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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umanités의 세 가지 원칙

밀어서 입시 해제

입시(入詩)라는 서정시

서정시와 입시의 데칼코마니

2026.03.23 | 조회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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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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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쥐마니테 - 인문,예술 기반 입시 연구소

 

이장욱 시인은 과거 한국 시단의 관습을 향해 "서정성은 권위적이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을 던진 바 있습니다. 전통적 서정이 세계의 모든 사물을 시인의 내면으로 흡수해

단 하나의 의미와 위계를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폭포는 반드시 '숭고'해야 하고, 낙엽은

기어이 '쓸쓸'해야만 하는 식입니다.

 

놀랍게도 현재의 입시(入試) 시스템은 이 권위적 서정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수능 지문 속 프루스트의 '마들렌'은 더 이상 감각의 신비로운 조우가 아닙니다.

그것은 70분 안에 처리해야 할 정보이자, 일치하지 않는 지칭 대상을 찾기 위한 기능적 소재로

전락합니다. 시스템은 학생들의 문학적 감각을 거세하고, 문학을 정답이라는 단 하나의

지평으로 압축합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기 감각으로 세계를 읽을 권리, '서정'

박탈당하게 되는 거죠.

 

내파(Implosion): 서정의 끝에서 건져 올린 가능성

 

이장욱이 제시한 해법은 서정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정의 내부로 끝까지 내려가

그 권위 자체를 무너뜨리는 '내파(Implosion)'입니다. 외부에서의 파괴가 아니라,

관례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내부로부터 폭발시키는 갱신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가 제시하고자 하는 전유의 방법론과 일맥상통합니다.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2016)은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한 주를 따라갑니다.

매일 아침 615, 패터슨은 아내 로라 옆에서 눈을 뜹니다. 시리얼을 먹고, 버스 차고지로

출근하고, 하루 종일 버스를 몹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그레이트 폴스 앞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노트에 시를 씁니다. 퇴근 후엔 로라와 저녁을 먹고, 반려견 마빈과 동네를

산책하고, 단골 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일상은 반복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버스 안 승객들의 대화가 달라지고, 폭포에 내리는 빛이

달라지고, 술집 손님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이 보여주는 삶이 바로 이장욱 시인이 말하는

'내파된 서정'이 아닐까요? 그의 시는 거창하거나 숭고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일 무심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성냥갑, 아내의 우산, 아침 시리얼에 대해 씁니다. 그의 시는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물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 자신이 그것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합니다. 고정된 의미의 바깥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감각을 복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서정의 회복일 것입니다.

 

서사, 경영, 확신을 지탱하는 뿌리

 

우리는 흔히 자기 서사(Narrative)로 삶을 구성하고, 자기 경영(Management)으로 항로를

바꾸며, 자기 확신(Credo)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모두 목적지를

향한 역동적인 '운동'입니다.

반면 서정은 운동이 아니라 '현존'입니다. 매일매일 미세하게 달라지는 폭포의 빛을 감지하는

능력입니다. 서정 없이는 서사가 메마릅니다. 자기 감각을 잃은 서사는 결국 무미건조한

이력서가 될 뿐이고, 목적지만 남은 경영은 자신이 왜 이 항로를 선택했는지 망각하게 만듭니다.

서정은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입시(入試)가 입시(入詩)가 되는 순간

 

입시(入試: 시험에 들다)와 입시(入詩: 시에 들다). 발음은 같지만, 두 세계는 완벽히

이질적입니다. 전자는 전략과 등수의 현실이고, 후자는 낭만과 감성의 영역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패터슨을 보겠습니다. 그는 버스 기사이기를 포기하고 시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버스를 모는 행위와 시를 쓰는 행위는 그에게 동일한 세계입니다. 입시(入詩) 역시 입시(入試)

거부하고 도피하라는 정치적 선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서정의 감각을 지녔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541,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이 떠지는 찰나의 정적을 기억하는 것.

편의점 삼각김밥 포장지가 구겨지는 소리의 질감을 감지하는 것.

급식판에 밥을 남길 때쯤 창밖의 비가 그치고 있음을 눈치채는 것.

 

이러한 감각들은 점수가 되지도, 생기부에 기록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서정들이

살아있을 때 비로소 여러분의 서사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고, 여러분의 확신은 자신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 됩니다.

 

다시, 텅 빈 페이지

 

영화 후반부에 마빈이 패터슨의 노트를 물어뜯습니다. 패터슨은 크게 낙담합니다.

그때 낯선 일본인 시인이 나타나 빈 노트 한 권을 건네며 말합니다.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저는 이 장면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패터슨은 다음 날에도 똑같은 일상을 시작합니다. 버스를 몰고, 폭포 앞 벤치에 앉고,

새 노트를 펼칩니다. 그저 오늘 아침 아내가 새로 산 커튼이 창에 걸려 있었다는 것,

그것만 적습니다. 그의 얼굴은 무언가와 싸우는 사람의 얼굴이 아닙니다. 그냥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입니다. 어쩌면 서정성의 회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각이 사실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불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가 시를 다시 쓸 수 있었던 것처럼, 서정은 되찾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로 들어가실 건가요? 저는 패터슨이 새로 쓸 시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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