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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따스한 대설 속 엉망진창
대설은 눈이 쏟아지는 절기로 대설에 눈이 펑펑 내려야 좋다고 한다. 그도 그렇다. 절기에 맞춰 딱딱 흘러갔다는 뜻이니 대충 그 다음에도 잘 흘러갈 가능성이 높은 거다. 일정한 큰 구조와 뼈대 안에서 힘을 조절하는 매일을 만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공존의 시간. 하지만 이번 대설에 나는 부산이었다.
부산은 신기할 정도로 따스했다. 내복이며 가디건이며 겹겹이 싸매고 떠났던 서울 사람들은 부산역에서 쉽게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출장을 온 사람들은 두꺼운 겉옷과 패딩으로 무장한 채 부산역에 서있다 외투 앞섬을 열곤 했다. 부산역 앞은 차이나타운을 알리는 아치와 텍사스 거리를 알리는 아치가 한 블록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고 차이나타운은 러시아어와 중국어가 공존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출장지로 이동하는 동안 360도로 빙글 빙글 도는 다리를 달렸고 크루즈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졌지만 결국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출장지로 이동하며 만난 다리처럼, 우리의 출장은 조금 핀트가 어긋난 출장이었다는 걸 출장 2일차에 알았지만 여전히 부산은 따스했고 우리는 최대한 노력해보기로 했다. 인간이 이름을 붙였다지만 그래도 절기가 스스로의 위치를 갑자기 바꿀 수 없듯 우리도 우리가 처한 구조와 뼈대를 뒤집어 엎을 수 없으므로 눈이 펑펑 내리길 바라는 사람의 마음처럼, 그에 대처하는 사람의 자그마한 행동처럼 가치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그게 바로 이틀 전. 토요일까지 얼렁뚱땅 흘러오면서 일상적으로 쳐내야 하는 일들이 밀린 상태로 일요일은 생리까지 겹치며 탁센을 당근처럼 흔들다 일어났다. 안 하면 불안하고 하면 열 받는 생리인데 매사가 다 이런 것 같다. 일도 없으면 불안하고 있으면 열 받으니까. 내 인생도 절기도 매한가지로 큰 구조에 맞추어 흘러가고 그 구조 안에서 흔들리는 데서 일정한 안정감을 느끼며 조금씩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두껍게 다져가며 시간을 조금 더 잘 쌓아 나간다.
🌎_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기 (1)
난 흔히 말하는 '경력 공백'이 꽤 긴 편이다. 이 기간 동안 심한 우울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어했습니다. 이 기간에는 뭐뭐를 준비하고 했는데 중도에 그만뒀습니다. 이 기간에는 지금 지원하는 일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뭐뭐 일을 하며 돈벌었습니다. 이런 저런 자잘한 거 다 이력서에 쓰느니 차라리 같이 일하는 사람들 아무도 잘 모르는 게 나을 때가 많지 않은가. 최초에 인사담당자에게나 짧게 설명하고 입 다무는 게 훨씬 편했다. 괜히 길게 말했다가 '뭐뭐를 했던 사람' '뭐뭐로 일했던 사람'으로 찍혀서 그 뭐뭐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화제로 끌려나오고 어떤 이미지로 굳어지느니 동료들에게 자기 얘기를 잘 안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편이다. 아니 그 정도에만 그치면 낫다. 경력이나 경험을 밝혔을 때 그것을 소재로 한 험담이나 안당하면 다행. 너무 방어적이고 소통이 없는 인생을 사는 걸까? 글쎄. 파트너가 있던 직장동료가 피곤했는지 조금 부어보이던 날 관리자에게 너 임신한 거 아니냐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들었다고 분통을 터트려도 우리끼리 관리자 뒷다마나 까고 대충 넘기는 입장에서 인생과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런 야만 앞에서는 최대한 이쪽의 급소를 안내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아무튼 방학하는 학생들을 부러워하는 지금에 와 돌이켜 들여다보자면 그런 공백의 기간은 너무나도 허한 자유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걸로 보인다. 뭐 대단한 일을 하기에는 아무것도 안해도 진이 빠져있었던 편이라 대단한 계획이나 추억은 없었고, 없다. 하루를 구성하는 의지는 오로지 자기자신에게서 솟는다. 프리 생활을 하는 지금도 좀 그런 편이지만 아무래도 계약과 약속과 체면과 유지해야만 하는 경제가 동력으로 작용한다. 백수는 아주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 새벽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고 새벽 6시에 잠들고 오후 4시에 일어나 광명의 하늘을 하루 2시간 정도만 눈뜨고 보낼 수도 있다.
이런 시간을 몇년이든 사흘이든 보내고 난 후 주간 풀타임 직장에 소속됐던 적이 두세번 있는데 진짜 좀처럼 퇴근 후의 시간을 보람차게 보낼 수가 없었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않은 채 이미 다 읽은 만화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손에 들었다 놨다 뒤적인다던지, 인터넷에서 별 의미도 없는 잡다한 글을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며 읽어본다던지 하면서 나의 시간과 의지와 초점을 쫄쫄 흘려버렸다. 그러다 내일의 출근을 위해 필수적인 활동:지속적인 협력관계를 맺는 다수의 타인들 앞에 나를 내보일 수 있을 정도의 청결과 정돈 상태를 유지하도록 씻기, 에너지가 모자라 할일을 못하지 않도록 제때 제대로 식사해두기, 피곤에 쩌들어서 하루를 곤란속에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 충분히 자기, 안그래도 바쁜 시간에 허둥지둥하며 주의력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입을 옷과 들고갈 물건 미리 챙겨두기 등은 하나도 제대로 하지 않아 아침에 곤란해진 적도 수도 없다. 앞에 썼듯 나는 백수기간에도 늘 진이 빠진 상태로 버거운 환경 속에 허덕이는데 익숙해져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내가 그런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가 근무내용에 익숙해진 후에야 뭔갈 알아챘다. 계속 그대로 불행하게 살기는 싫었다.
아무 보람이 없는 활동으로 퇴근 후 시간을 보내며 필수적인 일들을 외면한 것은 아마도 타의에 묶여 보낸 시간-근무시간-으로는 내가 하루를 제대로 보냈음을 체감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쓰레기처럼 낭비하는 그 시간만큼은 나는 오로지 내가 하는 대로 나를 움직일 수 있으니까, 직장의 메이기 전의 자유로운 기간에 끝도 없이 방만하게 굴 수 있었던 것처럼. 어떤 효능도 느낄 수 없는 시간은 다른 면에서 보면 어떤 효능감을 증명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든 내 맘대로 나를 움직일 시간을 계속 가지고 싶어하는, 관성 같은 것. 그 원리를 깨닫고 어떻게 잘 균형을 잡았다가도, 근무를 쉬는 휴일이 다가오면 또 주중을 위한 준비는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생활패턴이 무너진 하루나 이틀을 보내기도 일쑤였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하루 24시간을 1초도 빠짐없이 전부 의식하며 보람차게 보낼 수는 없다.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으로 보일지라도 그건 영혼을 '새로고침'하는 '리프레시'의 시간이라고, 그래도 요새는 사람들 사이에 그렇게 인식하고 용납하는 시선이 늘어난 것 같다. 나도 그런 담론의 영향으로 나 자신의 한심함에 대해 많이 너그러워졌고 말이다. 자기학대에 이은 자기비난으로 빠지지 않게 된 것이다. 나의 하루에는 생산과 자기개발만이 배석을 허락받은 것이 아니다. 사교도 필요하고 여가도 필요하고 공백도 필요하다, 생활에는.(생존에도.) 너무 시간을 죽이지도, 너무 다 살려야만 한다고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걸 많은 것을 거치고 겪은 후에 겨우 조금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이 의미가 있고 쓰임이 있어야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가진 것 중에 자주 안쓰는 물건이 있으면 더 자주 잘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에 짜증이 나고 주변환경이 하나도 정리가 안되어있으면 거기 손을 대어 능동적으로 환경을 개선하려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정리안된 상태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불투명하고 연속성 없는 내 경력이나 경제력에도 그렇게 열을 내고 있겠고. 스스로 좋다고 느꼈던 적은 없지만 과거에 비해서는 더욱 안좋아졌다고 느끼는 미모와 건강 또한.
가장 뛰어난 것을 가장 표준의 것으로 상정하고 달성해야만 한다고 조바심내는 걸 보면 진짜, 나도 평범한 한국인이다. 좀 덜 그래야하는데. 아니, 더 확실한 문장으로 다짐하는 게 좋겠다. 나는 덜 그러고 싶다. 더 포기하겠다. 내 허송한 세월과 채워질 수 없는 모자람을 더 많이 용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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