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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도라지 불고기>와 저의 상태에 대하여...

2026.03.04 | 조회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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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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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N 그리고 구독자. 벌써 3월이네. 날이 따뜻했다가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었다가, 정말 아프기 딱 좋은 나날이야. 이 레터를 다듬고 있는 지금은 3월 3일, 개학 날이라 학교에 새 학기 분위기가 물씬 나. 설레고 신나 보이는 사람들이 두리번거리고 깔깔 웃으며 다니는 모습을 보면, ‘아, 신입생이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난 벌써 대학원 2학년이야. 2년제니까 원래는 마지막 해지만, 도저히 졸업작품 할 마음도, 힘도 나지 않아서 그냥 3년제로 다니려고! 더 배우고 싶은 게 많기도 하고, 아무래도 학생이 가장 즐거우니까.

최근엔 내가 자원활동하고 있는 영화제에서 출품작을 심사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다가 생각이 났어. 내가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었던 건 다른 사람이 궁금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요즘 뭐를 봐도 재미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게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을 예전만큼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생각했어. 과거엔 도저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다른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타인과 세상을 대하며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어. 그래서 내 밖의 이야기들을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마구 접했던 것 같아. 영화도 많이 보고, 팟캐스트도 엄청 듣고, 노래도 이것저것 듣고. 그리고 내가 그걸 진심으로 궁금해했기에,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내가 변화할 수 있었을 거야.

근데 사람은 정말 쉽게 오만해지나 봐. 겨우 몇 년 더 살았다고 사람이나 영화를 궁금해하기보다는 그저 유형화하고 있으니 말이야. 옛날보다 저항이 세졌다고 할까? 딱 보니까, 이 영화는 이렇게 흘러가겠네, 만나보니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겠네. 스스로 결론 내고 쉽게 다가가지 않게 됐어.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코팅된 것처럼 주위의 것이 미끈하게 나를 스쳐 지나가.

요즘 정희진 선생님의 글쓰기 강연을 듣고 있는데, 거기서 공부하기 위해선 이전에 공부했던 것을 지우는 ‘Unlearning’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어.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선 내가 ‘사실’이라고 여겼던 것을 무너뜨려야 하는 거야. 아는 것을 접어 두고 대상을 순수하게 궁금해할 때 온전히 즐길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나도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 같아. 영원히 내 모습 그대로 남는 건 참 별로니까.

너는 요새 궁금한 것들이 있어? 나는 요새 혼자 판단해 미뤘던 영화들을 보고 있어. 작년엔 한국 독립영화도 정말 안 보러 갔는데. 최근 인디그라운드에서 내가 미뤄뒀던 영화들을 상영해 줘서 설에 쉬는 겸 마음 가는 작품들을 봤어.

특히 궁금함이 생겼던 건 양지훈 감독의 <도라지 불고기>야. 나는 감독 외 등장인물 얼굴을 다 지운 다큐멘터리라는 정보를 접하고, ‘또 무게 잡고 실험적이기만 한 영화 아니야?’라고 꼬인 생각을 했어. 이번엔 꼬인 생각을 잠시 접고, 깨끗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로 했지. 

 

첨부 이미지

 

<도라지 불고기>는 반항으로 만들어진 영화이자 그 반항 사이에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 흐르는 영화였어. 영화는 재일조선인을 특정 틀 안에서 비슷하게 그려내는 다큐멘터리의 고정적인 시선에 반항하며, 그간 조명되지 않았던 조선학교를 다녔지만 소위 ‘빨갱이’가 되지 않고, 부자들의 기부로 돌아가는 학교 시스템에 의문을 품고, 술 마시고 노래방에서 한국과 일본의 가요를 부르고, 불고기를 먹는 재일조선인의 일상과 생각을 담고자 했어. 생각보다 비장하지도 않았고, 특히 음악이 너무 좋았어. 영화 <도라지 불고기>는 ‘도라지’와 ‘불고기’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중 ‘도라지’ 파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링크를 첨부해.

https://archiewon.bandcamp.com/album/toraji-soundtrack

음악을 잘 모르지만, 실험적인 영화에 흔히 쓰이는 멜로디가 불분명한 앰비언트 음악이나 비트가 반복되는 전자음악에 조금 질려 있었거든. <도라지 불고기>의 사운드트랙은 확실한 감정과 멜로디를 가지고 있어. 음악이 XX형(영화에서는 출연자들의 얼굴뿐만 아니라 이름도 드러내지 않아)네 집에 간다든지, 조선학교 운동회나 축제가 이루어지는 풍경에 그리우면서도 미묘한 감정을 부여하고, 장면을 낯설게 보게 만드는 거리두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꼈어.

영화를 보면서 생각보다 얼굴 모자이크는 썩 신경 쓰이지 않았어. 내가 사람이랑 말할 때 얼굴을 잘 안 봐서 그런 걸까? 이상하게 그 사람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이 방법에 있어서는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언제나 고이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기에 이런 시도가 반가웠어. 사실 나도 사회적 의제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이 어떤 틀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거든. 혹은 의제의 당위성 방식에 대한 고민이나 시도는 뒤편으로 밀리기도 하고. 그 판이 계속 돌아가기 위해선 기존 것들에 대한 반박이 필요하고, 그 반박에 대한 반박도 필요한 것 같아. 어떤 것에 반항하고 다시 그것에 반항하고 또 반항하고 반항한 것들이 많이 나왔음 좋겠다.

아래는 양지훈 감독이 인천인권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서 영화의 블러 처리에 관해 답변한 것 중 일부야.

“그런데 <도라지 불고기>를 만들면서 제가 생각했던 건 이걸 만드는 과정에서 욕망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욕망하지 않는, 그러니까 욕망하는 사람인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옳은 선택인가? 이게 정당한가? 이게 바른가? 그랬을 때 오히려 그렇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들의 얼굴이 여기에 이렇게 노출되었을 때 어떤 범주로서 고정될 걸 생각해 보면 그게 긍정적이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제 얼굴만을 드러내겠다고 마음을 먹었고요.”

다큐멘터리가 재밌는 건 오롯이 감독의 욕망만으로 흘러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 같아. 촬영을 허락한 것부터, XX형과 그의 부모님이 조선학교 시절 촬영한 영상이 담긴 CD를 틀어준 것도, 아는 형이 바에서 일하는 것도, 인터뷰 중 그들이 한 답변도 모두 감독의 욕망대로 흘러가지 않잖아. 물론 편집을 거치며 감독의 의도대로 취사 선택되긴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엔 함께한 사람들의 욕망이 섞여 있어. ‘만약 출연자 중 얼굴을 드러내길 원했던 사람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만약 그랬다면 감독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관련해서 인천인권영화제 ‘대화의 시간’ 기록을 첨부해. https://inhuriff.org/9150/ 

양지훈 감독과 함께 대화를 나눈, 재일동포 조미수 한일문화번역자의 이야기가 인상 깊어. 조미수 님께서 양지훈 감독의 시도에 대해

“어쩌면 전형적인 부분의 반전이 또 하나의 전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라고 언급하셨는데, 정말 ‘헉’ 했어. 묘하게 덮고 넘어간 빈틈을 찌른 듯한 말이었어. 그에 공감하며, 그럼 ‘어떻게 전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세상에 살며 무언가를 생산하는 한 어떤 전형일 수밖에 없나?’ 하는 질문이 들었어.

 

어찌 됐든 분명히 느낀 것은 감독이 재일조선인인 XX형을 포함한 지인들의 삶을 궁금해하고 있음을, 이걸 보는 사람들도 재일조선인을 기존 틀에 가두지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궁금해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어.


글 마무리가 이상하지? 짜잔, 이건 사실 미완의 글이야. 사실 이 글을 한 달째 붙잡고 있다가 다시 적어. 설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벌써 개강 날이 되었네. 게으름이 맞지만, 이에 변명을 해보자면 뭐라고 말할수록 그에 대한 반박이 떠오르고, 다 거짓말 같은 거야. 이 미완의 글이라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어쩌면 이 미완의 글이 지금 내 상태인 것 같아서… 염치 불하고 보내. 어떻게 하면 글을 제때 써서 제때 보낼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을까? 정신을 빼놓는 일이 너무 많은 걸까? 아님 너무 인풋이 없는 걸까? 그저 기다리면 되는 걸까? 알 수가 없어서 일단 나를 잘 달래며, 이것저것 해보며 살아보려고. 너는 요새 어떻게 지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 궁금해. 역시나 제일 궁금한 건 주위 사람의 일상인 것 같아. 궁금함을 잘 간직하고 살고 있을게. 미완의 글이어도 좋으니, N의 이야기도 들려줘. 그럼 안녕!

From.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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