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구독자님, 최근에 강의를 다니다 보면 신기한 경험을 해요. 대학생, 청소년, 기업의 사원급부터 임원까지 — 직급도 나이도 다른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같은 질문을 하거든요.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많아지고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뭘 해야 되나요?"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대부분 비슷해요. "기초로 돌아가세요", "AI 도구를 잘 다루는 법을 배우세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그게 답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너무 뻔한 이야기고, 그걸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거든요.
오늘은 제가 진짜 답이라고 믿는 한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볼게요. 바로 미감, 영어로는 테이스트(taste)예요.
기술을 따라가면 기술에 종속된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요. 처음에는 글을 제법 쓰는 수준이었고, 그다음에는 그림, 그다음에는 영상. 지금은 진품보다 더 진짜 같은 결과물을 뽑아내는 단계에 와 있어요. 윌 스미스가 스파게티를 먹는 우스꽝스러운 AI 영상이 화제가 된 게 불과 2년 전인데, 지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영상을 만들어 버려요.
이런 상황에서 "AI를 잘 다루는 기술을 배우세요"라는 조언은 어떻게 보면 너무 뻔한 논리예요.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도구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또 새로운 방식을 익혀야 하거든요. 미드저니 버전 7, 8, 9가 나올 때마다 프롬프트 방법론을 다시 배워야 하고, 새로운 코딩 에이전트가 나오면 또 그 워크플로우에 적응해야 해요.
결국 이건 기술에 종속되는 구조예요. 내가 기술을 쓰는 게 아니라, 기술이 나를 끌고 가는 거죠.
그렇다면 뭘 길러야 할까
저는 딱 하나라고 생각해요. 미감이에요. 뭐가 좋은지 알아보는 능력, 그리고 그걸 선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요.
여기서 중요한 건 언어의 차이예요. 우리가 취향을 이야기할 때 쓰는 동사를 한번 살펴보면요.
취향은 "기르다"라고 하지, "배우다"라고 하지 않아요. 말투는 "익히다"라고 하죠. 관점은 "기르다", 일관성은 "지키다". 이 표현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전부 시간이라는 자원이 들어가는 것들이에요. 한 번 수업 듣고 끝나는 게 아니라, 경험이 축적되면서 서서히 자라나는 것들이죠.
기술은 배우면 되지만, 테이스트는 길러야 해요. 그리고 이 길러진 테이스트 — 취향, 말투, 관점, 일관성 — 이것들이 모이면 그 사람만의 감도가 생겨요. 그게 바로 "나는 이런 걸 좋아하고, 이런 게 더 좋은 거라고 설명할 수 있어"라는 능력이 되는 거예요.
하다못해 AI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할 때도 "야수풍으로", "인상파 스타일로"라고 지시하잖아요. 그 앞에 붙는 수식어는 결국 내가 어떤 화풍을 알고 있고, 왜 그걸 좋아하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거예요. 그건 단순히 프롬프트 기술이 아니라, 미감의 영역이에요.
콘텐츠 풍요의 시대, 그리고 AI 슬롭
영상에서 제가 'AI 슬롭(AI slop)'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해외에서 이미 큰 담론이 돼 있어요. 말 그대로 AI가 대량 생산한 저품질 콘텐츠를 뜻하는 건데, 2025년 Merriam-Webster는 'slop'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어요[^1].
수치로 보면 상황이 더 명확해요. SEO 분석 기업 Graphite의 조사에 따르면, 영어 인터넷 기사의 절반 이상이 이미 AI로 생성된 콘텐츠예요. 유튜브에서도 영상 편집 서비스 Kapwing이 신규 사용자 계정으로 쇼츠 500개를 시청한 결과, 20% 이상이 AI 슬롭으로 분류됐어요. 이런 AI 슬롭 채널 278개가 총 630억 뷰, 2억 2천만 구독자, 연간 추정 수익 약 1억 1,700만 달러(약 1,600억 원)를 기록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어요.
우리 쇼츠 피드만 봐도 체감되죠. 열 개 내리면 한두 개는 AI가 만든 목소리와 이미지로 된 콘텐츠가 나와요. 이런 건 앞으로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지 않을 거예요.
농업의 역사가 알려주는 것
여기서 한 200~300년 전으로 시선을 돌려볼게요. 그때는 뭐가 부족했을까요? 먹을 것이었어요. 산업혁명 이전에는 전 세계 인구의 80~90%가 농업에 종사했어요. 모두가 식량을 생산하는 데 에너지를 쏟았죠.
그런데 지금은요? FAO(유엔 식량농업기구)의 2022년 데이터를 보면 전 세계 농업 종사자 비율은 약 26%예요. 선진국만 보면 더 극적이에요. 미국은 2%, 독일·영국·캐나다는 1% 수준이에요. 나머지 사람들은 다 뭘 하고 있을까요? 놀고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가치 기준 위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농업 시대에는 힘센 손, 농작물을 기르는 지식이 돈이 되는 능력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조직하는 능력, 콘텐츠를 만드는 능력으로 무게가 옮겨졌어요. AI 시대에는 그 무게가 다시 이동하고 있어요. 인간다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테이스트가 뛰어난 사람들에게요.
AI는 일을 없애는 게 아니라, 돈의 무게가 어디에 실리는지를 바꾸는 것이에요.
한 명의 매력 vs. 수많은 연산의 최적화
팟캐스트가 왜 매력적일까요? 사람의 숨소리, 망설임, 농담, 관점, 호흡 — 이런 인간적인 요소가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AI가 대본을 더 빨리 짜겠지만, 그 대본보다 애드립이 들어간 스케치 코미디가 더 잘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재미있는 대비가 생겨요.
인간은 한 명이 수많은 사람에게 도달하는 방식이에요. 아이돌처럼요. 한 사람의 세계관, 한 사람의 매력이 수많은 사람을 끌어당기죠. 반면 AI는 정반대예요. 수많은 연산, 수많은 알고리즘이 한 명을 위해 최적화하는 구조예요. 나한테 딱 맞는 콘텐츠를 골라서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AI가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한 사람의 세계관이 더 중요해져요. AI가 최적화를 더 잘할수록, 그 최적화의 대상이 되는 '나'의 취향과 관점이 명확해야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거든요. 그리고 그 세계관이 명확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한테도 매력적이에요. 그 사람의 취향이 곧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가 곧 비즈니스가 되는 거죠.
오스왈드의 시선
솔직히 말하면, 저는 "AI 시대에 뭘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답이 본질을 빗나가고 있다고 봐요.
새로운 도구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그건 새로운 지식을 또 파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기술이 또 바뀌면 또 새로 배워야 해요. 결국 종속의 반복이에요.
제가 정말 주목하는 건 '굳이'의 가치예요. AI가 노동을 점점 더 싸게 만들면, 역으로 "굳이 이렇게까지 하셨어요?"라는 감탄이 가치가 돼요. 우리가 장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명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쓸데없어 보이는 집요함이에요. 그 집요함 뒤에는 스토리가 있고, 스토리 뒤에는 세계관이 있어요. 그 세계관이 바로 대체 불가능한 가치예요.
머쉬베놈과 신빠람 이박사의 콜라보 '돌려돌려 돌림판'을 보세요. 이박사는 몇십 년간 '뽕짝'이라는 장르 하나만 파신 분이에요. 누군가는 그걸 촌스럽다고 했고, 누군가는 저질이라고 했지만, 그분은 그것만 계속하셨어요. 그리고 2025년, 젊은 래퍼와의 콜라보로 뮤직비디오 조회수 543만 회를 넘기며 다시 한번 주목받으셨죠. 유행은 돌고 돌지만, 자기 취향을 밀고 간 사람에게 시대가 돌아온 거예요.
차라리 새 도구를 익히는 그 시간에 근처 미술관을 가보시거나, 서점에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한번 살펴보시거나,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건축물을 직접 가서 느껴보세요.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나만의 감도가 돼요. 그리고 그 감도야말로 AI 시대에 영원히 재산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마치며
정리하면 이래요. AI 시대에 정말 중요한 건 새로운 기술을 계속 쫓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뭐가 좋은 것인지를 알아보는 눈을 기르는 것이에요. 취향, 말투, 관점, 일관성 — 이것들은 배울 수 없고, 오직 시간을 들여 길러야 하는 것들이에요.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것들을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해요.
다음에 누군가 "AI 시대에 뭘 공부해야 할까요?"라고 물으면, 이 뉴스레터를 슬쩍 공유해 주세요. 좋은 걸 알아보는 눈, 그걸 선택하는 용기. 결국 그게 전부예요.
📎 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 Graphite, "AI-Generated Content Report", 2025. : 영어 인터넷 기사의 AI 생성 비율을 분석한 보고서예요. AI 슬롭의 규모를 수치로 확인할 수 있어요.
- Kapwing, "AI Slop on YouTube Study", 2025. : 유튜브 신규 사용자 피드에서 AI 슬롭 비율을 조사한 연구예요. 278개 AI 슬롭 채널의 수익 규모도 분석했어요.
- FAO, "Statistical Yearbook 2024", 2024. : 전 세계 농업 고용 비율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데이터예요. 2000년 40%에서 2022년 26%로의 변화가 핵심이에요.
- Human Progress, "The Changing Nature of Work", 2023. : 산업혁명 이전 80~90% 농업 종사 비율부터 현재까지의 고용 구조 변화를 정리한 글이에요.
배경 지식
- Julie Zhuo, "When AI Has Better Taste Than You", The Looking Glass, 2025. : Notion CEO Ivan Zhao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능력(capabilities), 취향(taste), 의지(will)의 세 요소를 분석한 에세이예요. "AI 시대에 마지막 남는 인간의 우위는 의지"라는 관점이 흥미로워요.
- Meltwater, "What the Rise of AI Slop Means for Marketers", 2025. : AI 슬롭에 대한 소비자 정서를 소셜 리스닝으로 분석한 보고서예요. 2025년 언급량이 전년 대비 9배 증가했어요.
관련 영상(26.01.07)
https://youtu.be/WVjBlqc4gSg?si=JRJ-6zd55BNJvvol
📝 용어 설명
[^1]: AI 슬롭(AI Slop): AI가 대량 생산한 저품질 콘텐츠를 총칭하는 용어예요. '슬롭'은 원래 동물 사료나 잔반을 뜻하는 단어인데, AI가 쏟아내는 의미 없는 콘텐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2025년 Merriam-Webster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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