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가장자리에서 던지는 주사위
-믿음,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해
갓난아기는 알지 못한다. 눈꺼풀에 들러붙는 잠이라는 녀석이 무엇인지.
사물이 흐릿해지면서 눈이 감기고, 몸의 무게감이 달라지며,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진다.
아기에게 잠은 그저 낯선 침입자이며 '내가 사라지는 경험'이다.
"지금 눈을 감으면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이 근원적인 공포가 울음으로 터져 나온다. 아기는 밤마다 작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은 밤마다 가장 원초적이고 무모한 도박을 감행해왔다.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스스로 의식을 차단하는. 우리는 그것을 잠이라 부르지만, 그것의 본질은 완벽하게 무방비한
상태로 세계에 자신을 내던지는 투항과도 같다. 우리는 내일 아침 해가 뜰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내가 잠든 사이 이 세계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미치지 않고 오늘 밤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세계가 안전할 것이라고 기꺼이
믿어버리고 잠이 든다.
철학의 오래된 질문이 보인다. 앎(Knowing)과 믿음(Believing)의 아득한 간극이다.
앎은 증명과 자명함의 세계다. 1 더하기 1이 2라는 사실 앞에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고,
하여 결단이나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반면 믿음은 증명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들,
그 컴컴한 심연 앞에서만 오로지 성립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 믿음은 ‘증거없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불확실성 속으로 몸을 던지는 일종의 도약(Leap)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도약의 동력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그토록 맹렬하게 무언가를 믿으려 하는가.
나는 '믿는다'는 동사 안에 숨겨진 결핍에서 질문에 대한 그 희미한 대답을 발견한다.
‘세계는 안전하다’는 문장은 객관적 서술이지만, ‘세계가 안전하다고 믿는다’고 말하는 순간
그 문장에는 화자의 욕망이 투영된다. 안전하기를 맹렬히 바라는 자만이 그것을 믿을 수 있
다. 즉, 믿음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주체의 욕망이다.그리고 이 욕망의 이면에는 깊은
공포가 있다.
인간이 어둠 속에서 신을 부르고, 내일의 안전을 믿기로 결단하는 이유는 세계가 완벽히
안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너무나 끔찍하게 위험하고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가 임계점을 넘을 때,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믿음'이라는 정교한 방패를 발명해낸다. 가장 강렬한 믿음은 언제나 가장 깊은
공포에서 탄생한다.
맹신과 광신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그 믿음이 깨졌을 때 마주해야 할 심연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다.
영어 단어 'believe(믿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영어 'belīefan'을 거쳐
인도유럽어 공통 어근인 'leubh-'에 가닿는다. 이 어근의 의미는 돌보다(to care),
욕망하다(to desire), 사랑하다(to love). 이 하나의 소리 덩어리에서 영어의 'love(사
랑)'와 'believe(믿다)', 그리고 독일어의 'Liebe(사랑)'와 'Glaube(믿음)'가 비롯됐다.
소리가 'leubh'에서 'love'로, 그리고 다시 'live(살다)'로 이어지는 궤적은 그저
우연이라기엔 다소 의미심장하다. 수천 년 전부터 인간에게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행위였던 것이다.
언어의 뿌리가 증명하듯, 믿음은 이성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는 감정적 투신이다. 우리는 세계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잠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believe는 언제나 love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가. 바로 이 정교한 방패를 잃어버린 자들이다.
세계의 위험성을 너무나 투명하게 직시해버린 나머지, 생존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기꺼이 속아주는 일'을 거부당한 육체들. 그들은 믿음이라는 마취제 없이, 삶의
불확실성이라는 거대한 공포를 맨얼굴로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불면은 수면의 실패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의 회로가 단락된 비극적 상태다. 결국 인간이 종교에 기대고,
이념에 투신하며, 과학의 영생을 갈망하는 모든 행위는 밤마다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투항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 났을 때 마주해야 할 삶의 무의미가 너무나 두렵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행 대상을 쥐고 눈을 감는다.
하여 믿음은 앎의 실패가 아니라, 공포를 이겨내고 기어이 살아가려는 자의 필사적인
안간힘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당신에게 무엇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무엇을 두려워하느냐는
질문이며, 동시에 무엇을 그토록 맹렬히 사랑하느냐는 질문이다.
살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해 믿음이라는 주사위를
던진다. 그것이 이 두렵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견뎌내는 인간의 유일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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