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구독자님, 지난 1월 중국 난징의 둥난대학교에서 한 엔지니어가 박사 학위 심사를 받았어요. 그런데 논문 발표도, 학술지 게재도 없었어요. 대신 그는 자신이 개발한 '강화 강철 레고블록'을 심사위원들 앞에서 설명했어요. 이 블록은 세계에서 가장 긴 사장교[^1]인 창타이 창장대교 건설에 실제로 사용된 기술이에요.
과학저널 Nature가 지난 2월 이 사례를 보도하면서 전 세계 학계가 들썩였어요. 논문 없이 박사 학위라니, 이게 정말 가능한 걸까요? 그리고 왜 하필 지금일까요?
오늘은 중국에서 시작된 '실용적 박사(Practical PhD)' 제도의 실체를 짚어보고, 이것이 AI 시대의 학위 제도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이야기해 볼게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논문 없는 박사의 탄생
정허후이(Zheng Hehui)라는 토목 엔지니어가 그 주인공이에요. 그가 개발한 파일런[^2]은 레고 블록처럼 조립해서 교각을 형성하는 강철 구조물인데, 기존 콘크리트 타설 방식보다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품질도 높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사실 정허후이 이전에 이미 1호 실용 박사가 있었어요. 중국원자력설계연구원의 웨이롄펑(Wei Lianfeng)이라는 연구원이 2025년 9월 하얼빈공업대학에서 진공 레이저 용접 공정과 장비를 개발한 성과로 학위를 받았어요. Nature에 따르면, 2025년 9월 이후 최소 11명의 엔지니어가 이 경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어요. 이들의 성과에는 대형 수상기용 소방 시스템 개발, 첨단 용접 기술 등이 포함돼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게 한두 대학의 실험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제도 개혁이라는 거예요. 2022년 중국 정부가 주요 대학들에 공학 대학원 설립을 지시했고, 2024년에는 법률까지 개정해서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실무 성과물로 졸업할 수 있도록 했어요. 현재 50개 공학 대학원이 신설되었고, 60개 대학과 100여 개 기업이 참여해 약 2만 명의 학생이 이 과정을 밟고 있어요.
왜 지금인가: 세 가지 구조적 배경
이 변화가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에요. 최소 세 가지 구조적 배경이 겹쳐 있어요.
첫째, AI가 논문 작성의 의미를 흔들고 있어요. 생성형 AI가 논문 초안을 잡고, 문헌을 조사하고, 심지어 데이터를 분석하는 시대가 됐어요. AI가 쓴 글이 표절인지 아닌지 기존 검사 프로그램으로는 잘 잡히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어요. 논문이라는 형식 자체가 '독창적 연구 능력의 증명'이라는 본래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셈이에요.
둘째,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시간표를 앞당겼어요. 중국 공업정보화부는 이 제도가 AI와 반도체 같은 핵심 산업 분야의 혁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직접 밝혔어요. 반도체, 양자컴퓨팅처럼 이론만으로는 미국 주도의 기술 봉쇄를 뚫기 어려운 분야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기술을 만들 수 있는 엔지니어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어요.
셋째, 박사 학위의 양적 팽창이 질적 위기를 낳았어요. 한국만 해도 2008년 약 9,400명이던 국내 박사 학위 취득자가 2024년에는 약 18,7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어요. 중국은 규모가 훨씬 더 크고요. 박사가 많아질수록 학위 자체의 차별화 기능은 약해져요. 숫자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전문성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온 거예요.
그런데 이게 정말 괜찮을까: 남아 있는 질문들
솔직히 말하면, 이 제도에 대한 학계의 우려도 만만치 않아요.
핵심 쟁점은 평가의 공정성이에요. 다롄이공대학의 쑨위타오 교수는 Nature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우수한 논문을 심사하는 것보다 우수한 기술을 심사하고, 그 기술이 산업에 실질적 도약을 가져올지 판단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고요. 논문은 적어도 동료 심사(peer review)[^3]라는 검증 체계가 100년 넘게 축적되어 왔는데, '제품의 우수성'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지는 아직 합의된 프레임워크가 없어요.
또 하나는 확장 가능성의 한계예요. 현재 이 제도는 공학 분야에만 적용돼요. 쑨 교수 역시 기초과학처럼 이론이 핵심인 분야로 확대될 가능성은 작다고 봤어요. 다만 의료기기 설계나 지능형 진단 시스템처럼 공학과 과학의 경계가 흐려지는 하이브리드 분야에서는 적용 여지가 있다는 관측도 나와요.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건 산학협력의 이해충돌 문제예요. 실용 박사 과정의 핵심은 이중 지도교수 제도로, 학계 교수 한 명과 산업계 전문가 한 명이 함께 지도해요. 난징대학의 리장 연구원은 대학에 채용되는 산업계 실무자들의 수준이 충분해야 교육의 질도 담보된다고 지적했어요. 기업의 당장의 필요에 맞춘 '기능공 양성'과, 독립적 사고력을 갖춘 '전문가 양성' 사이의 균형이 관건이에요.
오스왈드의 시선
저는 이 변화를 '학위 제도의 위기'보다는 '전문성 증명 방식의 전환'이라는 프레임으로 봐요.
20년 넘게 GTM 전략을 수립하면서 수많은 전문가를 만나왔는데요, 실무 현장에서 진짜 존경받는 전문가는 학위로 결정되지 않았어요. "이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만들었고, 어떤 문제를 풀었는가"가 핵심이었어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학위 제도가 이걸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논문은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거든요. 중국의 실험이 흥미로운 건, 이 간극을 제도적으로 메우려는 첫 번째 대규모 시도라는 점이에요.
다만 제가 우려하는 부분도 있어요. 이 제도가 '논문이 필요 없다'는 메시지로 단순화되면 위험해요. 논문이라는 형식이 쓸모없어진 게 아니라, 논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게 정확한 해석이에요. 기초과학에서 논문의 가치는 여전히 절대적이고요.
결국 미래의 박사 학위는 세 가지 트랙으로 분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기초 연구를 위한 전통적 PhD, 실무 결과물 기반의 실용 박사, 그리고 이 둘의 하이브리드. 중요한 건 어떤 트랙이든 "당신이 정말로 이 분야의 전문가인가"를 증명하는 엄격함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평가의 형식이 바뀌는 것이지, 평가의 수준이 낮아져서는 안 돼요.
마치며
정리하면 이래요. 중국의 실용 박사 제도는 논문 중심의 학위 평가 체계에 대한 최초의 국가 규모 도전이에요. 그 배경에는 AI가 바꾼 연구 환경, 기술 패권 경쟁의 압박, 그리고 박사 학위의 양적 팽창이 겹쳐 있어요. 핵심 질문은 '논문이냐 제품이냐'가 아니라, '전문성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 주제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Nature 원문 기사부터 읽어보시길 추천해요. 중국 사례의 구체적인 디테일이 잘 정리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주제를 영상으로 더 깊이 다룬 오스왈드의 지식토킹 영상도 함께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 "First 'practical PhDs' awarded in China — for products rather than papers", Nature, 2026.02.05.
- 중국 교육부, "Guidelines for Professional Doctorate Applications in Engineering", 2024.10.30.
- 경향신문, "엔지니어의 나라 중국…논문 대신 신기술로 학위 받은 '공학 박사' 줄줄이 배출", 2026.02.08.
배경 지식
- 김형호·김상현, "생성형 AI 활용 학술연구의 연구윤리 및 저작권 쟁점과 규범적 과제", 한국의료법학회지, 33(1), 2025. : AI가 학술 연구 환경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윤리적 쟁점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국내 논문이에요.
- 한국직업능력연구원, "2024년 국내 신규 박사학위취득자 조사", 2024 : 한국 박사 배출 현황과 취업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공식 통계예요.
관련 영상
https://youtu.be/-jfZXfgzlPk?si=dYEbd-qhbsIHl1wB
📝 용어 설명
[^1]: 사장교(Cable-stayed bridge): 교각 위의 주탑에서 케이블을 비스듬히 걸어 상판을 지지하는 교량 형식이에요. 현수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구조적 원리가 달라요.
[^2]: 파일런(Pylon): 송전탑이나 교각에 사용되는 철골 구조물이에요. 정허후이가 개발한 파일런은 레고처럼 모듈형으로 조립할 수 있다는 점이 차별화 포인트예요.
[^3]: 동료 심사(Peer review): 학술 논문이 저널에 게재되기 전에 같은 분야 전문가들이 논문의 질을 검토하는 과정이에요. 학술적 신뢰성을 담보하는 핵심 장치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학계의 품질 관리 시스템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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