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N! 잘 지내고 있니? 우리 요새 근황도 못 나눴는데 시간이 정신없이 흐른다. 대학원에 다니다 보니 별걸 하지 않는데도 바쁘고 정신이 없어. 얼마 전 황새 다큐멘터리 제작을 마치고 내가 번아웃이 온 걸 알았어. 하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경험을 하며, 사람은 꼭꼭 쉬어줘야 하는구나, 스스로를 한없이 착취할 순 없구나 싶었어. 어깨를 다치고 체력이 많이 낮아진 것도 원인인 것 같은데, 그렇게 이것저것 조금 덜 하면서 조금 이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어. 다 잘 해내고 싶은데 어렵다.
이사한 집은 이제 좀 적응이 됐으려나. 첫 독립 정말 축하해! 혼자 사는 건 말 그대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 내 맘대로 할 수 있지만 모든 걸 내가 해야 한다는…. 가끔 고독하긴 해도 가족과 함께 살 때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을 새롭게 느끼고 너만의 일상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지난달 미쟝센단편영화제는 잘 다녀온 것 같아 다행이야. 우리가 자원활동가를 하고 난 다음 해인 2021년을 끝으로 영화제가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부활할 줄이야! 미쟝센은 내가 처음으로 영화제 자원활동가를 했던 곳이라 그런지 뭔가 애틋한 마음이 들어. 내 기억으론 그때 네가 같이 자원활동가를 해보자고 먼저 제안해줬던 것 같은데...! 덕분에 소중한 추억이 생겼다.
2020년, 코로나로 모든 영화가 온라인 상영 되고 물리적인 만남이 제한되던 시절이었으나... 내가 맡은 데일리팀의 일은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것이었기에, 하루 정도 사람들을 대면해 영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 낯을 많이 가림에도 그날만큼은 사람을 직접 만나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설레고 기뻤던 게 기억 나. 경복궁역 스타벅스에 정말 종일 앉아 한 자리에서 사람만 바꿔가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터뷰만 했어. 정말 인터뷰 차력쇼였고, 스타벅스 직원분들 눈치도 보였던 기억이 함께 나네요 :)
영화제 업무가 시작되고 당시 아파트 상가에 있던 영화제 사무실로 가 <비정성시> 파트의 영화를 다 보고 인터뷰 대상작을 뽑았어. 그때 만난 영화 중 <실>은 지금까지도 너무나 소중한 영화로 남아있어. 단편영화가 이렇게 좋을 수 있구나! 처음 느끼게 해준 영화였거든. 그때 쓴 글을 빌려 <실>에 대해 설명해 볼게.

창신동에 있는 명선의 작업장. 명선은 그곳에서 ‘오다 받아서’ 옷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 공간 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난다. 디자이너, 딸, 같이 봉제 일을 하는 동료들, 외국인 유튜버까지. 우리가 보지 못한 시간 동안에도 명선의 작업장엔 계속 사람이, 옷이 들고 났을 것이다. 그 시간의 겹들을 우리는 명선의 움직임과 공간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실>은 역사 속 멈춰진 봉제노동이 아닌 지금도 생생하게 흐르는 명선의 일과 일상을 담아낸다.

극영화임에도 실제 창신동 공간에서, 오랜 시간 봉제 노동을 해 온 사람들을 촬영한 것이기에 인물의 행동과 공간에서 연출해 낼 수 없는 시간의 겹이 보여. 그게 너무너무 좋더라고. 그냥 그 사람 그 공간으로 보이는 게 사랑스러웠어. 그래서 <실> 인터뷰가 마지막이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도 인터뷰하며 무척 설렜어! 감독님이 인터뷰 때 직접 만든 명함을 주셨는데 그걸 계속 간직하고 다니기도 했었어. ㅋㅋㅋ
<실>의 두 감독님은 '이렇게 시간을 보여주는 영화면 장편영화가 낫지 않냐'는 주위의 말에 이렇게 답했어. 때로 단편영화를 그저 장편영화로 가기 전 만드는 작업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대답이 단편영화만이 지닌 매력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
이나연 감독 : 오래 보여준다고 해서 더 잘 보여주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조민재 감독 : 그래서 단편영화로 설정한 거거든요.
혹시 궁금할까봐,,. 그때 쓴 인터뷰 기사를 첨부해요 .. ^_____^
<몸에 담고 있는 물리적 시간을 최대한 섬세하게 보여주려고 했어요>
개편된 미쟝센 영화제에선 '사회적 관점을 다룬 드라마' 섹션명이 <비정성시>에서 <고양이를 부탁해>가 됐더라고. 어쩌면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 개인사를 다루는 영화에서 각 인물의 일상을 통해 시대상을 드러내는 영화로 바뀐 것이 적절한 선택인 것도 같다. 네가 지난 레터에서 언급해 준 영화이자, 내가 제일 보고 싶었던 <떠나는 사람은 꽃을 산다>도 이 섹션에 속하더라고.
영화의 제목이 왜 <떠나는 사람은 꽃을 산다>일지 궁금해서 감독 인터뷰를 찾아봤어. 감독이 어떤 곳을 떠나오기 며칠 전 예쁜 꽃을 발견했는데, '곧 떠날 건데 꽃을 사서 뭐 하나' 하며 그냥 돌아왔대. 그러다가 '나랑 같은 상황에서도 꽃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해.

떠나기 전에 꽃을 사는 건 어떤 마음일까? 나도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았는데, 그럼 최소한의 정을 주고, 최소한의 것을 하고, 최소한의 것만 남더라고. 꽃을 사는 사람이라면 떠날 것은 뒤로하고 용감하게 지금 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또 진득하게 이별할 수 있는 사람일 것 같아.
난 이 영화가 묘사하는 이별의 순간이 그저 아름답지는 않아서 좋았어. 7년간 그곳에서 매일을 보냈는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쌓였을까. 은하는 헤어진 애인을 만나고자 다리 위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자신의 송별회 파티에서 온전히 즐기지도 못하고, 자기 친구들과 빠르게 친해진 한국인 친구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하고, 한국에 있는 엄마의 걱정은 짜증이 나고. 그렇게 부글대던 감정이 한순간 펑 터져 버리고, 터져버린 감정은 오히려 솔직한 소통을 만들어내.
N, 구독자은 어떤 마음으로 다가오는 이별을 대하는지 궁금해. 나도 용감하고 깔끔하고 솔직하게 이별하고 싶은데.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선 무엇보다 그 전까지의 일상을 솔직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게 필요한 것 같아. 그렇기에 멋진 이별이란 게 정말 어려운 거겠지?! 만약 혹시 지금 이별을 앞두고 있다면, 익숙한 것에서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 꽃을 사는 마음으로 이별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음 좋겠다.
N이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롤도 슬슬 들리고, 이제 한 해와 이별해야 하는 날일 다가오네요. 올해는 어영부영 작별하기보다는 차분히 안녕해 보고 싶어. 올해 1월부터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시간을 되돌려 생각해 보다 보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12월 3일이 다가와서 생각해보니, 혹시 계엄이 내 번아웃의 이유였으려나?! 이러나저러나 추운 날의 차분한 분위기는 참 좋다. 연말은 좋아하는 것들과 따뜻하게 보내길 바라며, N 그리고 구독자. 12월에 또 이야기 나누자. 안녕!
From.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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