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라클 지구, 👌 그럴 수 있다 ㅇㅋ,💃🏻🐆 멋장이미식가 Kelly, 🍷 게으른개미 비언어 🤎 그리고당신, 구독자
🌎_입춘
뒤숭숭하다. 청소도 정리도 방치-미약한 노력-현상 유지(라는 이름의 방치) 중인 생활 공간도 그렇고, 나이가 몇살인데 계속 암중모색인 내 밥벌이 길도 그렇고, 연일 확산세인 코로나19 상황도 그렇고, 즐길 기력이 없어 관심을 놓았는데도 SNS를 통해 눈에 뭍히고 있는 베이징올림픽 소식도 그렇고, 러시아가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 같다는 이 주의 국제 정세 또한 그렇고, 시시각각 섬세한 근심만 쌓아주는 20대 대선 레이스 꼬라지도 그렇다. 결국 이런 찜찜함은 대충 뭉쳐 구석에 붙여놓고 유튜브에서 개 고양이 돌보는 사람들 영상 같은 거 틀어놓고서 그 영상에마저도 집중 못 해 틀어놓기만 한 채 스마트폰으로 지뢰 찾기 게임을 하고 있을 나겠지만.
그래도 살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추위가 지난달보다 덜 자주 찾아온다. 밤이 짧아졌고 해가 늦게 저문다. 손님들이 각자 포장 용기를 들고 와 내용물만 퍼담아가는 친환경 상점에서 시험 삼아 4500원 어치만 사 온 그래놀라가 꽤 맛있었고 따뜻한 물로 씻고 나면 더없이 만족스럽다. 만남을 뒤로 미룬 친구들은 크고 작은 실망과 성취를 전해오며 나에 대한 애정을 표시해준다. 아마 3월에도 롱패딩이 아니면 외출을 못 할 정도로 춥겠지만, 분명 나는 어린이날까지 내의를 입고 다니겠지만! 너무 웃겨서 소리 내 웃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있고, 봄은 다가오고 있다.
👌_대상을 비뚤게 애정하는 집착광공의 변
:: 난 네게 계속 잘못을 할 거야
“저 계모 또 자식놈한테 계모 짓 하네.”
위 대상에서 저 계모가 바로 나다.
우리 집에서 나는 통칭 계모로 불리는데, 누구의 계모냐면 우리 집고양이 두부의 계모시다.
“너 두부 엄마 아냐? 뭔 엄마가 자식을 그렇게 괴롭히냐?”
괴롭힌다니.
그냥 조금 과하게 끌어안고 있는 것뿐이야.
두부라는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제 종족 특성에 매우 충실한 성격의 보유묘라서 아주 조금의 터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단 털끝에 사람의 신체가 닿으면 바로 몸을 뺀다.
아니, 피부도 아니고 털끝이라고 이 고양이 색히야.
그다음 1차 경고를 무시한 사람이 본격적으로 제 몸을 피부에 비벼오면 소리를 낸다.
“냥.”
보통 이 단계에서 가족들은 두부를 존중하던 행동을 멈춘다.
그리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접촉을 허락해 주지 않는 고양이님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유일하게 나 홀로 이 단계를 패스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 목적을 이룬다.
네가 몸을 빼건 말건 울건 말건 나는 너를 기필코 안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끌어안고 있으면, 품속에서 두부의 표정이 ‘이 빌런 색히는 언제까지 캥거루처럼 엄마 집에 얹혀사는 거지?’ 라는 표정이 되는데, 내가 돈을 벌어 나가 살게 되더라도 너는 반드시 데려갈 테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단다.
그렇게 몇 분쯤 끌어안고 있으면 두부가 온몸을 비틀면서 끝내는 더 격한 소리를 내고 만다.
“니야아앙!”
여기가 한계점이다.
여기서 더 끌어안고 있다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항상 이쯤에서 고양이를 놔준다.
그럼 우리 집 식구들은 ‘소중한 두부를 괴롭히는 저 계모를 어찌해야 할까.’ 라는 식으로 날 바라보는데.
음…
나는 다른 집이 궁금하다.
정말 나만 계모야? 그래?
다들 고양이가 싫어하면 바로 손 떼고 끌어안지도 않고 그러는 건가?
우리 집은 두부한테 티끌만 한 스트레스 주는 일도 무서워 벌벌 떠는데, 하지만 사랑을 주고받는 사이에 무 스트레스 관계라는 게 존재하는 거냐?
물론 두부가 내게 주는 스트레스는 극히 적으니 교환 비율이 어긋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뭐 됐어 그건 난 모르겠으니까.
사실 나도 알고는 있다.
두부가 내 행동을 싫어하고 참아준다는 것을.
만약 두부가 고양이가 아니고 사람이라서
“너 왜 내가 싫다는데, 내가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왜 억.지.로, 강.제.로 그러는 거야?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머리 장식이야? 나쁜 행동을 한다는 자각은 있니? 인간이면 그래야지. 그러니 이제 그만 좀 해. 지긋지긋하다 네가.”
이렇게 타타타 말한다면, 바로 고개 숙여 사죄하고 안 그러겠노라 말하겠지만, 우리 두부는 냐옹 밖에 못 하니까.
그래서 엄마는 들은 게 없으니까 계속 그럴 거란다.
네가 사랑스럽기는 겁나게 사랑스러우면서 말은 못 하는 고양이인 게 죄야.
억울하면 다음 생에 인간으로 태어나든가.
두부야 엄마 사랑하니? 어 사랑하냐고. 하기 싫어도 해야지. 그게 네가 내 고양이로써 할 일인데, 알겠지? 두부야 엄마가 사랑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지금까지 냥이를 괴롭혀서 죄송하다, 그러지 않겠다는 반성문이 아니고 계속 그러겠다는 선전포고다.
💃🏻🐆_당신이 오늘도 문득 행복하길,
나는 홍대가 좋다. 처음 다니기 시작한 때를 생각하면 이제 보고 싶은 얼굴들은 많이 떠나갔지만 여전히 홍대에 들를 수 있으면 발길을 돌린다. 홍대입구역 앞에서 꽃을 사고 싶어서다. 초록색 천막 아래 꽃을 한 다발씩 쌓아놓고 판매하는 할아버지가 있다. 장소 때문일까. 늘 장미 서너 종류와 함께 각 시즌에만 나오는 꽃들을 팔고 있다. 최소 십 년 이상 같은 장소에서 꽃을 팔고 계신데 포장은 없다시피 하지만 꽃집에서 사는 것보다 꽃이 훨씬 오래 간다. 이번에는 5천원을 내고 분홍색 스토크 한 단을 사 왔다. 스토크는 이제 만개해 겹벚꽃이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스토크가 피기 시작하자 집에 있는 화분들에도 꽃이 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라늄은 심지어 이미 꽃이 지고 있었다. 꽃이 피는 걸 보고 개 산책을 나갔다. 1월까지만 해도 손이 꽁꽁 얼어서 장갑을 꼈다 벗기를 반복하며 산책해야 했는데 이제 장갑을 안 끼고 나가도 상관없었을 뿐 아니라 모자도 필요 없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날씨도 꽃도 이렇게 시간의 흐름이 명확한데 나는 어떻지.
내 안에도 시간이 쌓여 있다. 이것저것 바라는 방향으로 조금 개선한 것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실수한 부분도 많고 개선한 방향에 또 다른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회사에만 매몰되어 살고 있는 내 안에 시간이 누적되었듯 다른 친구들도 그렇겠지. 나는 이 시기에 늘 미모사를 화병에 꽂아두고 싶다. 미모사 향기를 처음 맡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최초로 만졌던 실크 스카프 같은 향. 끝없이 감겨드는 부드럽고 다층적인 향기로움. 모두에게 이런 향이 있었으면 좋겠다. 문득문득 다들 행복한 순간을 즐기며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모두에게 행복한 순간이 더 많아지길 종종 바란다.
🍷_취향의 번잡
영화를 본다. 다 늦은 시간이면 적적한 마음에 뭐라도 틀고 싶은 마음이었다. 영화를 고르는 동안 어떤 영화를 볼지 내내 생각했다. 오늘의 기분에는 별생각 하지 않고 볼 수 있는 영화가 좋겠다. 속 시끄러운 날이니 속도는 빨라야 했다. 하릴없이 봤던 드라마를 다시 켜기엔 해야 할 일의 길이가 짧으니 선택은 역시 영화뿐이다. 한참 영화 섹션에서 헤매다가 오늘의 영화를 고른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이 완벽하다. 색감도 속도도, 하물며 배우와 음악까지도.
짐작하다시피 나는 영화를 오래 본다. 시간이 길다는 것이 아니라, 한 영화를 오래도록 본다는 것이다. 복잡하지 않은 스토리라인과 불편하지 않은 소재. 아름다운 화면과 적절한 음악들까지. 이런 것들을 가진 영화들이면 생각이 날 적마다 틀어대곤 한다. 바쁜 일이 있으면 속도감 있는 영화를 틀어놓고 –얼마나 많이 봤으면 보지 않아도 아깝지 않은지!- 차분한 영화를 틀고는 아무래도 차분한 일을 하고 싶어진다. 빨래할 때는 라라랜드 같은 것들을. 느지막한 시간에 차 한 잔이나 술 한 잔에 책을 곁들일 때면 잠수종과 나비 같은 것들을 틀어놓는 식이다.
나에게도 분명하게 영화적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나의 보통의 취향들과 마찬가지로 이건 백 퍼센트 기분과 컨디션을 탄다. 외부로부터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으면 호러 공포류의 영화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다가도 까라지는 날이면 가볍고 즐거운 로맨스만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견딜 정도의 스트레스에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추저분한 누아르나 머리가 날아갈 정도로 명쾌한 액션을 만끽한다.
이러니 나의 취향은 어떤 영화라고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짧은 과거의 이야기를 해본다. 나는 다 자랐고, 내가 생각한 것들이 분명하다고 믿었던 순간엔 반드시 그 과신을 무너뜨리는 배반의 순간이 쫓아오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 없고 부질없어지는 순간에 나는 종종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틀어놓는다. 가끔은 이터널 선샤인이기도 하고, 수면의 과학이나 무드 인디고이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또 한없이 우울하고 허망해진다. 영화의 우울감은 현실의 우울을 쉽게 지우고, 영화의 여파는 잠이 들 때까지만 유효하다.
사실 영화만큼 카타르시스라는 말에 적당한 예술 매체도 없을 것이다. 즉각적이고, 시각과 청각을 쏟아부어야 영화를 온전하게 볼 수 있다. 번잡한 머릿속을 대신 질주해주는 나의 베이비도 그렇다. 빠르게 변주하는 음악과 휘달리는 화면을 비껴보며 나는 또 분주한 나의 일을 후다닥 끝마친다.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ADHD를 의심해보라는데, 그러기엔 너무 달콤한 번잡이라. 내일의 나에겐 부디 명랑한 영화가 함께하기를 바라며 오늘의 롤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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