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1.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서울역에서 전교 1등 찾기>같은걸 하면,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하지 않겠습니까? 뭐 방송을 해야 하나, SNS를 이용해? 하나하나 다 물어보고 다녀? 저는 전교 등수가 100위 안으로 들어간 적은 없지만서도, ‘역시 전교 1등 찾기는 참 힘들구만…’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럴까? 전교 1등이 그렇게 대단할까? 하는게 오늘의 주제입니다. 부제목을 <전교 1등 찾기>로 하겠습니다. 김종욱 찾기 느낌이 나서 조금 구리네요. 더럽게 재미없게 봤습니다.
2.
사실 특정 무언가를 찾는건 원래 어렵습니다. 아무런 단서 없이, 대뜸 뭔가 찾아오라 하는건 방송국 막내 작가들이나 찾아오지, 보통은 금새 포기하기 일수입니다. 전교 1등이라니. 일단 고등학교든 중학교든, 찾아가서 교무실에 들어가(물론 손님이니깐 중앙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이런 사정이 있다고 찾아달라고 하는건 어떨까요? 조건이 그냥 전교 1등이기만 한다면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과목이든, 어떤 학년 때 어떤 시험이든. 1등만 하면 된다? 그러면 더 쉬운 방법이 있어요. 그, 서울대 가서 길가는 학생 아무나 잡고 물어보면 되잖아요. 너 전교 1등 해봤니? 물론 서울대 입구역에서 걸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국토 대장정 하는 줄 알았어요.
3.
어쨌거나 이제는 전교 1등 안 해본 사람 찾는게 더 어려워집니다. 어쩌다 전교 1등 무경험자가 나타난다면 그냥 학식 먹으러 온 백수거나 경비 아저씨, 기숙사에 짐 옮기는거 도와주러 온 친구, 혹은 지나가던 동서대생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동서대니깐 이런 코메디 해도 괜찮죠? 흑인은 흑인끼리 놀리잖아요. 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제는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의 무게감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서울역에선 그렇게 깜깜하던 해결 방법이, 서울대로 무대를 옮겼을 뿐인데 발에 치이게 많아졌어요. 여기서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문제를 해결하려는 내 태도? 지역에 따른 온도와 습도? 생각할게 뭐 있어요, 방금 제가 무대를 옮겼을 뿐이라고 했잖아요. 무대가 바뀌었습니다. 무대가. 판이라고 하죠. 판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전교 1등에 박수 쳐 주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건 존나 당연한 판이 되었어요.
4.
이제서야 본론입니다. 얼핏 대단해보이는 타이틀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가진 재주가 주름 뿐이라면 번데기 앞에선 꺼내지도 못합니다. 어딘가에서 왕으로 군림했다 하더라도, 챔피언스 리그에선 64강 탈락도 이변이 아니다 이거에요. 쥐똥만큼이지만 사회생활 하다보면 느끼는건데, 다들 정말 귀신같이 어디 가서 한가닥 했던 사람들이더라구요. 그런데 정작 빛나는 사람들을 보면 어때요? 어디서든 1등을 놓치지 않는 왕중의 왕들이 빛나던가요? 아니면 1등이고 387등이고 안중에도 없고, 그냥 자기 잘 하는거 개같이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던가요? 전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다시 서울역으로 이동합니다.
5.
미션을 조금 바꿔봅니다. <비디오 게임의 역사와 각종 밈들을 꿰차고 있으면서, 대본 쓰기를 좋아하고 촬영, 편집, 녹음 및 연기 실력도 적당히 갖춘 20대 백수 찾기>. 서울역에서는 택도 없습니다. 서울대는 물론이고 낙성대 태종대에서도 어림도 없습니다. 동서대요? 20대 백수는 많긴 한데… 비디오 게임에 빠삭하더라도 글, 촬영, 편집, 녹음 및 연기까지 되는 백수라니.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아니,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합니까? 뭐 있긴 한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자 봐요, <전교 1등>이라는 상대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 하나와. <비디오 게임 덕후>, <대본 쓰는거 좋아하기>, <촬영, 편집, 녹음 및 연기 실력 적당히 갖추기>, <20대 백수>라는 어정쩡한 조건 4~5개와. 어느 쪽이 더 찾기 어려운 사람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조금 헷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핵심입니다. 어떤 쪽이 더 대체 불가능한 사람입니까?
6.
어떤 쪽이 더 대체 불가능한 사람입니까? 죄송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한번 더 말했어요. 전교 1등은 서울대만 가도 차고 넘칩니다. 한평생 일궈온게 입시 공부 잘하는거 하나 뿐인 사람은 금새 좌절합니다. 해온게 공부 뿐인데 그것만으론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수능 만점이라 치자. 와우 수능 만점! 당신은 정말 국가에서 보호해야 할 인재군요!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죽을 때 까지 월 1000만원씩 입금될겁니다! 하는 세상은 없습니다. 굳이 제가 말 안해도 다 알거에요, 목표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스타트 라인에 서는 것 뿐입니다. 거기서 어디로, 얼마나 멀리, 얼마나 빠르게 튀어나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냅다 주저 앉을지도 몰라요. 그래놓고 여기 왜 누워있냐 물어보면 “뭐? 나 전교 1등이야 이 새끼야”라고 할거 아니잖아요. 쾌적한 스타트 라인에 섰으면, 이제 튀어나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제 1등 거루기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길을 가봤나. 얼마나 특이한 길을 가봤나. 그 길을 걸어가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 생각으로 나는 또 어떤 길을 걸어갈건지. 혹은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낼 생각은 없는지, 누구와 함께 걸어갈건지. 그 모든 하나 하나가 당신을 대체할 수 없게 만들어줍니다.
7.
혹시 글이 너무 길어서 처음과 마지막 문단만 읽을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나름 이어지게 만들어보죠. 김종국 찾기 더럽게 재미없었구요. 서울역, 서울대, 태종대 하버드 뭐 뉴욕 양키스 유벤투스 LA 레이커스 어딜 가도 당신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뭔데 누굴 가르치는 듯 이야기를 끝내나 싶어서 변명 타임 좀 가질게요. 원래 제가 저의 행동을 납득시키거나 생각을 정리할 때 막 꾸짖듯이 이야기하거든요? 그렇게 글 쓰다보면 결국 아 나는 이러이러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구나. 고마워 윤동규! 하는 때가 오더라구요. 결국 저를 위한 글인데, 저기 뭐 고3 구독자 분들도 제법 되는 것 같고. 수능 얼마 안 남았잖아요. 공부 더럽게 하기 싫어서 이런 메일이라도 오면 이 악물고 읽을 것 같은데, 제 생각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나쁠건 없을 것 같습니다. 비록 저는 동서대지만요. 그치만 솔직히. 나 제법 괜찮잖아요? 다른 사람으로 갈아 끼울 수 없잖아요? 그럼 저는 만족합니다. 나는 매일 아침 내가 나인 것이 황홀합니다. 이상 25주차 주간 윤동규 1부를 마치겠습니다.
Part 2
1.
어느새 구독자가 943명이나 되는데도, 사연은 겨우 5개 올라왔습니다. 조금만 더 해보고 2부를 폐쇄하던가 해야겠습니다. 사연 5개 중 3개는 “할 말은 없지만 잘 읽었어요!”하는 글이어서, 나머지 둘 중 하나를 선정해봤습니다.
2.
어디서부터 몹쓸 소문이 났는진 모르겠지만, 의외로 연애 상담이 질문 글의 3할은 차지합니다. 나 동규쓰 유부남인디… 어쩌면 유부남이라는게 결국 연애에 성공한 사람의 지표라서 그런가 싶기도 해요. 어쨌거나 실연 문의 주셨죠?
3.
자주 하는 말이지만. 극복하지 마세요. 왜 실연의 상처를 극복합니까? 극복하려 한다고 해서 된다 안된다를 떠나서, 극복하는 이유가 뭡니까? 너무 괴로워서? 죽을 만큼 힘들어서, 살기 위해서? 그럼 딱 살 수 있을 만큼만 힘을 얻어봐요. 아니 너 T발 C고 자시고 공감 못해주겠다는게 아니라, 그거 좀 힘들면 안되냐 이거에요. 물론 너무 힘들어하고 맨날 술먹고 자살 시도하고 이러면 얘기가 다르죠. 그러면 계속 옆에 있어줘야 해요. 군대에서도 이등병이 차이면 화장실 갈때마다 고참 둘이 따라간 다음 똥 누는데 옆에서 계속 말 겁니다. 혹시 무슨 짓 할까봐요. 그런데, 보통 그럴 땐 극복이란 말은 안 쓰잖아요. 극복은 뭔가, 다 털어내고. 이겨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자 아자 밝은 내일! 아침 해 안녕! 힘 세고 강한 아침! 이런 느낌이잖아요. 저는 이걸 반대하는겁니다.
4.
애초에 왜 힘듭니까? 왜 괴롭습니까? 왜 상처를 입었습니까? 물론 개 양아치를 만나서 실제로 상처를 입었을 수 있지만, 보통의 경우엔 이별 그 자체가 상처가 됩니다. 이별이 왜 상처일까요. 옆집 만식이랑 양꼬치에 꿔바로우에 칭따오 한잔 걸치고 막차 끊기기 전에 들어가자 해서 나 이별했어 엉엉 하고 상처 받는 미친놈은 없어요. 보통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다음이 없는 이별이기 때문에 슬프고. 또 그 사람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처가 됩니다. 뭐 가슴 한 쪽이 패이고 어쩌고 그러잖아요. 그만큼 큰 존재였어서.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5.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소중한 사람인데, 왜 극복을 합니까? 왜 그런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그냥 안고 가세요. 계속 괴로워 하고 슬퍼 하세요. 그럴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요. 눈물이 나면 화장실에 가서 셀카라도 찍어서 기록해요. 저 이거 진짜 흑역사지만, 대학교때 여자친구랑 헤어졌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박효신 노래 한 곡 반복 재생 해놓고 감정이입 하면서 억지로 울려고 한 적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만 말할게요, 일부러 먼지 들어가라고 눈도 안 감았습니다. 그렇게 우니까 자괴감은 좀 들었지만, 이별한 친구에겐 덜 미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별이란 자고로, 지 생각만 하는 행동입니다. 내가 더 편해지려고. 내가 더 좋은 사람 만나려고. 내가 더 하는 일에 몰두하려고 이별을 택합니다. 그럼 남겨진 사람은 뭘 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이 지금 하고 있는 거요. 실연에 상처에 슬퍼하는거. 거기에 집중해요.
6.
최근에 PT 강사님이 유산소 하고 가라고 하시면서, “흘리는 땀 만큼 살이 빠진다고 생각하세요”라는 명언을 던져 주셨습니다. 땀 흘리기 싫어서 무게만 치고 가긴 했지만 어쨌든, 조금 응용해볼게요. “흘리는 눈물 만큼 사랑했다고 생각하세요”어떻습니까? 영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사랑했다고 치고 그럼 뭐 어쩔건데요. 어쩌겠어요, 그냥 존나 슬퍼하셔야지요.
주간 윤동규 마치겠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워 보이거나 귀찮으면 은근 슬쩍 넘어가긴 할거지만, <주간 윤동규>에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면 아래 링크를 통해 사연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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