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국내 저자의 논문을 한 편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철학과 박성수 교수님의 “밤비 문장에 대한 화용론적 해석에 대한 옹호”입니다. 일단 밤비 문장이 무엇이고 왜 밤비 문장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될까요?
(1) 만약 어떤 아이가 ‘밤비’라고 이름지어진다면, 디즈니는 밤비의 부모를 고소할 것이다.
위의 문장의 후건에서 ‘밤비’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나요? 철학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도, 우리는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특정 대상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라고 이야기할 때, 저는 특정한 인물, 즉 세종대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의 예문에서 ‘밤비’는 특정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일부 철학자들은 이름이 마치 대명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변항주의를 주장합니다. 즉, (1)의 문장은 “만약 어떤 아이가 ‘밤비’라고 이름지어진다면, 디즈니는 그의 부모님을 고소할 것이다.” 이들은 위와 같은 ‘밤비 문장들’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저자인 박성수 교수는 변항주의에 대한 반론을 제시합니다.
이름에 대한 표준적 견해
우선 변항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이름에 대한 주류 이론을 좀 더 알아봅시다. 많은 철학자들이 받아들이는 이름에 대한 표준적 견해는 이름이 의미론적으로 상수(constant)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름은 문장에서 맥락이나 화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특정한 일물을 지시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2) 소크라테스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이다.
(3) 소크라테스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아닐 수 있었다.
직관적으로 (2)와 (3)이 둘 다 참인 것 같습니다. (2)가 참인 이유는 당연히 우리 세계에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이름이 ‘소크라테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3)이 참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대철학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판단할 때, 그러한 가능 세계가 있는지를 고려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소크라테스’가 아닌 가능세계가 있다면, (3)은 참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소크라테스’가 아닌 세계는 대체 어떤 세계일까요? 솔 크립키는 (3)과 같은 문장을 고려할 때 우리가 우리 세계의 바로 그 소크라테스가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세계를 상상한다고 말합니다. 즉 (3)에서 사용된 이름 ‘소크라테스’는 어떤 세계에서든 소크라테스를 지시합니다.
표준적 이해에 대한 반론: 변항주의
변항주의자들은 위의 표준적 견해에 반대합니다. 변항주의는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마치 대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이 그런 것처럼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핵심 근거가 바로 밤비 문장입니다.
(1)에서 후건의 ‘밤비’는 전건의 ‘어떤 아이’에 속박된 것처럼 읽힙니다. 즉, 문장 전체의 의미는 ‘밤비라고 이름이 붙여진 모든 아이의 부모를 디즈니가 고소할 것이다’로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밤비라는 특정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변항주의자들은 이렇게 이름이 속박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고, 심지어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이름이 의미론적으로 대명사 – 즉, 변항으로 기능한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논증 정리>
P1) 밤비 문장에서 이름은 의미론적으로 속박되어 사용된다
P2) 대명사는 의미론적으로 속박되어 사용된다.
P3) 이름과 대명사에는 의미론적 유사성이 있다. [P1과 P3에 의해]
P4) 대명사는 의미론적으로 변항으로 분석된다.
C) 이름은 의미론적으로 변항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박성수 교수의 반론
박성수 교수는 이 추론에 핵심적인 간격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밤비 문장에서 이름이 변항처럼 해석된다는 것과, 이름이 의미론적으로 변항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저자는 묶인 해석이 의미론이 아닌 화용론, 즉 언어 사용의 맥락과 관습에서 비롯된 것임을 논증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취소가능성 검사(cancellability test)입니다. 어떤 내용이 문장의 의미론적 내용이라면, 그것을 부정할 때 모순이 발생합니다. “철수는 총각이지만 결혼했다”가 모순인 것처럼요. 반면 화용론적 내용은 모순 없이 취소될 수 있습니다. 바로 아래와 같이 말입니다.
(4) 철수와 영희는 약혼한 상태이다.
(4C) 철수와 영희는 약혼한 상태이지만, 서로와 약혼한 상태는 아니다.
(4)를 읽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철수와 영희가 서로와 약혼한 상태라고 해석하게 되지만, 이것은 (4)의 의미론적 내용은 아닙니다. (4C)와 같이 그에 대한 부정을 덧붙이더라도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4)의 내용을 철수와 영희가 서로와 약혼한 상태라고 해석하는 것은 바로 화용론적인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밤비 문장의 경우는 어떨까요? 박성수 교수는 아래와 같은 말이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1C) 만약 어떤 아이가 ‘밤비’라고 이름지어진다면, 디즈니는 밤비의 부모를 고소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밤비’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아이의 부모님이 고소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 고소당하는 것은 내 이웃집 아이 밤비의 부모님이다. 누군가가 자기 아이에게 ‘밤비’라는 이름을 붙일 때마다 내 이웃집에 사는 밤비의 부모님이 고소를 당한다. 디즈니의 이러한 정책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어떤 화자가 (1C)와 같이 발화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화자가 디즈니의 정책을 오해하고 있거나, 상당히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C)에서는 “철수는 총각이지만 결혼했다”라고 할 때처럼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성수 교수는 이가 (1)에서 ‘밤비’를 마치 대명사처럼 해석하는 것이 (1)의 의미론적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반론의 여지?
변항주의자들은 여기서 반격할 수 있습니다. (1C)의 화자는 묶인 해석을 화용론적으로 취소한 것이 아니라, 이름을 변항이 아닌 지칭어로 사용했다는 것을 사후에 명료화한 것뿐이라고요. 이름은 화자의 의도에 따라 변항으로도, 지칭어로도 쓰일 수 있고, (1C)는 단지 '나는 밤비를 변항이 아닌 지칭어로 쓴 것이었다'는 의도를 밝힌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박성수 교수는 이 전략이 변항주의 자신을 무너뜨린다고 봅니다. 만약 이름의 묶인 사용 여부가 화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면, 이름을 대명사로 대체한 문장에서도 같은 패턴이 나타나야 합니다. 변항주의는 이름과 대명사가 의미론적으로 유사하다고 주장하니까요. 그러나 다음을 보십시오.
(1’) 만약 어떤 아이가 ‘밤비’라고 이름지어진다면, 디즈니는 그의 부모를 고소할 것이다.
(1C’) 만약 어떤 아이가 ‘밤비’라고 이름지어진다면, 디즈니는 그의 부모를 고소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밤비’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아이의 부모님이 고소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 고소당하는 것은 내 이웃집 아이 밤비의 부모님이다. 누군가가 자기 아이에게 ‘밤비’라는 이름을 붙일 때마다 내 이웃집에 사는 밤비의 부모님이 고소를 당한다. 디즈니의 이러한 정책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1C)와 달리 (1C’)는 모순처럼 읽힙니다. 왜 그럴까요?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대명사의 속박된 사용은 화자의 의도가 아닌 언어 관습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대명사가 부정관사구 옆에 놓이고 지시적 사용을 알리는 외적 신호—가리키는 손짓, 강조된 어조—가 없을 때, 그 대명사는 관습적으로 묶인 것으로 고정됩니다. 화자가 아무리 특정 개인을 가리키려 했더라도 말이죠. 이름은 이 점에서 대명사와 다릅니다. 이름은 화자의 의도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대명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이름의 속박된 사용을 화자의 의도로 설명하려는 변항주의의 전략은 이름과 대명사 사이의 근본적인 비유사성을 드러낼 뿐입니다. 변항주의가 그토록 주장하고자 했던 유사성과 정반대의 결론인 셈입니다.
결론
현대 언어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떠한 논의가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름의 경우가 아주 흔한 예시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학부 때 언어철학 강의를 처음 들으며 이름을 상수라고 주장한 솔 크립키의 이론이 이름에 대한 논쟁을 사실상 종결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은 고정 지시어이고, 가능세계를 넘나들며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그 그림은 너무나 직관적으로 옳아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이 과연 상수인지를 놓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변항주의자들은 크립키의 그림이 설명하지 못하는 사례들을 들고 나왔고, 박성수 교수와 같은 철학자들은 그 사례들이 실은 생각만큼 강력한 근거가 되지 못함을 보이려 합니다.
결국 이 논문은 변항주의를 무너뜨리는 논문이 아니라, 변항주의가 지금까지 너무 쉽게 기대어 왔던 근거 하나를 걷어내는 논문입니다. 밤비 문장이라는 직관적으로 호소력 있는 사례가 실은 화용론으로 충분히 설명된다면, 변항주의자들은 이름이 왜 상수가 아닌 변항이어야 하는지를 보다 정교한 논증으로 다시 설명해야 할 부담을 지게 됩니다. 이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언어철학에서 가장 오래된 물음 중 하나입니다. 끝난 줄 알았던 논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논쟁의 한복판에 한국인 철학자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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