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쑤레터ep.40] 연필을 지휘봉 삼아

연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2022.03.14 | 조회 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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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쑤레터 NewSsoo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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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스코틀랜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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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들어요

이주영 - 공책과 연필과 그리운 이의 사진

머리맡엔
공책과 연필과 그리운 이의 사진

눈물 한번 나면
님도 보고
미처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의 그리움을 적지요

가끔은 님의 모습
지우려 애쓰기도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나요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라는 노래를 아실 겁니다.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쓰지 말라 이릅니다.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한다고요.

어떤 것이든 우리에겐 연습이 필요하고,
그럴 땐 연필이 꼭 필요할 겁니다.

공교롭게도 '연습 필요'를 줄이면 '연필'이 되네요.

 

 

💬 오늘의 쑤필

 

어느 순간부터 연필을 잘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글씨를 쓸 일부터도 많이 줄었을 뿐더러, 연필은 수학 문제 풀이에나 쓰기 좋은 것 아닌가 하는 나만의 이상한 고집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워지지 않고 더 선명한 펜이 좋은 것 아닌가, 왜 굳이 지워지고 손에 번지기까지하는 연필을 써야 하나 싶었어요.

사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연필의 '연'이 '연습'에서 '연'자를 따와 만든 단어인 줄 알았습니다. 흑연을 심으로 사용해 '연필' 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왠지 연필은 연습이 필요한 것들에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수학 문제 풀이, 글쓰기, 영어 단어 암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연필을 쓰면서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뭉툭해질때마다 매번 깎아야 하는 귀찮음은 물론이고, 손에 잘 묻어 번지기도 했어요. 깜지라도 쓰게 되면 앞 종이의 뒷면이 지저분해지기 일쑤였습니다. 연필 특유의 냄새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참, 생각해보니 어떤 어른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도 했어요. "학생들은 연습이 필요해서 잘 지울 수 있는 연필을 쓰는 거고, 펜은 어른들이 쓰는 거야" 라고요. 어린 나는 빨리 어른이 돼서 멋지게 펜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어른이 된 나의 필통과 연필꽂이에, 연필은 예의상 자리한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 자루의 새 연필이 내 손에서 키가 줄어 몽당연필이 되는 일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얼마 전 소개했던 박연준 시인의 책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연필을 쥔 사람은 자기 삶의 지휘자가 될 수 있다.

-쓰는 기분, 박연준-

연필 대신 펜을 지휘봉으로 손에 쥔 내가 지휘석에 서있는 상상을 합니다. 팔이 몸에 묶인 듯 꼼짝 않고 가만히 서있습니다. 잘못 휘둘렀다가는 잉크가 이리저리 튀는 실수를 저지를까봐 잔뜩 겁을 먹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영문을 몰라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고요합니다. 관객석은 텅 비어 있습니다. 채우지 못한 텅 빈 관객석처럼 하얗게 비어있는 종이가 내 책상 위에 고요히 놓여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인생에서 연습을 생략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똑같은 것을 죽어라 여러 번 반복해야 겨우 내 것이 되는 그 지루한 과정을 건너뛰려 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연필이 아닌 펜을 쥐어들고서, 차마 종이에 어떤 획도 제대로 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적힌 종이들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적힌 종이들

평생 자신의 방에 은둔해 연필 한 자루만을 들고 시를 써내려갔던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작은 종이 쪽지에도, 편지 봉투에도 시를 적었던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합니다. 몇 자루나 되는 연필이 그녀의 손을 거쳐갔을까요.

나도 다시 연필을 쥐어야겠습니다. 펜이 아닌 연필을 들고 힘을 빼 자유롭게 휘둘러야겠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쥐는 육각형 연필이 어색할 테고, 뭉툭해질 때마다 깎아야 하는 수고로움도 있겠습니다만, 기꺼이 감당해야겠습니다.

어른은 펜을, 학생은 연필을 써야 한다던 어떤 어른의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습니다. 연필을 내 삶의 지휘봉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틀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연필을 다시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와 같이, 앞으로도 '연필'을 '연습'에서 '연'자를 따와 만든 단어라 생각하기로 합니다. 연필 없이, 연습 없이, 내 삶의 지휘권을 가지려는 욕심은 버리기로 했습니다.

 

 


📝 추신

1. 코로나에 결국 걸려버렸습니다. 지옥입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친구!

2. 어쩌다보니 두 편 연속 박연준 시인과 에밀리 디킨슨이 등장했네요. 요즘 최대 관심사인가보다 하고 너그러이 읽어주세요 :)

3. 댓글은 어떤 내용이든, 짧든 길든 언제나 환영해요.
   긴 답장은 ssoo9108@gmail.com 으로 부탁합니다.
   나는 친구의 생각도 항상 궁금하거든요.


 

코로나로 꼼짝없이 집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제부로 힘든 시기는 넘겨 다행히 편지를 쓸 수 있었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책이나 열심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반가운 봄비가 내려 공기가 상쾌합니다.
환기도 잊지 말아요.

항상 건강 유의하세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22년 3월 14일 일요일

구독자의 친구 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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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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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써라우

    1
    about 2 years 전

    쇼츠 영상이 주류가 된 요즘 시대엔 틀려도 괜찮다고 기다려주는 여유들이 많이 없어진 느낌이 들어 퍽 섭섭하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묵묵히, 연필로 쓱싹쓱싹 하다보면 언젠간 내 몽당연필의 가치를 알아줄 이들이 하나둘씩 생기지 않을까 싶소✏️ 오늘은 박연준과 에밀리 디킨슨을 메모해 갑니다📝 너도 나도 망할 코로나구려🤧 건강 잘 챙기십시다 친구여👊🏼👊🏼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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