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스모모 북클럽 틈과 사이는 한 달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 둘러 앉아 함께 읽은 책들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지난 9월의 마지막 일요일, 북클럽 메이트 한 분이 말씀하셨어요.
“다들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요즘 사춘기마냥 혼란스러운 날들을 보냅니다. 이 세계의 폭력과 고통을 인식하면 끝도 없이 괴로운 마음이예요. 최근에 만난 친구들과 가자지구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 아파했는데, 그 다음 이야기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보톡스 같은 피부시술로 넘어가는 거예요. 저는 그런 순간들이 견딜 수 없게 느껴져요.”
그 분의 이야기에 다른 이들도 이야기를 보탰습니다. 이 세계의 고통에 연결되었다가 도망쳤다가 하면서 휘청휘청 산다고, 일상의 지리멸렬함으로부터 나의 무력감을 인정하다가도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숨을 크게 고르고 다시 직면하려 노력한다고요.
그 날 북클럽을 마치고 전쟁과여성영화제에 가서 <그라운드 제로로부터(From Ground Zero)>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일정이 좀처럼 맞지 않았어요. 이 영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각자의 시선에서 만든 단편영화 22편을 모아둔 영화입니다. 길게는 6분, 짧게는 3분 이내의 이야기들이 옴니버스로 펼쳐집니다. 모든 내용을 옮길 수 없지만 기억과 기록에 의지하여 몇 가지 장면들을 담아보아요.
#1
무너진 건물의 잔해위에서 두 소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 쪽이 네 방이었잖아. 여기가 부엌이지 않았어? 맞아, 저기 소파가 있었지. 어, 저기 너 침대커버가 보이는 것 같아!
#2
난민촌의 텐트에서 맞는 하루하루의 일상. 정갈하게 화장을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진하게 우려내기에 충분하지 않은 찻잎으로 싱거운 차를 끓여 마시고, 음식을 요리하는 주인공 여성, 네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장면 전환) 전쟁 이전에 살던 집을 찾아간 그는 다 무너졌을 줄 알았던 집이 폭격을 견디고 여전히 집의 형태로 남아있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뜨립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고양이는 그 집에 여전히 있었어요. 눈물 범벅인 얼굴로 고양이를 안고 얼굴을 부빕니다.
#3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 위에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잔해 사이를 살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한 편에는 무너진 건물에서 땔감을 찾기 위해 잔해를 뒤지는 사람이 있고, 멍하니 앉아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지켜보는 한 소녀가 있습니다. 그 소녀는 동생을 찾는 사람의 조카입니다. 동생을 찾는 사람은 아이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넘겨주며 아빠가 혹시 전화를 받을 수도 있으니 계속 전화를 걸어보라고, 아빠가 받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잠시 후, 소녀가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화를 걸던 폰의 배터리가 다되어 전화가 끊어집니다. 동생이 전화를 받았다는 소식에 땔감을 걷어가던 청년에게 잔해를 함께 들추자고 요청하지만 맨손으로 들어낼 수 없는 거대한 잔해 앞에서 소녀가 울기 시작하고 내일 다시 아빠를 찾으러 오자며 달래는 목소리와 함께 영화는 끝납니다.
#4
가자지구에 면한 해변에 모여 지중해의 파도를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바다를 비추는 화면에 들려오는 나레이션. 바다가 없었다면 어쩔 뻔 했나. 바다가 있어 너무 다행이다.
#5
전쟁을 겪어왔지만 이런 전쟁은 처음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어요.
#6
밤이 오면 너무 무서워서 얼른 아침이 왔으면 좋겠고, 아침이 오면 하루가 빨리 지나가도록 밤이 왔으면 좋겠어요.
#7
집을 떠나면서 책장을 살펴보았어요. 몇 권 챙길까 하다가 책이 너무 무거워 챙겨오지 않았어요. 곧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아, 꼭 책 속에 갇혀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책을 챙겨오지 않아서 나는 책 속에 갇힌 것일까? 왜 책이 무겁다고 생각했을까, 전쟁보다 무거운 것이 이 세상에 있을까?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말 그대로 ‘0점’을 말합니다. 핵폭탄이나 대규모 폭발이 있었던 지표의 중심점을 의미하는 군사용어로, 특히 공중 폭발이 발생했을 때 폭발의 바로 아래 지점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2001년 미국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린 그 자리를 그라운드 제로라고 부르고, 1945년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그 자리도 그라운드 제로라고 불립니다. 가자 지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0점’을 갱신하는 곳입니다. 폭발로 인해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의 이름, 그라운드 제로.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8
I say no to despair.
한 감독은 전쟁 중에도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상에 담고 싶어했어요. 혹시 노래하는 사람들 없을까? 투쟁에 대한 이야기들 아닌 이야기를 담고 싶어. 수소문 끝에 찾아낸 한 무리의 사람들, 이들은 작은 타악기를 연주하며 둘러 앉아 노래를 부릅니다. 악기 소리가 들리자마자 동네의 아이들이 달려와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감독은 말했습니다.
“내가 담고 싶은 모습은 이것이었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I say no to despair.”
영화엔 ‘나는 절망을 거부한다’고 번역되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번역했으면 해요.
“나는 절망을 거절한다.”
절망에게 내 삶의 시간, 그 어떤 자리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그 이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렇지, 그라운드 제로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곳임과 동시에 다시 시작하는 곳의 이름이구나.
곧 추석연휴가 시작됩니다.
이 모모레터에 추석인사를 함께 담겠다고 동료들에게 약속했는데요. 이 레터가 명절인사를 충분히 담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여러 번 쓰고 지웠습니다. 하지만 휘청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삶인 것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평안한 명절이 됨과 동시에, 이 세계의 고통을 기억하며, 모든 이들의 평화와 안녕을 풍성하게 염원하는 명절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기를 바라며,
2025년 10월 2일
피스모모 아영 드림
참고자료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1221092.html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171.html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73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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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mnhehe
아영의 뉴스레터 잘 받았습니다. 추석을 맞아 가족들을 아주 조금 더 만나면서도, 전쟁의 상황들이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절망을 거절하며…
아영
다정한 댓글 감사해요. 절망을 거절하는 힘들이 연결되고 또 확장되는 날들이기를 바랍니다. 소중한 분들과 따스한 명절 보내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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