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 완락재 – 왕래풍류와 만나는 시경의 접화군생
경관의 문리가 트인 학자의 실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한국정원문화 곳곳에 주연급으로 등장한다. 그것도 오뉴월의 꾀꼬리처럼 한결같이 사연이 곱고 근사하다. 그가 들린 곳은 명소가 되고 걷던 길은 경(景)과 곡(曲)이 된다. 그만큼 고급진 안목을 지닌 경관 향유자이다. 자연의 맛과 풍류의 멋을 체득했다. 경관의 문리가 트인 학자이다.
도산서원은 서당 권역과 이를 제외한 서원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서원 권역은 퇴계 사후에 조성된다. 서당 권역은 2개의 건물 영역과 동취병, 낙천1), 서취병, 탁영담, 반타석, 천연대, 천광운영대로 펼쳐진 풍광으로 구성되었다. 건물은 완락재와 암서헌으로 구성된 도산서당과 제자들의 기숙사 역할을 했던 농운정사(隴雲精舍)이다. 도산서당의 온돌방 서재가 완락재(玩樂齋)이고 마루방 교실이 암서헌(巖栖軒)이다. 퇴계는 완락재를 ‘거점 중심 공간’으로 삼아 독서와 집필과 수행에 이른다. 그리고 암서헌에 나아가 제자를 가르친다. 농운정사는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 관란헌(觀瀾軒)을 포함한다. 공부하는 방이 시습재, 잠자는 방은 지숙료, 남쪽 마루를 관란헌이라고 한다. 퇴계가 거주하는 완락재가 공간의 핵심이다. 중심이고 ‘안’이다. 퇴계 생존의 도산서당을 퇴계의 마음으로 따라나선다.
퇴계는 매일 정원의 다정스러움과 원림의 거닐기로 심회를 다스린다. 햇덩이가 솟아올라 동살이 든 완락재 문을 열고 먼 곳에서 도착한 햇살을 맞는다. 암서헌 대청에 올라서니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개 들면 절우사(節友社)가 보이고, 멀리 눈을 돌리면 낙천이 푸르다. “앞에는 강과 들이 내려다보인다. 그윽하고 아득하면서도 멀리 트였다.”[前俯江郊 幽敻遼廓]라고 『도산잡영병기』에 조망 범위를 남겼다. 편하게 앉아 근경을 보니 오늘 살짝 내민 연꽃 봉우리가 눈길을 끈다. 정우당(淨友塘)에 펼쳐질 연화세계의 풍광을 미리 그린다. 아기자기한 정우당 주변을 흠향하듯 내려다본다. 작고 미미한 연못이지만 그 안에 담긴 세계는 무한하다. 아침에 눈 뜨고 가장 먼저 바라보는 경물(景物)이다. 소소하고 무심한 듯 마주하는 이 일상이 바로 거경궁리(居敬窮理)2)의 실천이다. 네모난 연못인 정우당은 인공이지만 자연의 숨결을 간직하였다.
낮은 담장 너머로 산자락 바람이 스친다. 낙천 쪽 하늘로 뭉게구름 천연덕스럽다. 잠깐 고개를 외로 튼다. 절우사로 나가는 ‘터진 담장’으로 송뢰(松籟)3) 소리가 들락댄다. 어제 밤새 내린 비로 몽천(蒙泉)은 묻히고 개울물 들끓는 소리가 온 산을 채운다. 그 소리를 덮으며 애절한 울음소리가 퍼진다. 멧비둘기의 느린 진양조장단이다. 빠르게 흐르는 자진모리급 물소리와 어우러져 풍성한 질감의 화음을 낸다. 멧비둘기의 맑은소리가 하늘로 솟구친다. 시선이 따른다. 저 멀리 천연대(天淵臺)가 드러난다. 발걸음을 옮긴다. 퇴계는 어떤 시국과 정세에 처할지라도 자연과 거점 공간에 대한 경관 감수성을 잃지 않는다. 그의 원림과 누정 생활은 쉼의 공간이면서 학문의 공간이다. 경승지를 거닐면서 누각과 정자에 걸린 편액의 시를 음미하면서 공간의 정서적 교감을 나눈다. 이때의 감흥을 원림과 누정 주변의 산수 자연으로 내면화시켜 새로운 경지를 발견하고 드러낸다.
완락재와 왕래풍류의 사색
퇴계는 온계리 노송정 남쪽, 영지산 북쪽 절벽 위에 작은 집을 짓고 지산와사(芝山蝸舍)라 하였다. 이곳이 인가가 많아 한적함이 떨어져 퇴계의 아래쪽 동암(東巖) 옆에 양진암(養眞庵)을 짓는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때이다. 이때 토계(兔溪)라 불리는 시내를 ‘퇴계(退溪)’로 개명하고 호로 삼는다. 그리고 계상의 퇴계 서쪽에서 한서암(寒棲庵)을 짓는다. 이듬해 더 북쪽으로 옮겨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세운다. 그러나 이곳도 마음을 넓히기에 부족하여 도산 남쪽,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에 서당을 짓는다. 5년만에 서당과 정사를 완성한다. 규모에 비해 오래 걸린 것으로 보아 매우 정성들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완락재 담장 안 정원에서 노닐다가 완락재 바깥의 원림으로 돌아다니며 살핀다. 퇴계가 이름 지은 ‘왕래풍류(往來風流)’의 현장이다. 완락재에서 공부를 하다가 산수 자연을 노닐며 즐긴다. 보고 겪는 풍경과 경험으로 직관이 깊어진다. 감성이 풍부해진다. 풍요로운 사색에 잠긴다.
‘왕래풍류’는 가고 오는 풍류이다. 가고 오는 것은 ‘안’과 ‘밖’의 기준점이 되는 경계가 있다. 여기서는 완락재 담장이 기준점이다. 퇴계에게 담장 안은 집이고 정원이다. 학생에게는 학교이고 교실이다. 천운대(천광운영대를 말함)를 돌아 완락재로 들어온다. 만 권의 책을 읽고 연구한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틈만 나면 왔다 갔다 자연 풍광이 속살거리는 운치를 즐긴다. 고상한 즐거움인 풍류로 삼는다. 학문과 놀이가 하나이다. 산수 자연에서 노니는 행위 또한 공부이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즐겁다. 주변 모두의 자연 풍광이 정원이다. 왕버들을 보살핀다. 천연대에 들려 관조한다.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로 옮겨 주변을 눈여겨본다. 물과 바람, 햇살이 풍경을 만든다. 여흘여흘 흐르는 물에 바위가 빛난다. 물 위를 떠다니는 버들잎은 좌우 계통 없이 돌면서 떠내려간다. 계절과 자연의 기미에 따라 거닐며 사유하고 명상한다.
시국과 정세를 알려면 이황의 말머리를 보라고 했다. 그러나 퇴계의 일상은 글 읽고 쓰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를 위한 루틴이 왕래풍류였다. 많은 곳의 풍광을 자신의 사유 체계로 순화하여 원림의 품격으로 해석한다. 말머리가 한양을 향하는가 안동을 향하는가와 상관없이 그의 리추얼라이프는 원림에서의 왕래풍류를 경(敬)과 성(誠)으로 행하는 일상이다. 삶의 질은 일상에서의 문화 성찰과 관련 있다. 그의 명산대천을 대하는 모든 과정이 철학적 태도이고 수행이다. 이는 ‘상우(尙友, 벗으로 삼을 만한 뛰어난 옛사람)의 만남’을 실천하는 그만의 독특한 수양과 시경의 발로이다.
어린 나이에 퇴계의 문하로 들어간 제자가 있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다.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을 남겼다. 자는 곳, 글 읽는 곳을 “남과 같이 어울리지 않았다”[不與人同]는데, 학문하는 서재의 단순함을 유지한 편이다. 자다가 밤중에 일어나 창을 열고 앉아 “달은 밝고 별이 떴으며 강산은 텅 비고 끝없이 멀고 넓다.”[月明星槩 江山寥廓]고 완락재에서의 일상을 기록하였다.
완락재에서의 공부는 ‘잊지 않는다’[非忘]는 인식의 태도를 견지한다. 이는 지속적인 상황 관찰과 더 깊고 세밀한 이해로 발전한다. ‘돕지도 않는다’[非助]며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는 학문 방법을 창안한다. ‘비망비조’는 스스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자통해(自通解)’ 학습이다. 주체적으로 지식을 구성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비판적 사고와 고유한 해석이 발휘된다. 완락재는 퇴계의 성리학 사상이 완성된 곳이다. 거경궁리 학문이 탄생한 공간이며 성리학 도통의 중요한 장소성을 지닌다. 퇴계는 완락재에서 10년을 인재 양성과 학문에 몰입한다. 매일매일 삼가는 경(敬)의 실천이다. 올바름에 다가서는 의(義)의 공부는 경을 실천하는 것이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태극도설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자연의 리(理)가 내 마음에 이른다며 「도산잡영」의 ‘완락재’를 시경으로 표상한다.
완락재의 하루
온형근
완락재에서 퇴계를 만난다. 그의 하루를 떠올린다. 아침부터 밤까지, 자연과 학문 그리고 사색이 어우러진 퇴계의 일상을 따른다. 하루의 일상 자체가 깊은 울림이다. 새벽에 동이 틀 때 비치는 햇살이 ‘동살’이다. 그러면서 ‘동살’은 창문과 문을 가로지른 살을 말하기도 한다. 햇살이 퇴계를 깨운다. 동선을 따라 걷는다. 달빛과 별들과의 꿈결까지 긴 하루이다. 경(敬)의 실천을 위한 성(誠)의 일상이다. 퇴계의 하루처럼 우리 모두의 하루는 길다.
천연대에 구현된 ‘활발발지’의 정원 미학
퇴계는 완락재 정원에서 산수 원림으로 자주 나선다. 천연대를 들려 깊이 숨을 들이쉰다. 천연대는 도산서당보다 먼저 구축하였다. 강을 굽어보는 곳에 쌓은 대이다. 원래 이름은 창랑대였다. 경치가 빼어나다. “요즘, 노쇠함이 심해져 책만 읽을 수 없다. 경승지에서 시간 보내는 것은 더욱 없어서는 안된다.”[邇來。自覺衰老特甚。不能閉戶讀書。勝地消遣。尤不可無](이황, 「답이대용」, 『퇴계집』권27)라고 이숙량(李叔樑, 1519~1592)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한다. 정원을 산책하고 좋은 풍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勝地消遣]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尤不可無] 인식이다. 후대 문인들도 천연대를 즐겨 찾았다. 천연대를 소재로 쓴 시문이 계속 이어진다. 천연대가 지금의 공개공지(Public Open Space)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퇴계는 ‘물고기가 뛰듯이 기세가 성한 모양’을 말하는 ‘활발발지(活潑潑地)’의 경지를 천연대의 정원 미학으로 삼았다.
위의 시는 7언율시이다. 마지막 8구의 ‘유편(遺編)’은 전인이 남겨놓은 저작인 유저를 말한다. 3구와 4구의 “하늘은 유유히 펄럭이며 큰 새는 날아가고, 금빛 물결 펄떡이며 비단 물고기 뛰논다.”는 『시경』의 ‘연비려천(鳶飛戾天), 어약우연(魚躍于淵)’을 떠올린다.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라는 말이다. 자연의 생동하는 기운을 드러낸다. 상하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천지의 역동성과 조화를 언설할 때 ‘연비어약’을 사용한다. 1구의 ‘높은 대에서의 조망’과 3구의 ‘구름’, 4구의 ‘금빛 물결’이라는 표현을 핵심 요소로 삼아 시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본다. 높은 대에서 하늘과 구름을 볼 수 있으니 ‘천(天)’이고, 금빛 물결을 내려다볼 수 있는 물가 근처의 높은 곳이니 ‘깊은 물’인 ‘연(淵)’이다. 따라서 ‘천연대’는 하늘(天)과 깊은 물(淵)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은 대(臺)라는 함의를 지녔다. 하늘과 물의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을 주는 장소임을 시사한다.
도산잡영의 「천연대」를 제목으로 한 7언절구에도 『시경』의 ‘연비어약(鳶飛魚躍)’이 확인된다. 첫 구의 “날개 솟구치고 물고기 날리는 것 누가 시켰던가”[縱翼揚鱗孰使然]의 구절이다. 「도산잡영」의 또 다른 시(詩)인 「대상영회(臺上詠懷)」에서는 “병산에 편히 앉아 날리는 비를 보고, 낙수에서 한가히 따라 뛰는 물고기 즐긴다.”[屛山宴坐看飛雨 洛水閒臨玩躍鱗]를, 「차운김순거(次韻金舜擧)...」에서는 “한결같이 날고 잠기어 절로 찬란한 빛 드러난다.”[一在飛潛自顯光]를 ‘연비어약’의 기의(記意)로 삼는다. 퇴계는 천연대에서 경험하는 ‘활발발지’의 경관 체험에 탁월한 의미를 부여한다.
퇴계는 「도산잡영병기」에서 이곳의 입지를 산봉우리와 시내와 골짜기가 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둥글게 껴안고 있다고 말한다.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골짜기 입구에서 두 기슭이 서로 마주 본다. 동쪽 산기슭이 끊긴 곳 위에다 대를 쌓는다.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물이 있다. ‘새와 고기가 날고뛴다.’[羽鱗飛躍] ‘강과 산의 절경을 한 번만 보면 모두 얻을 수 있으므로 천연대라 하였다.’[江山之勝, 一覽盡得, 曰天淵臺] 서쪽 기슭에도 대를 쌓아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뛰어난 경개가 결코 ‘천연대’에 못하지 않다.”(이황, 「도산잡영 병기」, 『퇴계집』권3)라고 그림을 그리듯 원형 경관을 형용한다. 퇴계의 원림 계획 범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천연대에서 자연의 활발한 운행을 바라보는 일은 풍류이다. 자연의 조화를 살피는 것이니 누정의 역할까지 한다.
작고 네모난 연못인 방당지와 사람의 마음
활발발지의 천연대와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대가 천광운영대이다. ‘하늘빛 구름 그림자’를 말하는 ‘천광운영’은 주희(朱熹, 1130~1200)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나온다. 이 시는 주희의 도학시로 우주 만물과의 합일을 체득하는 순간을 담았다. 이 시는 퇴계에 의하여 새롭게 조명된 시이다. 이후 정조(正祖)를 비롯한 많은 후학들의 각광을 받는다. 「관서유감」이 한국정원에 미친 영향은 크다. 7언절구 두 수의 전문을 소개한다.
제1수의 승구(承句)인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돈다”[天光雲影共徘徊]의 문장에서 ‘천광운영대’의 출처를 찾는다. 시의 결구(結句)인 “근원에서 활수가 솟아나기 때문이다”[爲有源頭活水來]는 강릉 선교장 ‘활래정’의 전고가 된다. 사방 1치의 작은 네모를 ‘방촌(方寸)’이라 부르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을 일컫는다. 한 치 사방 넓이의 가슴에 마음이 깃들었다는 표현히다. ‘방당’은 마음의 연못이다. 사람의 근원도 샘물처럼 끊임없이 맑아야 한다. 우주 만물을 선명하게 거울처럼 비추는 작고 네모난 연못이 필요하다. ‘반무방당’은 마음을 비추는 연못이기에 크지 않아도 된다.
‘반무방당(半畝方塘)’은 한국정원의 네모난 연못을 축조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이를 공간의 이름으로 활용하거나 실제로 작고 네모난 연못을 축조하는 것으로 구현한다. 도산서원의 ‘천광운영대’와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 성주 한주정사의 ‘일감헌(一鑑軒)’이 공간의 이름으로 활용된 경우이다. 도산서원의 ‘정우당’과 병산서원의 ‘광영지’는 작고 네모난 연못으로 구축된 사례이다. 한국정원문화의 특징 중 하나를 ‘방지원도(方池圓島)’로 든다. 방지원도는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을 조합한 형태이다. 방지원도의 ‘방(方)’자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방(方)’자와 ‘네모’로 통한다. 둥근 하늘[天圓]은 양이고 네모난 땅[地方]은 음이다. 네모난 연못[方池]은 음이고 둥근 섬[圓島]은 양이다. 음양 사상의 맥락으로 파악하는 연유이다. 방지원도와 반무방당은 서로 다른 기원이지만 둘 다 네모난 연못을 특징으로 삼았다. 방지원도가 음양 사상을 반영한다면 반무방당은 성리학적 수행론을 담고 있다. 방지원도는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의 조화로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고, 반무방당은 작은 네모난 연못을 통해 성리학적 도야의 공간을 상징한다.
퇴계의 거점 중심인 완락재 정원이 정우당, 몽천, 열정, 유정문, 절우사로 가깝게 배치되었다. 이 공간은 퇴계의 ‘쉼’과 ‘학문’이 완벽하게 조응하는 공간이다. 단순한 거처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정원 요소에 직접 이름을 붙이고, 그 장소에 담긴 의미를 음미하며 소요유를 즐겼다. 이러한 경관들은 그의 시와 글에 자주 등장한다. 철학적 사유를 더욱 깊게 만드는 배경이다. 완락재와 그 주변 경관은 그의 학문과 사상이 꽃피는 장소였다. 자아와 세계, 학문과 일상, 전통과 혁신 사이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는 ‘왕래풍류’의 정신을 확장하고 유연한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완락재는 전형적인 정원문화의 일상을 보여준다. 이 공간은 왕래풍류의 계획과 실천이 통섭으로 이루어졌다. 자연과 인문을 아우르는 영속적 학습의 장으로서의 가치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1) 낙천(洛川)는 낙동강 줄기이며 도산서당 앞의 깊은 곳을 말한다. “깊이는 배를 띄울 만하고 금빛 모래와 옥빛 자갈이 깔려 있어 맑은 물빛이 차갑도록 검푸르다. 이곳이 바로 탁영담이다”라고 퇴계의 「도산기」에 나온다.
2) 주자가 시도한 도의 실체적 체득 이론이 ‘거경궁리(居敬窮理)’이다. 거경은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서 바르게 하는 것을 말하고 궁리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일을 말한다. 궁리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뜻이 통한다.
3) 송뢰(松籟) : 소나무 숲의 가지와 가지 사이를 스쳐 부는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