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4 단단하리 !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마음의 뿌리를 내리자 ~

2026.07.13 | 조회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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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un Toos!

얼마 전 사무실에 새로 도착한 책 박스들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낑낑대며 무거운 책들을 옮기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던 현지 직원 친구가 웃음을 터뜨리며 건넨 한마디가, "와 진짜 Ulun Toos다!" 였는데요.

떼뚠어로 Ulun은 머리, Toos는 딱딱하거나 단단한 것을 뜻합니다. 직역하면 '머리가 단단한 사람'. 조금 과격하게 번역하면 돌머리쯤 되는 셈인데요. 물론 친구는 제 머리가 나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어요. 동티모르에서는 고집이 세고 끈질긴 사람을 장난스럽게 부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어가 며칠 동안 마음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이곳 동티모르에 와서도 꽤나 'Ulun Toos'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거든요. 무거운 짐이 있으면 혼자 들고 가려 하고, 모르는 일이 생기면 먼저 해결해 보려 애쓰고, 어려운 상황이 찾아와도 괜찮은 척하며 버티곤 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끈기라고 생각했던 모습들 속에는, 어쩌면 혼자서만 해내려는 서툰 고집도 함께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를 보내며 문득 깨달았어요.

진짜 단단함은 혼자서 모든 무게를 짊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용기,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여유, 그리고 함께 무게를 나누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사람은 그렇게 서로 기대며 더 단단해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 저는 책보다 더 무거운 마음들을 함께 들어 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던 일들을 함께 해내며 또 하나의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집 센 사람'이라는 뜻의 Ulun Toos를 빌려, 진짜 단단함의 모양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동티모르에서 주워 담은 단단한 조각들, 저와 함께 단단함의 의미를 다시 찾아보실래요?


🗂️ 책의 자리를 찾으며, 나의 자리도 잡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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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저의 'Ulun Toos' 기질이 가장 잘 발휘되는 시간은, 매일 혼자 묵묵히 쌓아 올리는 반복된 일상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모든 하루의 시작에는 빠질 수 없는, 저를 꼿꼿하게 만들어주는 작은 의식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아침마다 직접 내려 마시는 화이트 아메리카노입니다. 커피 원두를 가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아침은 이제 제게 하나의 출근 종소리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산 마음에 드는 컵에 우유를 붓고, 막 내린 진한 커피를 그 위에 올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비로소 혼자서도 오늘 하루를 굳건히 버텨낼 준비가 되었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렇게 단단해진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면, 요즘 제 하루는 온통 책으로 시작해 책으로 끝이 납니다.

새롭게 도착한 도서들을 정리하고, 직원들이 작업할 책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가나다순으로 배열을 바꾸고, 어떤 분류 체계가 동티모르의 어린이 도서관에 가장 잘 맞을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무거운 책을 옮기는 육체노동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한 권의 책이 가장 알맞은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고집스러운 작업에 가깝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주어진 업무를 쳐내기에 바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질문이 꼬리를 물더라고요.

'아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책을 찾을까?'

'현지 사서 선생님들이 가장 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구조는 무엇일까?'

'도서관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으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책장을 정리하는 손보다 고민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걸 보며, 저 역시 조금씩 이 공간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치열한 고민들 사이에는 언제나 '떼뚠어'가 함께 있습니다.

책 제목을 읽고, 번역된 문장을 확인하고, 현지 직원들과 책 속에서 마주치는 단어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에도 수십 번씩 떼뚠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게 되는데요. 신기하게도 책상에 앉아 억지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보다, 책과 제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 낯선 언어를 제 마음에 훨씬 더 가깝게 데려다주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단어 하나 외우는 것도 버거웠는데, 이제는 책 속 문장들을 더듬으며 자연스럽게 표현을 익혀가는 순간들이 늘어나고 있거든요.

어쩌면 저를 단단하게 지탱해 온 첫 번째 힘은 거창한 성과가 아니라, 이 고집스럽고 소소한 반복들이었을 겁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고, 무거운 책을 낑낑대며 옮기고, 새로운 떼뚠어 단어를 읊조리며 홀로 제 자리를 다져가는 일. 그 묵묵한 반복 속에서 저는 저만의 방식대로, 혼자서 아주 씩씩한 'Ulun Toos'가 되어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 곁을 내어주며, 함께 단단해지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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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저 혼자만의 힘으로 매일을 씩씩하게 버텨내고 있다고 믿었던 제게, 현지 직원 친구의 한마디로 이번 주는 아주 다정하고도 묵직한 반전을 안겨주었습니다. 제가 낯선 동티모르에서 꺾이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혼자 악착같이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라, 제 곁의 빈자리를 기꺼이 채워준 사람들의 다정함 덕분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생각했거든요. 무조건 'Ulun Toos'처럼 버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낼 줄 알고 그 온기를 힘 삼아 내일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단단함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퇴근 후, 석양이 다 지기 전에 서둘러 익숙한 개완을 챙겨 들고 바닷가로 나가 작은 야외 다회를 열었습니다. 딜리의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천천히 찻잎을 우리고 잔을 채우는 시간. 특별히 대단한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곁에 앉아 같은 바다를 응시하며, 볼에 닿는 바람과 찻잔의 온기를 조용히 나눠 가지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었거든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연히 마주친 다른 코이카 봉사단원 쌤과의 번개 저녁 식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약속도 없이 길에서 마주쳐 자연스럽게 밥을 대접해주신다는 선생님을 따라가니, 따끈한 마르따박을 곁들여 한국에서 온 귀한 비빔면을 대접해주심에 감동하며 수다를 떨던 밤. 타국 생활이 문득 헛헛해질 때쯤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친절은 마음의 온도를 훅 끌어올려 주었어요.

퇴근 후 동료 쌤이 뚝딱 내어주신 연어 오차즈케도 있었습니다. 갓 지은 밥 위에 연어를 올리고 따뜻한 차를 차르르 부어 먹는, 그리고 귀한 후리카케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한 그릇. 바쁘고 지친 하루 끝에, 누군가 나를 위해 정성껏 끓여낸 온기를 함께 나누어 먹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위로가 되더라고요. 밥알 사이사이에 스며든 건 단순한 찻물이 아니라, 저의 피로를 스르르 녹여주는 다정한 응원이라는 조금 오글거리는 문장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가장 오래 제 눈에 담긴 장면은 푸른 바닷속에 있었습니다. 물결 사이로 부서지는 햇빛, 춤추는 산호와 물고기들. 이퀄라이징이 되지 않아 귀가 너무나 아팠지만, 처음 오픈워터 다이빙을 통해 깊숙히 들어가 바라본 그 경이로운 세계를 눈으로만 담기 아쉬웠는데, 함께 다이빙을 하던 쌤께서 기꺼이 수중 카메라를 챙겨 와 그 순간들을 기록해 주셨어요. 가끔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 그 자체를 기억하려 하지만, 사실 그 풍경 뒤에는 늘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바라본 풍경만큼이나, 저를 위해 기꺼이 곁에서 셔터를 눌러준 그 배려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돌아보면 이번 주, 제 곁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따뜻한 밥을 내어주고, 곁에서 차를 마셔주고, 달콤한 야식을 나누고, 아름다운 순간을 기록해 주는 사람들. 그 다정함들이 차곡차곡 쌓여, 저의 뾰족했던 고집을 둥글고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 사람 사이를 오가며 더 단단해지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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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단단함'에 대한 저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찰은, 며칠 전 열렸던 '아세안 바자(ASEAN Bazaar)' 현장에서 마침내 하나의 확신으로 굳어졌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이곳의 모습들이 한데 어우러진 축제의 현장은 그야말로 활기차고 역동적이었습니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부스들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이곳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또 북적이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중 문득 아주 신기한 점을 하나 발견했어요.

수많은 부스 중에서 단 한 곳도 '혼자' 덩그러니 부스를 지키며 운영하는 곳이 없었다는 겁니다.

특히 그곳에서 아주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는데요. 바로 저에게 유영을 가르쳐주신 다이빙 강사님, '테낄라'였습니다! 바다 관련 부스에서 만난 테낄라 역시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과 옹기종기 모여 부스를 지키고 있었어요. 잔뜩 웃으며 반가운 마음을 보여준 테낄라는 곁에 있던 동료 니쥬와도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서로를 소개해주었어요. 물속에서 겁먹고 튀어 오르던 저를 든든하게 이끌어주던 테낄라도, 땅 위에서는 이렇게 동료들과 서로 기대어 함께 웃고 짐을 나누며 부스를 꾸려가고 있었던 거죠. 물건을 팔고,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 사람들은 늘 그렇게 곁을 내어주며 뭉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지치면 다른 사람이 교대해 주고, 모자란 일손을 척척 거들어주면서요.

누구 하나 고립되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어 부스를 운영하는 그 다정한 풍경을 바라보며, 제 마음 한구석을 꽉 쥐고 있던 서툰 고집 하나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무언가를 단단하게 이뤄낸다는 게 꼭 혼자만의 힘으로 애쓰고 낑낑대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단함'은 결코 외부의 충격에 끄떡없이 혼자 버텨내는 바위 같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혼자서는 툭 끊어지기 쉬운 얇은 실들이 누군가의 실타래와 기꺼이 손을 잡고 가로세로 얽히며, 어떤 무게도 거뜬히 견뎌내는 질기고 촘촘한, 이곳의 전통 직물 따이스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가깝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든 것을 나 홀로 완벽하게 짊어지려 했던 서툰 'Ulun Toos'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내려놓으려 합니다.

혼자서만 다 해내려는 고집 대신, 누군가에게 "이것 좀 도와줄래?" 하고 청할 수 있는 용기. 기꺼이 내밀어 주는 다정한 손길을 감사히 맞잡는 여유. 그리고 짐의 무게를 기꺼이 나누어 들며 함께 걸어가는 법을 이곳 티모르의 일상 속에서 매일 배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혼자서 낑낑대며 마음속의 무거운 박스를 들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혹시 그렇다면, 오늘은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마음의 한 켠을 내어주고 짐을 조금 나누어달라고 부탁해보는건 어떨까요? 사람은 완벽하게 혼자일 때가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어 온기를 나눌 때 비로소 가장 단단해질 수 있는 존재니까요.

혼자가 아니라서 참 다행인 동티모르의 7월의 시작에서.

오늘도 여러분의 일상에 작은 위로와 다정한 조각이 되기를 바라며, 하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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