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9시. 평소라면 늦잠을 자거나 밀린 집안일을 하며 보냈을 시간에, 나는 카스코 비에호(Casco Viejo)의 돌길을 걷고 있었다. 파나마시티의 현대적 빌딩 숲을 뒤로하고, 500년 역사가 숨 쉬는 구시가지로 향하는 이 길은 언제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Libro Puentes의 첫 모임. 리테일 매니지먼트 일을 하며 늘 "효율"과 "성과"를 생각하는 나에게, 이 토요일 아침은 그 자체로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필요한 사치였다. 바쁜 일상 속에서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고 살았던 것 같다.
☕ 드립 커피가 가르쳐준 기다림의 가치

Café Unido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진한 커피 향. 바리스타가 정성스럽게 게이샤(Geisha) 커피를 핸드 드립으로 내리고 있었다. 드립 포트에서 천천히,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뜨거운 물을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평소 나는 얼마나 빨리, 급하게 살아왔는가.
에스프레소 머신의 시끄러운 소음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이 느릿한 드리핑 과정은 낯설면서도 평화로웠다. 3분, 4분, 5분. 커피 한 잔을 위해 이렇게 오래 기다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도.
첫 모금을 머금었을 때 퍼지는 재스민 향과 은은한 과일 산미. 파나마에서 10년을 살았지만, 게이샤 커피를 제대로 음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해 파나마에서 완성된 이 특별한 품종처럼, 나도 한국에서 시작해 파나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 두 사람이 시작한 진솔한 시간

사실 이번 첫 모임은 예상보다 소수였다. 참석한 것은 나를 포함해 딱 두 사람. 처음엔 조금 아쉬웠다.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게이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것이 오히려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하신 분은 미국에서 공부하신 후 계속해서 해외 생활을 해오신 선배였다. 한국을 떠난 지 수십 년, 여러 나라를 거쳐 지금은 파나마에 정착하신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해외에서 산다는 것"은 결국 두 개 이상의 시간대와 두 개 이상의 공간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나는 파나마 10년 차, 40대 후반. 이제는 이곳이 단순히 "일하는 곳"이 아니라 "살아가는 곳"이 되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토쿠멘 공항에 내릴 때 "집에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에 가면 또 그곳이 고향처럼 느껴지는 이 모순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카스코 비에호의 풍경.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 사이로 현대적인 레스토랑과 갤러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이 공간처럼, 우리도 각자의 뿌리와 현재의 삶을 동시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 세 권의 책이 건네는 질문들
우리는 이번 달에 함께 읽을 책 세 권을 선정했다:

《팩트풀니스》 - 한스 로슬링세상을 보는 우리의 편견은 무엇일까. 파나마에 대한 나의 첫인상과 10년 후의 현실은 얼마나 달랐을까. 데이터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다.

《불안 세대》 - 조너선 하이트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다음 세대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비록 오늘 20대 참가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세대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이 모임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 칼 필레머경험이 주는 지혜에 대한 책. "10년 전에 이걸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세대를 넘어 지혜를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 권 모두 "세대 간 이해와 소통"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가 파나마에서 만들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니까.
⏰ 현실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한 모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게이샤 커피는 이미 다 식었고,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 업무 이메일도, 해야 할 일 목록도 잠시 내려놓고, 책과 사람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 40대 후반을 살아가며 점점 잃어가고 있던 여유를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카스코 비에호의 오래된 건물들이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것처럼, 나도 파나마에서의 10년을 견디고 성장해왔다. 그리고 오늘, 이 역사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시작을 했다. Libro Puentes. 책을 통해 다리를 놓고, 그 다리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
비록 두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될까.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진정성이다.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의 깊이는, 열 명이 모여서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작은 작아도 괜찮다"는 것을 게이샤 커피 한 잔이 가르쳐주었다.
🎯 다음을 향한 기대
4월에는 Costa del Este의 현대적인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미래를 향한 대화"라는 테마로, 카스코 비에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번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도 다음 모임에서는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많은 세대, 더 다양한 경험들이 모이면 "두 개의 고향, 하나의 정체성"이라는 주제가 더욱 입체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토요일 아침, 게이샤 한 잔의 여유. 그것이 내게 선물해준 것은 단순히 맛있는 커피가 아니었다. 멈춰 설 수 있는 용기,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였다.
파나마에서의 10년. 지금까지는 적응하고 일하고 살아남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곳에서의 삶을 채워가고 싶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생각을 나누면서.
Libro Puentes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지만 진정성 있게. 천천히지만 깊이 있게. 게이샤 커피를 드립하듯, 한 방울 한 방울 정성스럽게. 🌉☕📚
📖 3월 선정 도서
-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 조너선 하이트, 《불안 세대》
- 칼 필레머,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 다음 모임
- 일시: 4월 18일 토요일 오전 9시
- 장소: Costa del Este (추후 공지)
- 문의: WhatsApp 610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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