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가 바다에서 영국을 제압한 방법

생선 때문에 일어난 싸움, '대구 전쟁'에 대해 알아 봅니다

2024.05.19 | 조회 1.0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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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노트

당신의 삶에 양념 같은 지식을!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할 때 '그런 것'들을 전해 드립니다.

주변 강대국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가 이에 대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영국과 아이슬란드의 체급 차이는 분명해 보이는데, 재밌게도 두 나라의 갈등에선 아이슬란드가 영국을 세 차례나 이긴 역사가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어업 구역을 둘러싼 이 싸움을, 이 구역에서 나는 대표적인 생선의 이름을 따 '대구 전쟁(Cod war)'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전쟁은 아니지만 냉전을 뜻하는 'Cold war'와의 발음 유사성 때문에 이 명칭이 굳은 듯 합니다. '세계사에 이상한 일이 있을 때 영국을 찍으면 대충 맞는다'라는 밈이 있을 정도로 다른 나라를 힘으로 눌러 버린 역사가 많은 영국이, 어째서 아이슬란드에게는 계속해서 양보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아이슬란드에게 어업은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추운 데다 화산 활동의 영향으로 농사가 쉽지 않아 식량을 상당 부분 수산물에 의존해야 합니다. 생선은 그들의 밥이면서 동시에 밥줄이기도 한데, 산업 다각화에 성공한 2011년 기준으로 보아도 어업이 아이슬란드 GDP의 27%를 차지합니다.

대구는 유럽인들이 사랑하는 생선입니다. 워낙 흔하게 잡히고 흔하게 먹어서 '바다의 빵'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입니다. 유럽 배들은 대구를 잡기 위해 때로 대서양까지 진출합니다. 1414년에 이미 영국 배들이 아이슬란드 인근 해역까지 진출해 대구를 잡는 것에 대해 덴마크 왕이 불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당시 아이슬란드는 덴마크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증기 기관이 발달하고 난 뒤에는('발명'이라 적지 않은 이유) 유럽 배들이 아이슬란드 해역을 드나드는 일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특히 거리가 가까운 '피쉬 앤 칩스'의 나라 영국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덴마크와 영국은 첨예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 1901년 아이슬란드 주변 3해리(약 6km)를 아이슬란드의 어업 구역으로 인정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1893년 덴마크가 주장한 어업 구역이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 주변 50해리(약 93km)였단 점을 생각하면 덴마크 입장에선 분한 결정이었습니다.

1944년 아이슬란드는 덴마크로부터 독립합니다. 새로 탄생한 아이슬란드에게 어업 사수는 국가적 과업이었습니다. 눈치를 보다 1958년, 아이슬란드는 과감하게 아이슬란드 주변 12해리(약 22km)를 어업 구역으로 주장해 1차 대구 전쟁이 일어납니다. 영국은 어선들에 군함을 호위로 붙여 가면서 대구잡이를 강행했지만 아이슬란드도 위협사격을 불사하며 맞섰습니다. 아이슬란드는 12해리의 수역을 사수하지 못한다면 NATO 가입을 철회하고 아이슬란드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1961년 영국 정부는 12해리를 인정하며 물러섭니다. 대신 아이슬란드가 나중에 딴소리 할 수 없도록, 분쟁이 다시 발생하면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받는다는 조약도 달아두었습니다.

하지만 고작 11년 뒤인 1972년, 아이슬란드의 좌파 정당이 집권하면서 이전 정권이 맺은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50해리를 주장해 2차 대구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에 영국 뿐만 아니라 서독, 벨기에 등 유럽 국가들이 반발했지만 이번에도 아이슬란드는 NATO 탈퇴와 국교 단절을 무기로 내세웁니다. 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아이슬란드의 좌파 정부가 소련 쪽에 붙는다면 소련이 대서양을 마음대로 오갈 수도 있었습니다. 냉전이 한창이었던 이 시기에 대서양 국가들은 다시 한 번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1975년, 3차 대구 전쟁이 일어납니다. 석유 파동으로 인해 세계 경제가 무너지고 있던 때, 아이슬란드도 50%가 넘는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경제가 파탄나고 있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돌파구는 어업 구역을 아이슬란드 주변 200해리(약 370km)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번에도 영국이 반발해 양국의 선박 간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슬란드는 다시 한 번 NATO 탈퇴를 시사했고 1976년엔 정말로 영국과 국교 단절까지 감행합니다. 아이슬란드는 영국에 본격적으로 맞설 생각으로 미국에 고속정 판매를 요청했습니다. 미국은 영국과의 싸움에 무기를 팔기엔 입장이 곤란했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러자 아이슬란드는 '미국이 안 팔면 소련으로부터 고속정을 사오겠다'라는 초강수를 둡니다. 다시 한 번 간담이 서늘해진 NATO가 중재에 나섰고 결국 아이슬란드는 200해리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세계 각국이 각국 해안으로부터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게 됩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 역시 이와 관련하여 종종 일본, 중국과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대구 전쟁'은 이렇게 제대로 된 전쟁 한 번 겪어 본 적 없는 역사를 가진 아이슬란드가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했던 영국을 바다에서 세 차례나 제압해 버리는 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싸움을 잘해야만 싸움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같이 볼 링크

유튜브 지식해적단 채널, 💀 생선때문에 전쟁 날 뻔함;; / 💀 대구전쟁! 영국vs아이슬란드
영문 위키피디아, Cod Wars
나무위키, 대구 전쟁
영문 위키피디아, Economy of Iceland
나무위키, 아이슬란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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