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라는 작품 아시나요? 제가 어렸을 때는 오타쿠가 아니어도 제목은 들어봤을 법한 작품이었습니다. 저 역시 이 작품을 본 적이 없습니다만 워낙 유명했어서 하루히의 얼굴은 바로 알아봅니다. 하지만 요즘 어린 오타쿠들은 이 작품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세대 차이가 느껴져 슬펐습니다.
이 작품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11년, 익명의 하루히 팬이 '초순열(superpermutation)'에 관한 난제를 아무렇지 않게 풀어버린 것입니다. 아직도 익명으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아마 자기가 푼 줄도 모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먼저 초순열이 뭔지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1, 2, 3이라는 세 숫자를 모든 가능한 순서로 배열하려면 123, 132, 213, 231, 312, 321, 총 6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초순열은 이 모든 순서를 한 번씩 포함하는 수열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123121321이라는 9자리 수열 안에는 위의 6가지 순열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애니메이션 판은 방영 순서가 뒤죽박죽이라는 재밌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각 에피소드의 방영 순서가 원작의 순서, 작품 내 시간 순서로 되어 있지 않아 에피소드들을 어떤 순서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능한 모든 맛을 다 느끼고 싶은 게 당연한 팬의 마음이겠죠. 인터넷 커뮤니티 '4chan'의 한 유저는 14화로 구성된 애니메이션 1기를 가능한 모든 순서로 보려면 최소 몇 화를 봐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올렸습니다.
이건 14개의 항에 대한 초순열의 최소 길이를 구하는 문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항이 3개일 때에는 초순열의 최소 길이가 9입니다. 하지만 항의 개수가 조금만 늘어나도 난제가 됩니다. 항이 5개일 때에는 최소 길이가 153이고, 항이 6개일 때부터는 답이 없습니다. 어느 길이가 최소라고 증명된 바도 없고, 찾아낼 수 있는 패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한 익명 유저가, n개의 에피소드가 있을 때 최소한 n! + (n-1)! + (n-2)! + n - 3 개의 에피소드는 봐야 한다는 것을 뚝딱 증명해 버렸습니다. 초순열의 길이의 하한을 구한 것입니다. 초순열의 길이의 하한은 당시 수학계에도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어느 수학자도 이 증명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증명은 그냥 그렇게 4chan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 뒤에, 로빈 휴스턴이라는 수학자가 이 증명을 우연히 찾아냅니다. 휴스턴은 깜짝 놀라는데, 마침 초순열의 최소 길이의 상한이 n! + (n-1)! + (n-2)! + (n-3)! + n - 3이라는 그레그 이건의 증명을 보았었기 때문입니다. 즉 초순열의 최소 길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n! + (n-1)! + (n-2)! + n - 3 이상이고 n! + (n-1)! + (n-2)! + (n-3)! + n - 3이하라는 것은 알게 된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n이 14일 때를 계산해 보면 93,884,313,611개 이상 93,924,230,411개 이하의 에피소드를 봐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약 430만 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휴스턴은 동료들과 이 익명의 하루히 팬의 증명을 수학적인 용어로 가다듬고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 논문의 1 저자는 '익명의 4chan 유저'입니다.
이런 식으로 얼떨결에 난제를 풀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미국 수학자 조지 댄치그의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1939년 박사과정 중 그는 어느 날 수업에 늦게 들어갔습니다. 칠판에는 과제로 두 문제가 적혀 있었습니다. 문제가 평소보다 더 어려워서 댄치그는 조금 늦게 과제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과제를 받은 네이만 교수가 깜짝 놀랍니다. 칠판에 적혀 있던 것은 사실 과제가 아니라 네이만 교수가 소개 중이던 통계학 미해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즉 댄치그가 풀어버린 것은 박사과정생의 과제가 아니라 인류의 과제였습니다. 이 일화는 훗날 영화 '굿 윌 헌팅'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수학자 G.H. 하디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친구인 유전학자 레지널드 퍼넷과 식사를 하는데, 퍼넷이 강의 도중 율이라는 통계학자에게 받은 질문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단지증은 우성형질이니까, 세대가 지날수록 단지증인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나요?" 퍼넷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왜 그런지 설명하기가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디는 그 얘기를 듣고 "중학생도 풀겠다"라며 냅킨에 간단한 식을 적습니다.
식을 본 퍼넷은 깜짝 놀라 하디에게 논문으로 발표하라고 했지만 하디는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하디는 본인이 순수 수학자임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 문제는 유전학의 문제인 데다 너무 쉬워서 논문을 쓸 수준도 되지 않는다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잔뜩 귀찮아 하며 A4용지 한 장짜리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 한 장짜리 논문은 훗날 유전학의 F=ma로 불리게 됩니다.
애니메이션 감상이든, 지각한 수업의 과제든, 친구의 고민이든, 매사 '그런 거 알아서 뭐해'하고 시큰둥해 할 게 아니라 관심을 가져볼 일입니다. 작은 호기심이 난제를 해결할지도 모르니 늘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어쩌면 다음 전설은 구독자 님일지도 모릅니다. 구독자 님만 모르고 있을 뿐, 이미 전설일 수도 있고요.
더 알아보기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감상하는 순서를 소개한 블로그 글
Wikipedia, Superpermutation
Anonymous 4chan Poster, Robin Houston, Jay Pantone, and Vince Vatter, A lower bound on the length of the shortest superpattern
하루히 문제를 풀어버린 4chan 스레드의 아카이브
StackExchange, Dantzig's unsolved homework problems
나무위키, 하디-바인베르크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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