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층간소음 덕분에 이탈리아어 공부
"띠~링~"
아이들은 학교에, 남편은 직장에 있을 시간인 낮 11시. 갑자기 현관 벨이 울렸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기에 찾아올 사람도 없다. 벨이 울리는 경우는 아마존에서 택배가 왔거나, 아파트 관리인이거나 어느 NGO에서 정기후원을 해달라며 방문한 경우일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 예상에 없던 벨이 울리면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한다.
"Chi sei? 누구세요?"
현관문을 여니, 처음 본 아저씨가 서있었다. 아저씨는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쏟아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엄..... Scusi, non ho capito italiano. 미안해요, 이탈리아 말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는 조금 전보다 천천히, 하지만 내 기준에선 여전히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그가 한 말 중에 내가 알아들은 말은 mattina(아침), dormire(잠자다)라는 말뿐이었다.
순간 나는 '잠잘 곳이 없다는 말인가? 아침밥을 못 먹었다는 말인가? 도와달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non lo so.... 모르겠어요....."
난 여전히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는 두 손을 들고 으쓱해 보이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문을 닫고 소파에 앉아 아저씨가 했던 말 중에 내가 알아들은 두 가지 말을 떠올리며 곱씹었다.
'아침, 그리고 잠..... 아침에 잠을 못 잤다는 건가? 왜? 우리 때문에? 혹시 아랫집 아저씨인가? 아침에 뭘 했더라? 아, 오늘 새벽에 일찍 일어난 남편이 베란다에서 운동을 했지. 그 소리가 좀 크긴 했는데.....'
그는 한 번씩 베란다에서 운동을 했다. 그것도 모두 잠든 시간에 운동을 했다. 며칠 전엔 새벽 12시에 운동을 하더니, 오늘은 새벽 6시에 운동을 했다. 바퀴가 2개 달린 운동기구인데 양쪽 손잡이를 잡고 바닥에 굴리면서 복근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작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부실한 내 이탈리아어 실력을 한탄했다. 밀라노에 산 지 2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다니 한심하다. 나름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겠다고 여러 번 도전했었지만, 매번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들리지 않고,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듀오링고로 날마다 공부를 하지만, 공부를 위한 것인지 그저 퀘스트를 깨기 위한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런 부실한 언어 실력으로도 이 정도로 잘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어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문 옆에 노랑색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이탈리아어로 써진 걸 보니, 아까 왔었던 아저씨가 써놓은 쪽지인 것 같았다. 나는 구글 번역기를 열고 아저씨의 쪽지를 번역했다.
"가끔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늦은 밤이나 아침에 들려서 잠을 잘 못잡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되도록이면 자는 시간엔 피해주세요."
오 마이 갓! 내가 생각했던 그 소리 때문에 컴플레인 한 것이 맞았나 보다. 순간 아저씨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려가던 뒷모습이 떠올라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찾아 아저씨에게 답장을 썼다. 시간이 좀 넉넉했더라면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이탈리아어로 썼을텐데, 난 지금 바로 나가봐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영어로 답장을 썼다.
"Mi dispiace! 죄송해요. 제 남편이 가끔 베란다에서 운동을 하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클 줄 몰랐습니다. 그 소리가 방해되었다니 정말 미안해요. 남편에게 운동을 멈추라고 당장 말할게요!"
그 쪽지를 아랫집 현관문 옆에 붙여두고 나는 학교로 향했다. 이탈리아엔 층간소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나의 큰 오산이었다.
며칠 후 아랫집 아줌마를 만났다. 나는 그녀에게 지난번 일을 언급하며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속도로,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남편이 자다가 소리를 들었다는데 나는 못 들었어요. 남편이 조금 예민해요. 그리고 내 딸이 영어를 번역해 주었어요. 걱정 말아요."
나는 그녀를 향해 엄지척을 해보이며 말했다.
"Brava! 훌륭해요!"
난 지금 더 열심히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나이가 핑계가 되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다. 이 나라에 살면서 이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그게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잠시 머무는 이방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 태도이다.
듀오링고를 연다. 어, 이런! 순위가 떨어졌다. 더 열심히 해서 퀘스트를 깨고, 젬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xp 점수가 많아야 순위가 올라가고,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는 것인지, 게임을 하는 것인지, 이거라도 하면서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안위하는 것인지....
열심히 언어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은 도대체 왜 이리 짧게 끝나는 것인가????
7월엔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열두 번째 결심을 했다.
2. 브런치에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
브런치는 나에게 꽤 고마운 플랫폼이다. 5년 전,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때 시작한 것이 브런치였다. 브런치에 쓴 글을 모아 책으로 내기도 했고, 브런치에서 만난 작가님들과 좋은 친구가 되기도 했다. 브런치 작가되기 강의를 통해 수익을 만들기도 했으니, 브런치는 나에게 돈, 명예, 친구까지 가져다준 정말 고마운 플랫폼이다.
그런데 요즘,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 이유는 바로, 나의 친척들 때문이다.
약 한 달 전, 둘째 고모가 내 카카오톡 프로필을 보시고는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선량아, 이건 뭐니? 우수상? 너 상 받았니?"
3월에 밀리의 서재 글쓰기 플랫폼인 밀리로드에서 '나의 시인 할머니 금자 씨'라는 제목으로 소설 부문 우수상을 받았는데, 말한 것이었다.
고모에게 이 소식을 전하니, 고모가 흥분하며 물었다.
"넌 왜 이걸 소문도 안 내고 있었어. 와, 진짜 훌륭하다. 그런데 어디서 글을 볼 수 있는 거니?"
밀리로드에 쓰는 글은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는 사람들만 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내 글을 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브런치에도 연재하고 있었다. 나는 브런치북 url을 고모에게 보냈다.
"고모, 여기서 읽을 수 있어요."
금자 씨는 내 할머니의 존함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할머니와 살았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큰언니, 작은언니, 셋째 언니, 나, 동생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도시에서 집을 구해 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시골에 살고, 엄마와 아빠가 도시로 나가서 사는 게 이치상 맞는 일이었는데 우리 집은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반대가 된 것이었다. 엄마 말에 의하면, 시골에서 살기 싫었던 할아버지가 먼저 선수 쳐서 도시로 가버리셨다고 한다.
내 할머니 금자 씨는 키가 작고, 뚱뚱하고, 못생겼다. 왼쪽 볼엔 5백 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검은 점이 있었다. 쌍꺼풀도 없고, 코는 납작하고, 입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에 반해 할아버지는 키가 훤칠하고, 날씬하고, 잘생겼다. 진한 쌍꺼풀, 오똑한 코, 가는 입술까지.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처음 보자마자 너무 잘생겨서 좋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양반 집안의 독자였다. 그래서 오냐오냐하며 떠받들다시피 하며 자랐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성격은 독불장군에, 툭하면 화를 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화를 냈고, 라면 먹는다고 화를 냈고, 시끄럽다고 화를 냈다.
할머니는 2남 3녀의 장녀였다. 할머니의 부모님은 꽤 온화한 분이셨는데 어린 할머니를 예뻐하며 키우셨다고 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시집오던 때는 아직 일제강점기였다. 이제 겨우 열일곱인 딸을 잘 알지도 못하는 집안에 시집 보낸 이유는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두 분이 결혼 후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여보"라고 불렀는데 할머니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는 "여보"의 뜻이 "게, 여보시게! 어이 여보시게나~" 라고 알았던 것이다. 그날 할머니는,
"아이고 나는 여보라네. 나는 그냥 여보라네. 시집을 왔는디 난 그냥 여보라네~" 하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매일 싸웠지만, 우리에게는 화를 거의 내지 않았다.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특히 내 동생, 아들을 예뻐하셨는데 오냐오냐하며 동생이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들을 모두 사주었다.
내가 네팔에 갔던 28살. 그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니, 어찌 보면 엄마와 함께 살았던 12년보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15년이 더 길었다.
이런 할머니의 이름을 내 소설의 주인공을 삼았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고모가 내 브런치 계정을 최씨네 단톡방에 올려버렸다.
최씨네 단톡방엔 우리 엄마, 아빠와 아빠의 동생 가족들(남동생 2명, 여동생 3명, 그리고 조카들 여러 명)이 있다. 그 방에 있던 친척들이 내 브런치를 모두 알게 된 것이다!!!
며칠 후 브런치 알림이 왔다.
[최** 님이 구독하셨습니다]
[최 ** 님이 구독하셨습니다]
친척들이 내가 보낸 소설만 읽고 끝난 것이 아니라 내 브런치를 구독하고 말았다.
그동안 다양한 내 이야기를 브런치에 쓰고 발행했다. 그 중엔 내 가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나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생각하며 글을 썼는데, 나를 너무 잘 아는 특정 소수가 내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니 머릿속부터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대략난감해졌다.
이 고민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몇 시간 후 디엠이 왔다.
[선량아, 그런 것도 이겨내야 진정한 작가지 ㅎㅎㅎ]
둘째 고모였다. 고모는 내 인스타그램도 모두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sns도 마음 놓고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다시 메일링 서비스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엔 가족들이 없겠지?
부디 없기를....
혹시 구독자님 중에 제 가족이 계시다면.....
그냥 모르는 척 해주세요.
3. 깻잎에 대하여
작년 봄에 교회 권사님께서 깻잎을 주셨다. 큰 화분에 무성하게 자란 깻잎을 통째로 주셨는데 이탈리아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라 감사히 받아서 애지중지 키웠다.
깻잎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깻잎 하나로 한식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침개를 만들 때도 깻잎이 필요하고, 김밥을 쌀 때도 깻잎을 넣으면 더욱 한국적인 김밥이 된다. 생선조림을 할 때도, 닭볶음탕을 할 때도 깻잎은 화룡점정으로 마지막에 꼭 넣어줘야 하는 아주 귀중한 재료이다.
깻잎을 키우는 건 어렵지 않다. 강한 직사광선을 피하고, 날마다 물을 주면 알아서 잘 큰다. 햇빛을 너무 많이 받으면 이파리가 타버린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물을 주지 않으면 이파리가 말라버린다.
우리는 작년 봄과 여름에 권사님이 주신 깻잎으로 이것저것 잘도 해 먹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을 때 깻잎은 대견하게도 꽃을 피웠다. 그리고 꽃이 진 후엔 씨가 맺혔다. 그 씨를 하나하나 받아 겨우내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올해 봄, 화분에 깻잎 씨를 뿌렸다.
밀라노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한 분이 베란다 화단에 깻잎을 키웠다. 그런데 그 씨가 바람을 타고 아랫집으로 내려간 모양이다. 화분에서 자신들이 심지 않은 알 수 없는 식물이 자라더니 이파리에서 이상한 향기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아랫집 사람들은 윗집을 경찰에 신고를 했다. 윗집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대마초를 키운다고....
전 세계에서 깻잎을 먹는 민족은 한국밖에 없다. 하지만 여러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깻잎 씨를 가져다가 깻잎을 키워 먹는다. 그러고 보니, 교회 권사님은 그 깻잎이 어디서 난 걸까?
정이삭 감독의 영화이자 윤여정 배우의 열연으로 잘 알려진 영화 '미나리'는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이다.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물가에 미나리 씨를 뿌리며 척박한 삶을 이어가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낯선 나라에서 살아내기 위해 애쓴 이민자들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런 이민자들이 밀라노에도 많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깻잎을 키운다. 가장 한국적인 음식을 만들기 위해, 그리운 한식을 직접 만들어 먹기 위해.
우리에게 깻잎은 그런 존재이다.
[선량한 사람들의 이야기]
구독자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오랫동안 밀라노의 소식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모두 핑계일 뿐입니다. 그저 제가 좀 게을렀어요. 게으르게 지내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조금 게으른 겨울과 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큼 여름이 되었네요.
이번 여름엔 열심히 글을 쓰며 지내고 싶습니다. 스스로 정해 놓은 마감을 착실하게 지키며 글을 차곡차곡 쌓아보려고 해요.
전 지금 특별한 계획이 없습니다. 책을 출간할 계획도 없고, 어떤 글을 쓰고 싶다는 계획도 없어요. 무언가 특별한 것을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는 결론에 이르렀거든요.
우리가 이 생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좀 더 부유하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 학원에 다니지만, 정작 이런 목표를 이루기 전에 생이 끝나버린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죠.
길을 가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그저 출근을 했다가 일어나는 사고들을 볼 때마다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등바등 사는 것 대신에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선량하게 살고 싶어져요.
10대의 저는 제 이름을 꽤 싫어했습니다. 이름이 너무 착해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이름과는 다른 표정을 지으며 살았습니다. 이마에 잔뜩 힘을 주고 입꼬리는 잔뜩 내렸지요.
20대 때는 그렇게 굳어버린 표정을 다시 고치려고 애를 썼습니다. 대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얼굴이 예뻐 보여야 했으니까요. 저는 다시 웃는 연습을 했습니다. 입꼬리를 잔뜩 올리고 눈 웃음을 지으며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웃는 연습을 했어요. 자면서도 일부러 웃으며 잤답니다.
지금은 이것도 저것도 애쓰지 않아요. 슬픈 땐 슬픈 표정을 짓고, 기쁠 땐 기쁜 표정을 짓습니다. 힘들 땐 굳이 힘든 표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제야 진짜 내 얼굴을 찾은 것이죠.
당신이 너무 애쓰지 않기를 바라요.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느끼는 감정 그대로 흘러나오기를 바랍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애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애쓰지 않아도 행복한 것이 진짜 행복 같아요.
저는 예전엔 좀 더 재밌는 글, 좀 더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애써 그런 글을 쓰지 않으려고요. 그냥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아마도 조금 선량한 글이 될 것 같아요. 너무 착한 글이라서 재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게 내 진짜 글인 걸요. 더 이상 꾸미지 않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다시 편지 띄울게요.
Da. Milano, 선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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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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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umma in Milan (118)
그레이스 님 잘 지내세요? 제 평범한 글을 항상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님의 글도 기대할게요. 어여 다시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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