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도, 여우계단도 없는

괴담도 없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2024.08.30 | 조회 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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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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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메일로 인사를 건네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나도 어디부터 근황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부디 안녕한 얼굴로 이 메일을 읽고 있길 바라.

모든 것은 정말 이름 따라 가나? 메일을 쓰며 '일시정지'라는 이름을 지은 데 애꿎은 후회가 들기도 했어. 그래도 앞에 붙은 '일시'라는 말을 믿으며, 다시 시작해볼게.

먼저, 메일을 다시 써보자는 제안을 해줘서 고마워. 나도 글 쓰는 시간이 꽤 그리웠어. 그간 시간의 속도감에 휩쓸리며 제대로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할 새 없이 살아온 것 같아. 왜 이렇게 시간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찬찬한 시간을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요즘 해.

사실 내 인생에 무언갈 다시 시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완전한 끝도, 새로운 시작도 아닌 멈췄던 걸 다시 시작하는 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걸까. 1년 반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편지를 건네려니 첫 메일을 쓸 때보다 더 망설여지는 것 같아.

어떤 말로, 어떤 마음으로 써야 할지 헤다가 지난 메일들을 다시 들춰봤어. 우리가 써왔던 그 글들이 다시 쓸 힘이 되더라고. 이때는 이런 생각, 이런 마음으로 썼구나. 지금 이렇게 보내는 글도 언젠가 다시 읽으며 새삼스러워하는 날이 오겠지.

주절주절, 영화 이야기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봐.

<여고괴담>은 다시 시작할 영화로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 비록 지금 보니 전혀 무섭지 않아 서늘함을 원했던 욕망은 충족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됐던 때이자 애증했던 고등학교 시절도 떠오르고, 그 시절을 기반으로 지금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해.

우리 학교엔 괴담이 있었나? 내가 기억하기론 그런 건 없는 무미건조한 학교였던 것 같아. 당시 UFO 애호가였던 우리 담임샘이 "저 뒷산이 UFO 출몰지다." 이런 얘기는 했었지만...

<여고괴담 3 : 여우계단>의 괴담은 간절히 소원을 품고 오르면, 없던 29번째 계단이 나타나 소원이 이뤄진다는 여우계단에 얽혀 있잖아. 보면서 생각했어. 저 계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나는 과연 오를까? 오른다면 어떤 소원을 빌까?

소원이 뭐냐는 너의 질문에 지금의 나는 답을 하기 어려워. 어떤 것도 깨끗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빌 수 없달까. 찾는다면... 주3일제? ㅋㅋㅋㅋ 일종의 욕망과 결핍 없는, 안빈낙도적 삶을 제하고는 어떤 걸 바야 할지 모르겠어. 시간이 지날수록 무조건적인 행복이나 불행은 없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어서, 그 무엇도 간절히 열망하거나 싫어하기 어려워진 것 같아.

그래도 소원이 있다면 미적지근함에 머무르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어. 열정적이진 못하더라도 더 나은 상황을 계속해서 상상하고 지향하는 사람. 시간이 흘러도 반짝이는 눈과 설레는 마음을 지닐 수 있는 사람. 이젠 그런 순간이 점점 드물어지는 것 같아 두려워.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소원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아. 진심으로 바라고 꿈꾸고 설레던 게 있었지. 나이론을 펼치고 싶진 않지만, 청소년기 모든 감각이 더 예민했든, 욕망도 참 선연했던 것 같아. '소원'이 될 만큼의 욕망 하나씩을 마음 속에 품고 살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때인 것 같달까.

<여고괴담 3>의 이야기도 모두 진성, 소희, 혜주의 욕망에서 시작돼. 발레에 있어 인정 받고 싶은, 소희를 넘어 '지젤'이 되고 싶은 욕망을 지닌 진성, 그런 진성을 발레보다 좋아하는 소희, 아름다움을 열망하며 소희를 동경하는 혜주.

영화를 다시 보며 이건 공포영화라기 보단 로맨스, 치정극이 아닐까 싶었어. 그들의 욕망과, 파국으로 치닫는 사랑을 보면서 얼마전 보고 온 <러브 라이즈 블리딩>이 떠올랐달까...? 사랑 때문에 살인이 빈번해지는 이 영화엔 "너는 사랑 같은 거 하지마라. 너무 아프다..." 같은 대사가 실재해. 로맨스가 극에 달해 코미디에 가까워졌달까.

두 영화 모두 사랑과 욕망 때문에 죽고 죽이고 뭐 그런 것들이 겹쳐보였어. 차이점이 있다면 러라블에선 죽이고 태우고 묻으면 끝이지만, 여고괴담에선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죽음과 생의 경계가 흐릿한 지독한 세계관이지.

영화의 결말에 대해 생각해봤어. 세 명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졌는데도 해피엔딩이라 부를 수 없는 결말. 네 말처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닌 것 같아. 원하는대로 다 이뤄지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정말 그렇게 됐을 때 우리는 더 큰 공허와 파국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걸 생각했을 때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오히려 내 삶을 다채로운 가능성으로 이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만약 지금 내 앞에 여우계단이 있다면 오르지 않을 것 같아. (고등학생인 세계관이라치고) 싱겁게 지나쳐서 그냥 평소처럼 수업 듣고 수다 떨다 매점이나 가며 일상을 살고 싶어. 사실 현실엔 여우계단도 없고, 딱히 그렇다할 소원도 없지. 그 속에서 극적인 것 없이 지긋지긋 하더라도 미래를 두려워 하는 동시 궁금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어.

우리 다음 레터에선 무슨 얘길 해볼까? 너의 편지 속 빛나는 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설렘을 잘 간직하며 살아가볼게. 너의 일상에서 간간히 기대와 기쁨을 마주칠 수 있길 바라며.

Fro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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