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지...?

한국에서 일상 꾹꾹 담아 보낸 편지 왔습니다~

2026.10.31 | 조회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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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정말 오랜만이야. 멀리서 온 편지라 더 반가운 것 같아. 화창한 캐나다에서 일상을 설렘으로 만들어가는 네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 어때? 정말 오랫동안 꿈꿔왔던 걸 결국 해내는구나! 하루하루 새로운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느껴지는지 궁금해.

네가 요새 나에게 있었던 일을 세세히 들려달라고 했지만, 나는 지금의 일상에 행복은 있어도 설렘은 극히 드물어서 하루하루가 빨리 잊혀지곤 해. 하루만 지나도 ‘나 어제 어떻게 지냈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야. 어쩌면 요새는 휴학도 하고, 직장을 나가지도 않고 살고 있는 동네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살아서 더 그런지 몰라. 이제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다시 취업해야 하려나... 근데 취준 하는 법을 완전 까먹어 버렸어... 각 잡고 글 쓰는 법도 까먹었고. 기록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다.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가지는 게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더라고.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요즘 나에게 있었던 일을 전할게. 9월에 ‘로터리시네마’라는 곳에서 나의 첫 작품 <비둘기는 언제나 당신 곁에>를 아주 아주 오랜만에 상영했어. 2023년에 상영을 했으니까, 3년 만이네. 영화제는 하나 빼고 모두 떨어진 작품이 오랜만에 관객을 만나는 자리라서 나는 되게 오랜만에 일기장을 꺼내 보이는 기분이 들었어. 나도 그때의 내가 조금 낯설기도 해서 그때 내가 이 영화를 어떤 감정으로 만들었는지 되새기기도 했어. 영화제에서 틀 때보다 더 다양한 관객을 로터리시네마에서 만난 것 같아. 비둘기를 사랑해서 ‘비둘기페어’를 기획하고 계신 분도 만나고, 원래 알던 친구들, 한두 번 스치듯 만났던 사람들, 친구의 친구까지. 영화관이 아닌 아늑한 별장 같은 곳에서 영화를 보고, 둘러앉아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렇다 보니 좀 민망하긴 해도 서로 가까워진 느낌이었어. 다만 둘러앉다 보니 서로 간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워져서 눈을 내리깔고 말하긴 했는데, 언젠가는 나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비둘기를 얘기할 때면 내가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게 부끄러워지곤 해. 그래도 영화에 대해 사랑을 잔뜩 받은 날이었어. 무려 비둘기 굿즈 티셔츠도 만들어 주시고, 비둘기 종이접기도 했어! 근데 이게 참 아이러니한데… 소통하고 표현하고 싶어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관심을 제대로 소화해 내기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 물론 엄청난 관심이 아니었음에도!!! 그래서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고 머쓱하기 바빴던 것 같아. 그냥 마음껏 행복해했으면, 그리고 그 행복을 삶의 힘으로 가져왔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조금 후회가 돼. 

 

©로터리 시네마
©로터리 시네마

 

그 외에도 정말 강렬했던 9월의 기억으로 ‘영화제 아래층 영화제’를 개최한 일도 소개해 주고 싶은데. 이 얘기를 하면 이 레터를 다 할애해도 모자랄 것 같아서 글을 첨부해. 정말 하고 싶은 걸 했던 번쩍인 순간인 것 같아.

 

그리고 벌써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염치없지만, 어제 첫 상영을 마친 내 영화 이야기를 해볼게… ㅋㅋㅋ (다음 레터에선 꼭 재밌는 다른 콘텐츠를 가져올 테니 이번만 봐주시오.) 이번에 만든 영화 제목은 <펜스 옆 마늘 싹>인데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직도 뉴타운 사업이 한창인 서울 성북구 장위동의 펜스 주변을 찍은 단편 다큐멘터리야. 그냥 나에게 이번 작업은 ‘함께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 처음으로 공동 연출을 해보기도 했고, 뭘 만들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성북구 장위동을 떠돌다가 이야기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영화가 만들어진 경험이기도 했어.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모인 건 사실 장위동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우리가 사실 아무리 오랫동안 한마을에 살았어도, 주변 이웃들을 잘 알고 지내거나 새로운 이웃과 인사를 나누거나 하기 힘든 시대잖아.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두렵게 여겨지기도 하고. 근데 막상 이야기를 건네보니, 마을의 어른들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자리를 내어주실 마음의 준비가 모두 되어계셨어.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책을 빌려주고, 먹을 것을 내어주고, 자신이 아는 이웃을 소개해 줄 수 있었을까? 나는 완전히 아파트 키즈고 이웃 간의 오고 가는 정 같은 건 엄마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접했을 뿐이야. 근데 찾아오는 이웃에게 곁을 내어줄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구나,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곁을 내어주는 마음들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 다큐멘터리에 출연해주신 마늘 가게 사장님은 지금이 ‘시멘트 시대’라며 모든 걸 시멘트처럼 다 가로막고 산다고 말하셨어. 젠지 스테어 같은 것도 사실 어린 세대일수록 다른 사람과 대면하고 소통하는 경험이 적고, 낯선 사람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아.

<펜스 옆 마늘 싹> 스틸컷
<펜스 옆 마늘 싹> 스틸컷

지금 장위전통시장 앞, 장위동 10구역은 아주 높고 새하얀 펜스로 둘러싸여 있어. 펜스가 있으니까 예전 모습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아. 그럼에도 그 주위엔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어. 그리고 지금 만날 수는 없어도 펜스 안에서 오래 자리 잡고 살던 사람들의 흔적도 여전히 그 땅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왜 서울의 오래된 땅들은 모두 아파트가 되어야만 할까? 아파트에 살 돈이 없으면 그저 서울 밖으로 떠나는 수밖에 없는 걸까? 나중에 이 아파트를 채울 사람들이 없어지면 이곳은 어떤 모습이 될까? 집이 돈이 아니라 삶이 놓이는 터전이자, 관계 맺는 공간으로 여겨졌음 좋겠어. 그리고 아파트의 형태일지라도 오래된 아파트는 삶이 쌓이고, 사람들이 관계 맺는 공간이 되기도 하잖아. 기존 주민들이 재입주를 못 할 정도로 높은 가격으로 책정된 재개발 사업이 사람들을 내쫓지만 않는다면. 결국 돈도 좋은 삶을 위한 건데. 좋은 삶을 위한 관계들을 모두 끊고 대규모 ‘뉴타운’ 사업을 하는 것은 결국 어떤 의미가 될까. 왜 어떤 사람은 이 뉴타운 사업으로 목숨을 끊고, 용역깡패에게 내쫓겨야 하는 걸까. 이제 이 정도 규모의 뉴타운 사업은 서울에서 장위가 마지막이라는 이야기도 있더라고. 앞으로 집의 의미는 어떻게 바뀔까? 서울이라는 땅은 어떤 식으로 변화해갈까? 여러 의문이 들었어.

어제 상영회에는 영화에 출연해 주시거나, 이웃들을 소개해 주신 마을해설사님이 찾아와 주셨어. 보시면서 자신의 집이 나오거나 이야기가 나올 때면 깔깔 웃으면서 봐주셔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너무 좋았어. 출연자와 같이 웃을 수 있는 영상이 나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나는 이런 나날을 보내고 있어. 이제 진짜 올해가 두 달 남았네. 2026년 한 해는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휴식이 많은 한 해였던 것 같기도 해. 스스로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질 때마다 임금노동만이 내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며, 올해의 끝에는 부지런히 재미난 일들을 하며 지내보고 싶어. 이제 일시정지 연말결산도 슬슬 해봐야지! 넌 어떤 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을지 무척 궁금해. 그럼 곧 또 만납시!

From.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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