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28] 🥦 깊어지는 가을에 연말을 바라봅니다

반갑습니다, 콜리🥦입니다. 단풍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낙엽이 공중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떨어지고, 길가 한구석에는 솜이불처럼 쌓여 있네요. 햇볕도 달라졌어요. 여름날에는 태양을 피하려고 그늘을 찾아다녔지만 어느새 따스한 햇볕이 비치는 쪽을 골라 다니고 있습니다. 눈이 조금 부시더라도 포근한 햇볕이 나쁘지 않네요. 여러모로 산책하기 좋은 때입니다.

어느새 시월도 끝이 났습니다. 2023년이 두 달만을 남겨두고 있어요. PRIIISM이 두 번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이미 이야기 꺼낸 적 있는 것처럼, 연말이면 저는 나름의 송년 행사를 치릅니다. 그중 하나가 한 해 동안 함께해줘서 특별히 고마운 몇 사람들에게 엽서를 부치는 일인데요. 며칠 전 달력을 보다 올해 엽서를 누구한테 쓸지 슬슬 생각해야겠구나 싶더라고요.

구독자 님은 편지나 엽서를 쓰시나요? 제게 엽서 쓰는 일은 마음이 두 번 따뜻해지는 시간입니다. 글을 쓰려면 상대방과 내가 언제 어디서 뭘 함께 했는지 돌이켜봐야 하죠. 그러면서 한 번 마음이 따뜻해지고요. 잘 받았다는 회신을 받으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이 따뜻해지죠. 아직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만 올 연말은 편지나 엽서로 마음을 전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번 PRIIISM은 미리 띄우는 엽서로 꾸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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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ll Evans - Waltz For Debby

안녕? 언젠가 네가 이 편지를 볼 날이 있을까? 지금 나로선 그런 네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구나. 너는 이제 겨우 앞니가 났고(이가 나는 동안 많이 아프고 불편했는지 엄마, 아빠를 꽤나 힘들게 했고), 소파나 의자 같이 지지할 수 있는 물건이 있어야만 그걸 붙잡고 겨우 일어서며, 뭐든지 일단 입으로 집어넣고 보지만 막상 토마토나 요거트 같이 신맛 나는 음식은 몸서리를 칠 정도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말 그대로 아직 아기니까 말야. 글을 읽긴커녕 아직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걸!

그러나 불과 9개월이 흐르는 동안 너는 참 많이 성장했단다. 너무 큰 걸 샀나 고민했던 옷이 조금만 있으면 맞을 만큼 키가 컸으며, 어디론가 성큼성큼 기어가다가도 네 이름 석 자를 부르면 홱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할 만큼 보고 들을 줄 알고, 두 손으로 네 몸통을 잡고 공중으로 띄우면 연신 웃으며 즐거워 할 줄 알 정도로 자랐으니 말야(불편하면 금세 세상 잃은 듯 울상을 짓기도 하고). 너를 보면서 나는 미처 몰랐던 감정을 느끼고, 너에게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곤 해.

빌 에반스(Bill Evans)는 대표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야. <Waltz For Debby>는 빌 에반스가 조카 데비 에반스를 보고 만든 곡이라고 해. 명랑하고 어여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니? 네가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란다면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아주 많을 거야. 무엇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 사랑하는 삼촌이.

🥦 Queen - Let Me Live

금요일 밤인데 사무실로 들어가보셔야 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불쑥 나타났던 것은 그저 당신에게 선약이 있으면 어쩔 수 없고, 없다면 오랜만에 회포를 나눌까 하는 요량이었지요. 당신 말씀처럼 미리 연락을 드릴 걸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3년만이었던가요, 한 시간 남짓 카페에서 이야길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런 인연이 결코 흔하지 않잖아요.

그간 잘 지내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크리에이터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얼마 전 새 책을 낸 뒤론 외부 강연으로 바빠 보였으니까요. 책 서두의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전작들에서도 나왔던 이야기라 으레 하는 말씀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더군요. 말씀을 아끼는 눈치였음에도 당신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음이 충분히 전해졌습니다.

응원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행여나 공허하게 들릴까 싶은 마음에, 택시에서 먼저 내리며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나눌 때에야 겨우 어색한 말투로 그 말을 꺼냈네요. 정말로 당신이 기운 내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신촌 엘피 바에서 퀸(Queen),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예스(Yes) 같은 음악들 신청하고 기네스로 유쾌하게 건배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 언니네 이발관 -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마음을 움직여

이 곡 어떤가요. 당신이라면 눈치챌 거라 짐작합니다만 마무리가 급작스럽지 않나요. 처음 이 곡을 들었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리드미컬하면서도 단정한 도입부부터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약 주문해서 받은 앨범의 첫 곡이 이렇게 탄탄하다니. 곡이 전개될수록 '기승전'을 거치며 만족도가 가파르게 치솟았습니다. 그런데 2절이 끝나고 음악이 갑자기 고꾸라지더니 꿈처럼 사라져버립니다.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마음을 움직여>의 '결'은 허무합니다. 수없이 들은 지금도 그러한데 처음 들었을 땐 오죽했을까요. 실망감이 상당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알고 보니 이런 마무리는 언니네 이발관이 의도한 것이라더군요. 갑자기 끝나버린 관계를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 곡을 골랐는지 아시겠지요.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내가 어떻게 된 것인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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