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이제 내 나이도 헷갈린다. 언젠가부터 시간이 그냥 후루룩 지나가 버려서 내 나이가 내 나이 같지 않아. 10대 후반이나 20대 초, 또래 외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지 않았을 때, 나이를 더 무겁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 보다 더 어른인 사람들도 만나 보며 ‘아, 나이 든다고 사람이 딱히 변하지 않는구나.’ 느꼈지.
또 사회의 ‘정답’이라 여겨지는 생의 흐름에서 벗어난(혹은 편입될 수 없는) 삶을 목격하고 살아가게 되며, 숫자로서의 나이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데, 노년에 대한 두려움은 떨칠 수가 없어. 이 막연한 두려움의 원인은 뭘까. 근본적으로… 내 미래를 그릴 수가 없다는 것? 노년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매일을 살고 있을까? 돈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아프면 어떡하지? 집안일은 잘하고 있을까? 멋진 할머니는 바라지도 않지만, 삶을 정갈하게 꾸리며 살아가고 싶은데. 안정적인 직장 혹은 수입원도 없는 이 애매한 시기엔 흐릿한 밑그림 그리기조차 어려워.
그래서 선례를 찾고 싶었어. 다들 노년에 접어든 삶을 어떻게 지나고 있을지, 아플 땐 어떻게 하는지. 주변은 어떻게 돌보는지. 사실 우리가 할머니나 엄마 외에 노년 여성의 삶을 가까이 볼 일이 많지 않잖아. 더욱이 결혼을 하고 정상가족을 꾸리지 않는 여성의 경우는 더 보기 힘들지. 콘텐츠에서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래도 일상을 잘 꾸려 가는 모습을 찾고 싶었던 것 같아. 영화부터 시리즈, 책까지 곳곳을 살폈지만 내가 참고라도 해볼 만한 노년이 쉽게 보이질 않더라고.
넷플릭스 시리즈 <스파이가 된 남자>의 주인공은 호화로운 주택에 사는 은퇴한 백인 남성 교수이고, 그가 잠입한 샌프란시스코의 실버타운은 고가의 비용을 지불해야 입주할 수 있는 공간이야. “아, 내 노년은 저기엔 없겠구나” 싶어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았어.
‘그래, 여성 노년의 이야기를 찾자!’라는 마음으로 웃기지만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을 봤어. 물론 참 바르다스러운 작품이었지만, 여기서도 내 모습을 겹쳐볼 만한 구석을 찾지 못했어. 물론 그에게 작품은 곧 삶이지만, 80대 노년 여성으로서의 바르다가 아니라 그가 그동안 만들어 온 작품들이 주인공이었지. 애초에 나이듦, 노년의 삶을 주제로 한 콘텐츠도 많이 없거니와, 있더라도 <플랜75>처럼 죽음을 이야기하거나 <아무르>처럼 치매 같은 질병에 초점이 맞춰진 경우가 많았어. 물론 나이듦과 질병, 죽음을 온전히 분리할 순 없겠지만 나는 그냥 노년의 일상을 보고 싶었어. 다들 어떻게 하루를 보내나요? 묻고 싶었어.
그렇게 찾아 헤매던 모습을 영화 <두 사람>에서 보았어. <두 사람>은 40여 년 전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와 서로를 만난 두 여성, 수현과 인선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야. 영화가 끝나고 감독님과 수현, 인선이 참석하는 GV가 있다길래 정말 오랜만에 인디스페이스에 갔어.
영화가 시작되고 흐르는 두 사람의 일상이 너무 별 다를 것이 없어서, 눈물이 났어. 영화를 보면서도 수현, 인선과의 GV를 들으면서도 놀랄 만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 ㅋㅋㅋㅠ 이런 게 보고 싶었나 봐. 두 사람이 함께 밥을 차려먹고, 전구를 갈고, 병원에 가고, 교회에 가고, 책을 쓰고, 시위에서 목소리를 내고, 춤을 추는 일상. 70대 레즈비언의 삶을 볼 일이 없었으니까.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게 생각보다 큰 희망과 용기가 되는 것 같아. 저게 비록 한국이 아닌 독일에서의 일이더라도, 나의 미래가 될 수는 없더라도 지구 어딘가에는 우리와 닮은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한국에서는 퀴어의 삶과 투쟁, 고통, 죽음, 우울을 뗄 수가 없잖아. 그저 일상적 삶에도 저항이 있고, 법적 혼인은 불가한 현실이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저런 미래이자 현재를 보고 싶었던 것 같아. 그냥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반박지은 감독이 두 주인공을 만나기까지의 이야기도 흥미로워.
"(꼬꼬무 톤으로) 이 영화를 시작시킨 건
2017년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이 사진 한 장."
사진엔 나치에 의해 희생된 동성애자를 위한 베를린 추모비 앞에서 손잡고 서 있는 두 사람이 있어. 반박지은 감독은 이 사진을 보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그들을 찾아갔다고 해. 영화 속 너무나 사랑스러운 두 분을 보면서 이 영화의 감독은 정말 두 주인공을 만나고 “이건 됐다” 생각했겠구나 싶었어. 또 감독이 그렇게 이 두 분의 매력을 기대었기에 과도하게 이 두 분을 대상화하거나 이들의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두 사람'의 현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
영화가 끝나고 줌으로 연결된 화면에 등장한 수현과 인선의 모습도 무척 사랑스러웠는데. 관객들을 만난다고 해서인지 멀끔한 차림으로 나란히 앉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은 처음 봤으면서도 무척 반갑고 따뜻한 순간이었어.
GV에선 해외로 가 자신의 애인과 사는 데 생길 어려움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질문에 ‘아, 어렵다’며 나중에 찾아와 이야기해 보라는 다정한 노련함과, ‘우리는 서로 등에 로션 발라주고 이런 게 섹스다’라는 노년 농담을 건네는 두 분을 보며 ‘아 저렇게 세월을 지난 뒤 담담함과 유머를 갖춘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오랜만에… 롤 모델(?) 같은 어른을 만난 기분.
‘70대 노년의 삶도 지금과 별 다를 바 없구나’ 하는 감상과 안심엔 분명 비약이 있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을 보며 노년을 조금은 덜 겁내게 되었어. <두 사람>의 영어 제목은 <Life Unrehearsed>. 저 두 사람도 아무 리허설 없이, 어쩌면 나보다 더 선례를 보지 못한 채 뚜벅뚜벅 살다 보니 70대가 되었고, 나처럼 두 사람을 보며 안심하거나 미래를 조금 기대하게 되는 사람을 보면 얼떨떨해 할 수 있겠지. 나도 계속 살아 있다면 70대를 마주하겠고, 그때도 아마 크게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은, 그냥 나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두 사람처럼 계속 세상과 접촉하고 선뜻 타인을 환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3월 대학원 개강을 앞두고 있어. 과거 너의 편지에서 ‘멋쟁이 대학원생이 될’이라는 문구를 보았었는데, 예언처럼 진짜 그렇게 되어버렸다! 미래라고만 여기던 것이 갑자기 현재가 된 게 얼떨떨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진 모르겠지만 벅뚜벅뚜 걸어가 볼게. 그렇게 현재를 차곡차곡 쌓다 보면 지금은 먼 것 같아 보이는 시간도 다가오겠지. 날이 많이 따뜻해졌다. 3월의 날씨는 참 무언가 시작하고 싶게 만드는 것 같아. 두려움보단 설레임으로 3월을 보내보자고.
곧 다시 만나. 안녕!
FRO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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