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N의 답장을 찾아서...

Finding 일시정지, 에밀리, 그리고 리얼 니키?

2026.09.22 | 조회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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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L, 구독자 ! 우선 답장이 늦어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편지 이름 따라간다고 일시정지가 너무 길었지... 오랜만에 전하는 인사라 낯설어서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어. 나는 지금 이역만리에서 이 편지를 쓰는 중이야. 10시간을 날아 도착한 땅은 한국이랑 비슷한 듯 또 달라서 매일 붕 떠 있는 기분. 이제 막 한 달 차에 접어들고 있는데 비가 와도 해가 뜨거워도 헤실헤실 웃게 되는 순간이 많아. 친지 하나 없는 땅에 나를 던져 놓는 기분은 어떨까? 6년 내내 꿈만 꿨는데 막상 오고 나니 별일 아니더라. 작별 인사가 길었던 탓인지 아직 눈물도 한 번 안 났어. 엄마 미안! 아 낯부끄럽다며 손편지 답장은 절대 안 써주던 친구들이 전해준 편지는 다시 못 읽고 있긴 해. 고심해서 적었을 모든 낱말이 나를 지켜주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가방에 고이 넣어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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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다른 땅에 와도 나는 여전히 나라서...끝없이 걷고 나무와 고양이만 보면 카메라를 들어보고, 운동하고, 요리하고, 어김없이 영화를 보러 가. 타지에 나와 있으니 나를 편안하게 만들던 습관들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 같아. 스스로를 어디에 던져놔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들 있잖아. 어디서든 내가 나일 수 있게 만드는 것. L과  구독자 에게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해. 

집 근처 공립도서관엔 별별 영화, 드라마 DVD가 다 있어. 영자원처럼!
집 근처 공립도서관엔 별별 영화, 드라마 DVD가 다 있어. 영자원처럼!

여기엔 한국에서 미처 개봉하지 않은, 서비스되지 않던 영화와 드라마가 어찌나 많은지... 넷플릭스가 처음 서비스되던 그날처럼 가슴이 막 콩닥거리던 거 있지.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자체 자막 번인본으로만 돌던 해외 드라마들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그날. 대체 뭐부터 봐야 할까 밤새 고민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말이야 벌써 10주년이 됐대. 여전히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영화를 책장에 가둬두고 싶은 마음이 그득하지만 이게 어디야!

홈스테이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좀 나가 놀아'라는 애정 어린 잔소리를 들었지만 하루 종일 거실에서 영화랑 드라마만 본 날도 있어. 더 드라마, 길모어걸스, 수퍼스토어, 푸싱 데이지 그리고 플리백도 다시 봤어. 아직도 볼 게 한참 남아서 행복해. 사실 이 설렘이 얼마나 갈지도 궁금해서 메일에 슬쩍 남겨봐. 몇 달 후 다시 소회를 밝혀볼게. 아직까지도 조금 어려운 건 좋아하는 콘텐츠 이야기를 영어로 하는 거야. 이건 이래서 좋았고 저건 저래서 좋았다 왜 말을 못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영화, 드라마 얘기하는 건 여전히 재미나. 우연하게도 내 룸메들이 영화, 연기 전공인 거 있지. 아마 우리 집에서 내가 영화를 제일 덜 봤을지도 몰라. 물론 한국 영화는 내가 제일 많이 봤겠지? 우리집 애들 모두 <호프> 보러 가게 하는 게 내 목표야. 이곳에선 이제 막 개봉했거든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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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들과 요리하고 떠들다 보면 비로소 보이는 베란다 풍경이야. 지금도 거실 식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어. 오늘은 한 친구와 '아무 데서도 볼 수 없는 영화' 얘기를 나누다 영화 해적 사이트를 공유 받았어. <영화도둑일기>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구나 싶더라. 극장 개봉하는 영화가 줄어들수록 해적들의 판은 더욱 커지지 않을까?🏴‍☠️

"You can always find it in some corner of the internet." 해적 친구의 말을 인용하며... 

 


 

기나긴 근황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비슷하면서도 양극단에 있는 듯한 두 영화를 소개하고 싶어. 바로 <파인딩 에밀리>와 <옵세션>이야. '20대 남녀가 등장한다'라는 것 빼곤 전혀 겹치는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만, 여성 관객으로서 상당히 공포로 다가오는 지점들이 있었거든. 다만 이 부분을 영화 필터 씌워 낭만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두 편 모두 만족스러운 영화였어. 아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될 예정이니 유의해서 읽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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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딩 에밀리>

짝사랑에 빠진 한 뮤지션이 꿈에 그리던 상대의 전화번호를 잘못 받게 되자 열정적인 심리학 전공 학생과 함께 그녀를 찾기로 한다. 두 사람의 여정은 캠퍼스 전체를 들썩이게 하는 유쾌한 소동으로 이어지고 각자의 마음과 목표도 시험대에 오른다. 

내 트위터 (아직도 X라고는 못 부르겠어!)  피드에 몇 달 전부터 뜨던 로맨틱 코미디 클립의 정체, 바로 이 영화였어. 90년대 그 시절 롬콤을 떠올리게 한다나. 알고리즘이 자꾸만 내 눈앞에 들이밀길래 프리 릴리즈 날 후다닥 보러 갔어. 워킹 타이틀 프로덕션 로고가 등장하자마자 '아는 맛이겠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우리가 아는 그대로 흘러가. 사건 발생 - 우연히 만난 주인공들 - 관계 쌓기 - 오해 및 갈등 -  극적으로 서로에게 질주 - 끝내주는 사운드트랙과 함께 해피엔딩~ 참고로 영화 배경이 맨체스터라 그런지 브릿팝 사운드트랙이 멋들져! 갤러거 형제를 닮은 주인공의 억센 영국 사투리도 듣는 재미가 쏠쏠해. 사실 영어 자막이 없어서 오웬의 대사를 많이 놓쳤어... 어쩌면 나는 이 캐릭터를 비판할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 

벽보 글씨를 좀 더 또박또박 쓸 수는 없었던 걸까? (미안)
벽보 글씨를 좀 더 또박또박 쓸 수는 없었던 걸까? (미안)

파티에서 만난 그녀에 대해 아는 정보라고는 이름이 '에밀리'라는 것, 그리고 한 자리 모자란 전화번호. 오웬은 분명 어젯밤 서로 통했다고 자부하며 그녀를 찾아나서. 무작정 캠퍼스를 돌며 꿈같은 사랑 이야기를 늘어놓지. 영화는 오웬의 시선으로 그날 밤의 기억을 따라가. 그를 보며 웃어주던, 천사 같은 / 엉뚱한 / 발랄한 매닉 픽시 드림걸 에밀리. 분명 에밀리도 오웬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착각일까? 당시 에밀리의 마음은 영영 알 수 없겠지만 어쩌면 전화번호를 잘못 알려준 게 거절의 의미는 아니었을까? 돌이켜 곱씹어보게 되더라고. 영화 보는 내내 오웬을 쫓아 '에밀리를 향한 순애보'를 따라갔지만 끝나자마자 마음 한구석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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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내 오웬은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한 순정남으로 등장해. 8-90년대 흔히 보이던 그런 캐릭터. 직접 캠퍼스를 발로 뛰며 벽보를 붙이고, 수소문 끝에 심리학과 에밀리를 만나기에 이르러. 그가 찾던 그 에밀리는 아니지만, 그녀 찾기에 도움을 준다는 한마디에 바로 헤실거리는 남자야. 반면 이 에밀리는 속이 거먼, 계산 가득한 여자로 등장해. 본인의 심리학 논문 대상으로 오웬을 이용할 생각에 번뜩이지. 낭만적 사랑은 현대 인류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집단적 광기이자 진화의 잔재라는 연애 심리학 논문 대상으로 점찍고 오웬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해. 어찌 보면 완벽한 대상자가 넝쿨째 굴러들어온 거긴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답게 연구 윤리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 아마 대학원생이나 교수님이 보면 뒷목 잡을 거야! 이 영화 속 교수님도 뒷목 잡으셨거든. 대화를 가장해 그의 이야기를 녹음하고, 결과 도출을 위해 이리저리 자극해. 그런데 있잖아 연구 주제에서 뭔가 결말이 보이지 않아? 사랑을 믿지 않던, 그를 이용하려던 냉소적인 그녀가 결국 낭만적 사랑을 입증하게 되는 이야기. 시대, 성별 막론하고 로맨스의 원형이자 토대라고 봐 나는! 여기서 조금씩만 변주를 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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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심리학과 에밀리를 통해 캠퍼스 내 모든 에밀리의 이메일 주소로 "에밀리를 찾습니다" 메일을 발송하게 돼. 그것도 모두룰 참조해서! 숨김 참조할 줄 아는 똑똑한 남자였다면 메일을 작성할 생각도 안 했겠지. 이에 분노한 에밀리들은 삼삼오오 모여 시위대를 만들고 무지몽매한 오웬을 지탄하는 자리도 만들어. 영화는 운명의 여자를 찾아나선 오웬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심리학과 에밀리의 삶, 그녀의 친구, 오웬의 가족, 그리고 다른 에밀리들의 이야기까지... 얼기설기 하나의 여정처럼 엮어내. 무엇보다도 이 순진무구한(?) 청년을 일방적으로 달래주는 인물 없이, 서로 모자랐던 부분은 꾸짖고 함께 채워 나간다는 지점에서 이 영화가 좋아졌어. 

 


분명 흔한 이야기인데 유독 잔상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 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찾아낸 영상이야. 오웬의 발자욱따라 보이는 맨체스터 풍경 그리고 무심하게 걸친 자켓, 특유의 레트로한 색감. 제작진이 이 영화만의 비주얼 에스테틱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지. 훗날 이야기는 흐릿해져도, 이미지로서 계속 회자되리라 자부할 수 있어. 아직 국내 개봉 일정은 없지만, 혹여 스트리밍 플랫폼에 들어오게 된다면 꼭 큰 모니터를 통해 보길 바라. 헤드폰도 있다면 툭 걸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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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세션>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니키’를 짝사랑하던 ‘베어’는 골동품 상점에서 구입한 ‘원 위시 윌로우’에 ‘니키’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연인이 되지만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일과 마주하게 되는데... 

여기 한 여자에게 푹 빠져 정신 못 차리는 남자가 있습니다. (김경식 톤으로) 니키에게 고백 한 마디 할 용기도 없던 베어는 원 위시 윌로우라는 신비한 물건에 소원을 빌어.

"니키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게 만들어주세요."

"나 너를 좋아해"라는 말 한마디 직접 건넬 용기는 없으면서, 이 의뭉스러운 물건엔 말을 잘만 하더라. 소원을 빈 사람이 사망해야만 만료되는 무시무시한 주술 장난감인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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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원숭이 손 이야기 알아? 주술이 걸려있는 신비한 원숭이 손에 소원을 빈 가족이 겪게 되는 비극 이야기. 대출금을 갚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아들이 사고로 사망하며 보상금이 나오고. 그를 다시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자 끔찍하게 훼손된 모습 그대로 무덤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는 아들... 소원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지만 가장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거야. 

 

<옵세션>의 원 위시 윌로우도 일종의 원숭이 손 주술이라고 볼 수 있지. 상대의 자유의지를 앗아가 버리는 잔인한 주술이거든. 니키는 베어의 소원 때문에 전적으로 그에게 매달리게 돼. 그녀 본연의 모습은 잃어버린 채, 베어를 사랑하다 못해 미쳐가는 니키만 남게 되지. 소원이 처음 이루어졌을 때만 해도 꿈꾸던 데이트와 스킨십을 즐기며 행복해하던 베어는 이내 두려움에 떨기 시작해. 자기가 빌어놓고는 어이가 없지?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쌓아갈 용기는 없이 일단 쟁취만 하면 다일 줄 알았던 거야. 본인의 일방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니키의 동의는 어디로 증발해 버린 걸까? 애초에 진심으로 의사를 물을 생각은 있었던 걸까? 나는 베어의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순진한 순정남의 애타는 마음' 따위로 포장하거나 낭만화하지 않아 좋았어. 오히려 그 지점을 정면으로 폭로하는 것 같아 속 시원했달까. 영화를 보는 내내 대부분의 장면에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 조차도 의도적으로 느껴져서 기꺼이 보게 되더라. 다만 다들 연기를 잘해서 그런지 결말부에선 베어 배우 얼굴만 봐도 지긋지긋했어. 스크린에 신발이라도 던지고 싶은 마음. 공포에 벌벌 떨면서도 죽을 용기는 없는 놈...🤯 니키한테 잘못했다고 말할 생각도 없는 놈!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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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간중간 본래의 니키가 번뜩 돌아오는 지점이 있는데, 베어는 이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집어지거든? 나는 그런 베어의 모습에 더 소스라치게 놀랐어. 본인이 니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돌이켜 볼 생각조차 안 하고 그저 본인이 좋아하고 싶은 니키가 사라질까봐 벌벌. 쟁취할 때까지는 별도 달도 따줄 기세로 다가가다 손아귀에 갖고 나면 멀찍이 떨어져 '나한테 왜 이렇게 집착해, 너 이상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물론 베어는 성심성의껏 공들이는 성의조차 없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니키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게 황당했어. 물론 주술에 걸려 인간이면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을 벌이지만 이게 니키 잘못일까? 그녀의 인간성을 빼앗은 게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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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딩 에밀리>와 <옵세션>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영화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해. 상대의 동의가 없는 낭만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가?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타인의 동의를 내 멋대로 건너뛰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 그게 벽보, 이메일, 주술... 어떤 방식이든지 말이야. 아무리 인스턴트 시대라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절대 일방적일 수 없는 거잖아. 비단 연인 관계를 떠나서도! 당연한 진리지만 새삼 곱씹게 되는 밤이야. 점점 에밀리의 심리학 연구를 지지하게 된다. 낭만적 사랑은 현대 인류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집단적 광기이자 진화의 잔재, 동의할게 에밀리.

 

 


 

 

P.S. 난 요즘 아트 하우스에서 자원 봉사를 하고있어. 단관에 소담한 매점을 갖춘 곳인데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단순한 버터 팝콘만 판매하지만, 무료 토핑이 어림잡아 열 가지는 넘어. 신기하지! 어떤 게 맛있는지 다른 자원 봉사자들 의견을 모으는 중인데 Nutritional yeast가 현재까지 1등이야. 살짝 치즈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왜 nutritional이냐 물어봤는데 비타민 b6가 들어있다더라. 별게 다있지 참. 나중에 오게되면 꼭 소개해줄게. 참고로 첫 시프트 날엔 1달러 팁도 받았어ㅋㅋ 시트콤 파일럿 회차 속 홀로 뚝딱이는 캐릭터가 된 기분이었지만... 언젠간 이도 익숙해질 날이 오겠지? 여기서 처음으로 <플리백> 좋아하는 친구도 만났어. 피비 월러 브릿지처럼 자기 이야기를 쓰는 작가 친구야. 세상에! 망망대해에서 혼자 헤엄치나 싶다가도 사소한 우연에 맘이 일렁이는 밤이야🌊 답장 기다릴게. Night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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