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레터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 한 번 없이 흐느낌으로

2025.0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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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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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모모

평화와 서로 배움의 이야기, 피스모모의 이야기를 전해요. (피스모모 평화/교육연구소, 피스모모 평화페미니즘연구소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구독을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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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 베스트 셀러가 놓여있는 평대도 살펴보지만 저는 굳이굳이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책을 찾아 서가를 한참 둘러보고는 합니다. 그러다 이 책을 발견했어요. 제목은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 한 번 없이 흐느낌으로>입니다. 

제목이 이미 저를 사로잡았어요. 살짝 살펴보니 소설가 네빌 슈트(Nevil Shute)의 소설 <해변에서(On the beach)>를 희곡으로 각색한 것이더라고요. 총 3막 2장으로 구성된 이 희곡은 1년간의 핵전쟁이 끝난 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의 호주 멜버른을 배경으로 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핵전쟁으로 북반구의 모든 인류가 사망하고, 그 어떤 생존신호도 잡히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어요. 북반구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멜버른을 향하고 있고, 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방사능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에 놓여 있는 거죠. 극 중, 한 인물이 말합니다. “(바람이) 얼른 불어와서 다 죽여버리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예요.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방사능으로 오염되어가는 세계에서도 아기들은 태어나고, 그 아이와 뛰어놀 정원을 필사적으로 가꾸는 엄마는 아이가 아프다는 걸 알지만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3천병의 와인을 6개월 안에 다 마셔야 한다며 최선을 다해 술을 마시던 아저씨는 와인과 함께 끝을 맞이하고, 해군들 중 일부는 잠수정을 몰고 바다에 나가 그대로 가라앉기를 선택합니다. 이 희곡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 한 번 없이 흐느낌으로 


이 희곡을 읽으며 흐느낌으로 끝나가는 세상과 쾅 소리로 끝나버린 세상을 동시에 떠올렸습니다. 북반구에서 일어난 핵전쟁으로 삶이 끝난 이들은 흐느낄 새 없이 쾅 소리 한 번에 삶을 마감한 경우도 있었을 거예요. 핵전쟁이 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설정이니 그 1년동안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80년전 오늘과 리틀 보이

 

모모레터를 준비하는 오늘의 날짜는 2025년 8월 6일입니다. 정확히 80년 전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난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는 상공 580미터에서 인류 최초의 실전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투하했습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는 약 34만명으로 추정되는데, 투하 직후 7~8만명이 즉사했고 1945년 말까지 최대 16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 원자폭탄의 그 끔찍한 결과를 본 후에도, 미국은 8월 9일 나가사키에 또 하나의 원자폭탄 ‘팻맨(Fat Man)’을 떨어뜨립니다. 전쟁에 항복하지 않는 일본을 항복시키겠다는 것이 이유였지요. 원래 고쿠라에 떨어뜨릴 예정이었으나 기상악화로 목표지점을 변경했다고 해요. 나가사키에서도 폭탄 투하 직후, 최대 7만5천명이 즉사했으며, 1945년 말까지 최대 8만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원폭을 직접 경험했던 작가 나카자와 케이지는 <맨발의 겐>이라는 만화를 통해 그 참담함과 민간인들을 전쟁으로 떠모는 국가의 허상과 정치인들의 무책임을 비판하기도 했어요. 

80년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으로부터 인류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이 세계는 괴이한 선택을 합니다. 원자폭탄을 두 번 썼더니 일본이 항복하더라. 아, 역시 더 강한 무기를 가지는 것이 최선이구나. 이로부터 ‘핵억지(nuclear deterrence)’라는 개념이 출현하기 시작하지요. 이른바 ‘핵 억지’라는 말로 포장된 이 믿음은, 공포를 평화의 수단으로 바꾸려는 위험한 발상이었습니다. 상대가 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전쟁을 억제한다는 억지의 논리는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냉전의 시대를 열었어요. 

핵억지의 논리는 일견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핵억지가 전제하는 것은 수십만명 또는 수백만명의 목숨입니다. 국가가 자국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적(敵)'이라 전제된 국가와 도박을 벌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왜냐고요? 핵억지를 통해 공포에 의한 세력균형이 맞춰질 것이라는 믿음은 모든 행위자가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의사결정과정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억지스러운 핵억지far-fetched nuclear deterrence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는 핵억지 이론의 핵심 개념입니다. 한 국가가 핵공격을 감행할 경우 상대국 역시 핵으로 보복하여 양국 모두가 파괴되므로, 어떤 국가도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는데요. 이 이론은 핵무기의 존재 자체가 전쟁 억제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일견 설득력을 가지지만, 현실적으로는 여러 중대한 결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핵억지 이론은 완전한 정보와 합리적 판단을 전제로 합니다. 억지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려면 모든 핵 보유국의 지도자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국제정치의 환경은 이와 다릅니다. 오판, 실수, 기술적 결함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으며, 위기 상황에서는 정보의 왜곡과 판단 착오가 더욱 빈번해집니다. 

채텀 하우스(Chatham House)의 보고서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억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놀라운 일이 없으며, 대립하는 각 측이 상대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고, 지도자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할 때에만 작동한다. 이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환상의 세계이다.(p.9)'

둘째, 핵억지는 2차 타격 능력의 기술적 안정성에 의존하고 있으나, 현대 군사기술은 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핵억지의 핵심은 핵공격을 당하더라도 상대국에 치명적인 보복을 가할 수 있는 ‘2차 타격 능력(second-strike capability)’입니다. 하지만 사이버전과 전자전 기술의 발달은 이 같은 능력을 사전에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발사의 왼편(Left-of-Launch)’로 불리는 전술은, 미사일이 발사되기 이전 단계에서 사이버 공격을 통해 미사일의 구성 요소를 파괴하거나 지휘통제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적 변화는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use it or lose it)’는 심리적 압박을 초래하여, 오히려 핵무기의 선제 사용(first-use)을 유도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호확증파괴에 기반한 핵억지 이론은 현실 세계에서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억지 체계로 기능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실수, 정보의 불완전성, 그리고 기술적 불확실성은 억지 체계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며, 이는 단순한 이론적 한계를 넘어 전 지구적 재앙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구조적 위험으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핵억지를 안정된 평화 유지 수단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근본적인 불안정성과 위태로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미 벌어진 이 상황에서 핵무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국가들이 나오긴 어렵겠지요. 우크라이나 사례를 봐라, 핵은 포기하면 안된다는 입장도 더욱 강해지고 있고요. 조선(DPRK)이 핵무력을 완성했으니 이제 한국의 차례라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꽤 계신 것 같습니다. 신뢰여부에 대한 판단은 열어두더라도, 관련한 여러 설문조사도 있고요. 얼마 전에 만났던 청년분들도 전체 참여인원의 절반 정도가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하여, 도달하고 싶은 세계

핵무장이 마치 새로운 전자기기를 하나 구매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이야기되는 시대에 인류가 살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이란의 핵시설을 직접 타격했고, 러시아는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신무기 실험에 나섰습니다. 핵군비경쟁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되었고, 실현된 현실입니다. 핵무기 체계의 확장과 더불어, 인공지능, 자동화, 사이버전, 우주 군사화 등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불확실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상황이에요. 대체 이렇게 해서 도달하고 싶은 세계는 어떤 모습이지요? 인류는 어떤 세계를 만들어 왔고, 만들어가고자 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통합되고 자동화되는 세계에서 한 번의 오류는 더욱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이제 핵이라는 단어는 그다지 감흥을 주지 않게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해요. 핵무기는 매우 일상적인 존재로 그 파괴력에 이미 무감해져서 핵인싸, 핵꿀잼처럼 일상의 언어가 되어버렸거든요. 이 익숙함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요즘입니다. 

아직 핵비확산체제는 무너지지 않았고, 과거의 성공 경험도 있습니다. 냉전 이후 미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일련의 군축 협정은 실제로 수만 기에 달하는 핵탄두를 제거하는 성과를 냈으니까요. 이는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핵무기 감축이 실현 가능한 목표임을 통계적으로 입증하는 사례입니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한 여정은 이상적이기만 한 비현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곰팡이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기체가 얽혀 살아가는 세계에서 적을 향한 무기가 자신을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허술한 믿음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요? 

핵폭탄의 쾅 소리 속에서 또는 그 소리를 미처 듣기도 전에 생의 마지막을 맞았던, 고통의 한가운데,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흐느낌 속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았던 모든 존재들을 애도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죽이는 세계가 아니라 살리는 세계를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 80주년을 기억하며
2025년 8월 7일 피스모모 아영 드림 

 

추신.

희곡의 마지막 대사는 원작인 네빌 슈트의 소설 맨 첫 장에 담겼던 T.S. 엘리엇의 시 <텅 빈 사람(The Hollow Man)>의 일부입니다. 이 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1925년 발표되었다고 해요. 희곡에 각색되어 담긴 엘리엇의 시이자 마지막 대사를 붙여넣습니다. 


+

여기 마지막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듬어 찾는다
그러면서도 애써 말을 피한다 부어오른 이 강가에 모여서
이상과 현실 사이 동작과 행동 사이에 그늘이 드리운다
관념과 창조 사이 감정과 반응 사이에 그림자가 진다
욕망과 충동사이 잠재력과 존재 사이 본질과 그에서 파생된 것들 사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왕국은 그대들의 것, 그대의 삶은 그대의 것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쾅 소리 한 번 없이 흐느낌으로(Not with a bang but a whimper)

 

 

 

 

참고자료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 한 번 없이 흐느낌으로
21세기 미중 핵 안보 딜레마의 심화: 저비스의 핵억제와 안보 딜레마이론을 중심으로
Perpectives on Nuclear Deterrence in the 21st Century
Overlapping False Alarms: Reason for Concern?
Broken Arrows:How Many Nuclear Accidents Have we had?
Five myths of nuclear deterrence
북핵대응, 재래식 무기론 한계 vs 핵무장 땐 분쟁 가능성만 증가 
핵억지 이론을 통해 살펴 본 북한의 핵전략 
러 'MIRV 실험' vs 美 '트럼프 재집권'…핵 군비 경쟁 재현될까
The Hollow Men by T.S. El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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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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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ndlieb의 프로필 이미지

    kindlieb

    0
    4 months 전

    너무나 멋진글입니다! "해변에서"라는 작품을 더불어 핵의 극단성과 인간들의 이기성을 다시 인식시키시는 내용에 잠간이나 깊은 몰입을 선물받았어요~ 늘, 끊임없는 노력으로 다시 만나는 새세계로의 문을 만드시는 피스모모의 수고에 찬사를 보내며 마음 깊은곳으로부터의 축복을 보냅니다. 사랑해요~~~피스모모!! 커피보내려 낑낑대다 그냥 나갑니다. 돈쓰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ㅡ^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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