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할 때마다 매번 맵이 달라지는 경우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절차적 생성'이라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수많은 맵을 만들어 놓는 대신 규칙과 재료만 미리 준비해 두고 그때그때 우연에 맡겨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발상이 게임이 아니라 시집으로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의 'Cent mille milliards de poèmes', 우리말로 옮기면 '100조 편의 시'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열 편의 소네트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얇은 시집입니다. 하지만 소네트의 14개 행이 가로 띠처럼 잘려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독자는 행 별로 다른 페이지를 펼쳐서 첫 번째 행은 첫 번째 소네트에서, 두 번째 행은 일곱 번째 소네트에서, 세 번째 행은 네 번째 소네트에서 고르는 식으로 섞어 읽을 수 있습니다. 열 편의 소네트는 같은 운율 구조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골라도 소네트 형식을 유지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능한 시의 수는 10편이 아니라 10의 14제곱입니다. 14개의 행에 10개의 선택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1 뒤에 0이 14개면 100,000,000,000,000편, 무려 100조 편입니다. 한 편 읽는 데 1분 씩 24시간 쉬지 않고 읽어도 약 1억 9천만 년이 걸립니다. 10쪽짜리 책으로 2억 년을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5억 년 버튼을 누를 일이 생기신다면 기억해 두세요.
비슷한 장난은 음악에도 있었습니다. 18세기 유럽에는 Musikalisches Würfelspiel, 즉 음악 주사위 게임이 유행했습니다. 미리 써 둔 짧은 마디들을 표로 만들어 놓고,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에 따라 마디를 골라 이어 붙이는 방식입니다. 이런 절차적 생성 음악을 만든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모차르트일 것입니다. 모차르트의 'KV 516f'를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곡은 1116×616 = 129,629,238,163,050,258,624,287,932,416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저는 '로크라이크'라는 게임 장르를 좋아합니다. 로그라이크 게임에선 매번 탐색하고 도전해야 할 대상이 무작위 요소에 의해 재구성됩니다. 그래서 잘 설계된 로그라이크 게임은 판마다 새로운 게임을 하는 것 같은 짜릿함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설계가 잘못될 경우, 지난번엔 왼쪽에 있었던 나무가 이번엔 오른쪽에 있을 뿐인 매 판 지루한 게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앞서 5억 년 버튼을 누를 일이 있다면 100조 편의 시를 기억하시라고 농담을 던져 보았는데요. 100조 편의 시라고는 하지만 결국 시행은 140개. 과연 140개의 시행으로 만들어진 100조 편의 시들이 매번 신선하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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