것은 존재의 정화이다.
첫째, 나는 나의 그릇된 문학적 소견을 버린다. 둘째 나는 나의 오만한 애증을 더이상 사랑의 총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셋째 나는 사랑의 물성으로 전유했던 여름이라는 시간과 초록이라는 공간을 제자리로 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진공을 비로소 본질적으로 만들고, 여기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진공이 아닌 허공의 자리에서. 그리움이 아닌 외로움의 자리에서. 내가 바라는 글쓰기의 형태는 마치 섬에 있는 한 그루 야자수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것이 가지는 분명한 생기를 내 존재의 이유로 치환했을 때, 섬도 태양도, 바다의 수분과 염분과 파도소리도 환경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을까. 손에 쥐고 흔들고픈 환경. 변형시킬 수 있는 환경. 그러니까 나는 나를 조금 더 강하게 앞세워 신을 버려야 한다. 아니면 죽을 것 같다.
많은 날들을 허비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들을 되돌릴 수도 없게 되었다. 어느 날에 내가 썼던 것처럼, 나는 비오는 날 밤 나도 버리고 왔듯이. 새로 살아야 한다. 술은 입에도 못대고, 책은 취미가 멀고, 탁구 같은 운동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다가도 다시 누군가에 의해 내 하루가 또 뒤틀려버리게 되면. 그래서 내 인생이 또 한 번 문학에 손을 대고. 함부로 문화와 역사와 정치를 논하게 되고. 함부로 사랑을 정의하다가 린치를 당하고. 핏투성이 얼굴을 술에 씻고. 펜을 들어 단 한 줄의 선언을 하게 된다면. 내가 할 말은, 왜 이리 지독하세요.
왜 이토록 지독하세요.
"누나의 사진과 나의 글, 생각만 해도 좋지 않아?" <무드에 관하여>는 차서영 작가의 사진과 김해경 작가의 글로 구성된 사진에세이 단편입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밤에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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