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L 그리고 구독자. 벌써 연말이야. 11월, 12월 두 달은 채 의식도 못하고 보내는 것 같아. 마무리 지을 것도 많고, 약속도 많고, 바삐 캐롤도 들어야겠고... 크리스마스 영화도 봐야 하지. 나한테 있어 살아간다는 감각은 이런 것 같아. 매일, 매년 나만의 사소한 의식을 즐기는 것. 네가 이야기한 <이키루> 속 와타나베 씨가 바랐던 '존재한다'라는 감각도 비슷한 것이 아닐지 생각해봐. 거룩한 무언가를 이뤄내기보다는, 저무는 일상 속 활력 징후를 들여다보는 것이지. 참 연말이 되니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진다. (원래도 많았지만 말이야)
더 깊어지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가자.
💪보고 싶어요 목록에서 건져 올린 '그' 영화
꽤 오래 고민한 우리의 이번 글감 : 보고 싶어요 목록에서 한 편 꺼내보기! 언젠가 봐야지 하고 북마크는 하지만, 작심하지 않으면 못 볼 것 같은 그런 영화를 보기로 했지. 바로 몇 편의 영화가 떠올랐는데 이번을 기회 삼아 액션계 클래식 <다이하드>를 꼭 끝내보고자 해. 아마 일시정지가 아니었다면 이번 생에 못 봤을지도 몰라. 좀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난 액션에 알레르기가 있거든. 내 말은, '액션'이 주가 되는 콘텐츠 말이야. 옛날 슈퍼액션 채널 기억나? 아무리 심심해도 그 채널은 0.1초 만에 넘겨 버렸던 기억이 나. 다이하드 시리즈도 참 많이 해줬던 것 같은데 한번을 본 적이 없어. 그만큼 나에겐 이 영화를 완주하는 것이 크나큰 도전이라는 거야. 다들 도무지 손 안 가는 장르 있잖아 구독자 ?
그럼 대체 왜 보는 것이냐. 바로 내 최애 드라마 <브루클린 나인나인> 속 주인공 제이크의 최애 영화이기 때문이야. 대사 인용은 물론이고 장면 오마주도 자주 나오는데 나만 모르니 너무 답답한 거 있지. 시도 때도 없이 얘기하고 자기들끼리 웃으니까... 소외되는 기분이더라고. 기필코 영화를 보고 다 이해하리 - 결심한 지도 5년이 지났는데 여태 안 본 나도 나다. 제이크 나 너랑 영화 취향 진짜 안 맞는 것 같아.
🎅다이하드는 [크리스마스]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느낀 점은, 위 제목과 같아. 이미 내 크리스마스 영화 목록에 포함했어. 역시 영화도 사람도 진득하게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건가. 피, 상처, 폭발, 총소리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캐롤, 트리, 사랑이 있는 영화였어. 나도 모르게 애써 보고 싶은 대로 본 것일지도.
하지만 아래 큰 줄기를 보면 알 수 있듯, 배경 자체가 크리스마스 & 연말 파티야. 물론 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갔지만, 왠지 마음 한편, 이 영화는 여타 8090 크리스마스 영화들처럼 해피엔딩일 거라는 믿음이 솟더라고. 느리게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눈 오는 배경, 그리고 살며시 캐롤 페이드 인. 예상과 한치도 빗나가지 않은 게 코미디야. 다이하드에서 Let it snow 들을 줄이야!
- 얼결에 캘리포니아에서 테러리스트들을 상대하게 된 뉴욕 경찰 존 맥클레인
- 후줄근 민소매와 맨발이 검게 물들 때까지 고독하게 싸우는 어른 버전 케빈
- 마초적 영웅보다는 끈기로 버티는 소시민(?)과 심히 악독하지 않은 빌런의 결투
대중, 제이크가 왜 그리도 다이하드에 열광했는지 이제야 이해했어. 타격감 넘치는 액션, 카타르시스, 권선징악 베이스에 어쩌다 보니 영웅으로 등극한 시민 맥클레인. 보다 보면 주인공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파하고, 두려워하고, 울고, 말도 많고 그래. 이 와중에 농담도 하고 말이야. 툭툭 주고받는 조력자와의 무전기 대화를 놓치지 말고 들어봐. 피식 웃게 돼.
이윽고 깨달은 건... 바로 '제이크'라는 캐릭터의 코어가 존 맥클레인이었다는 것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해당 캐릭터의 추구미. 평소엔 껄렁이는 듯 시시콜콜한 농담만 내뱉다가, 사건 해결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동료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인류애 넘치는 캐릭터 (가 되고 싶은 것이지) 알고 보니 1화 파일럿 회차부터 끊임없이 언급하고, 오마주 했더라고. 경찰 배지를 체인에 달아 목에 걸고 다니며, 악독한 상대는 '한스 그루버 (다이하드 內 테러리스트)'에 비유하고, 나카토미 빌딩에 방문해 기념사진을 수백장 남기며, 끝내 자식 이름을 Mac으로 짓기까지. 지독한 사랑이야. 난 이렇게까지 한 영화를 사랑해 본 적이 있나? 부럽고, 또 반성하게 된다.
어째 제이크 얘기를 더 많이 한 것 같지만. 나도 다이하드에 시나브로 스며 버린 것을 인정할게. 훗날 엘에이에 가게 되면 나카토미 플라자 (실제 Fox Plaza)에도 방문하고 싶다. 존 맥클레인과 제이크 페랄타를 함께 떠올리며 기념사진을 남겨야지! 이왕이면 연말이 좋겠다.
추신. 넷플릭스를 구독 중이라면 <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다이하드 편과 브루클린 나인나인 시즌 3 에피소드 10을 연달아 보는 것을 추천할게. 영화를 한층 진하게 즐길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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