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20] 🌻 여름다운 여름의 하이라이트에 들은 노래들

한 주도 잘 지내셨나요? 숑🌻입니다. 레터를 쓰고 있는 지금 빗줄기가 하염없이 쏟아지네요. 이렇게나 뜨겁게 덥다가도 흥건하게 비가 내리니 정말 여름다운 날씨입니다. 어느 해부턴가 말도 안되는 양이 한번에 내려 침수 피해가 생기는 빈도도 잦아지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비슷한 이상 기후가 많아질 거라고 하니 근심스럽습니다. 모두들 안전한 곳에서 무사한 나날 보내고 있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입추가 지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는 이제 여름의 정점을 보내고 한 해의 내리막으로 진입한 느낌이에요. 8월 첫 주말의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이 지나갔기 때문이겠죠. 어느 순간부터 펜타포트는 공연의 모음이라기보다 이 뜨거운 여름의 하이라이트처럼 느껴져요. 끝내주는 무대만큼이나 펜타포트의 진짜 헤드라이너는 그 시기의 미친 더위와 더 미친(positive) 관객들인 듯합니다.

오늘은 (벌써 2주 전!) 펜타포트에서 즐긴, 열정적인 공연으로 더욱 빠져버린 노래들을 소개해 볼게요. 이번에 다녀오지 않으신 분들께도 현장의 생생한 기운이 전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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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lp - Babies

토요일 헤드라이너는 펄프(Pulp).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그들이 43년 만에 처음으로 내한한 무대였으니까. 무대 앞으로 향하는데 커다란 양쪽 스크린에 한국어 자막이 띄워졌다. '오늘은 펄프의 572번째 공연입니다. 분명 잊지 못할 밤이 될 거예요. 즐길 준비됐나요?' 그때까지도 아주 약간 고까운 마음이 들었음을 인정한다. 아니 어떻게 데뷔하고 43년이 되도록 한국을 한번도 안 올 수가 있어! 아무리 음반 시장 작은 동북아의 작은 땅이라지만, 내가 그들의 음반 판매량에 지폐 한 장 얹어주지 않긴 했지만...

그 마음은 공연이 시작되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쏙 사라져 버렸다. 일단 두 곡 만에 히트곡 <Disco 2000>을 불러서 열광으로 송도 천장을 뚫어버렸기 때문이고 뒤이은 무대들도 정신을 홀려 놓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정장을 빼 입고 나온 보컬 자비스 코커는 그 기다란 팔다리를 열심히 낭창거리며, 열 손가락을 다 써 가며 눈을 떼지 못 하게 했다. 마치 미쳐버린 과학자 또는 마술사 같은 인상이었다. 과거 히트곡과 올해 발매한 신보를 넘나드는 셋 리스트는 또 어떻고! 과연 반백 년 가까이 묵은 관록의 록 밴드는 공연으로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Babies>는 펄프가 1994년 발표한 앨범 [His 'N' Hers]에 실렸다. 뮤직비디오 속 앳된 자비스의 얼굴과 그 나이만큼 불건전한(?) 가사가 눈에 띈다. 불구덩이 같던 한낮의 더위가 물러가고 적당히 시원한 공기 속, 잔디밭에 서서 흔들거리며 <Babies>를 듣던 순간은 신선하고 상쾌한 여름밤 그 자체였다.

🌻 바밍타이거 - Spirit Chaebol

이번에 챙겨 본 공연 중 가장 충격적인 재미를 선사한 이들은 바밍타이거(Balming Tiger)였다. 사실 무대를 보기 전까지 이들을 잘 몰랐다. 그룹 이름은 자주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음악을 하는지 몰랐고 전날쯤 예습해 볼까 싶어 이 곡 저 곡 찾아 들었지만 그닥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등장한 일요일 오후에도 분명히 잠깐 구경만 하고 어딘가에서 쉴 생각이었는데 무대 앞에서 정말 시간이 삭제되어버렸다...

2018년 데뷔한 바밍타이거는 특이한 구조의 그룹이다. 멤버가 무려 열한 명인데 모두가 무대에 오르진 않고 미술, 영상처럼 다양한 재능을 가진 크루나 레이블 개념이라고 해야 할까. 음악 외에도 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 콘텐츠의 경계를 두지 않는다. 펜타포트에서는 곡들을 밴드 셋으로 편곡해서 선보여선지 페스티벌 무대에서도 상당히 자연스럽고 무엇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어휘력이 통탄스럽다. 온몸을 열광하게 하는 센서가 있다면 그곳에 있던 관객 모두가 'ON' 상태였을 것이다. 휴대폰을 미처 들 새 없을 만큼 온전히 집중했다. 일상에 돌아와서도 <Spirit Chaebol>을 자주 틀어놓고 둠칫거리며 그날의 도파민을 한땀한땀 되새겼다.

🌻 델리스파이스 - 환상특급

아무리 생각해봐도 페스티벌의 공기는 뭔가 다르다. 굳이 돈 주고 여름의 가장 뜨거운 더위를 온몸으로 맞이하러 가는 펜타포트 같은 혹서기 훈련에는 좀더 다른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낮의 땡볕 아래 땀 흘릴 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여기 와 있나 싶다가도 한 줄기 스치는 바람과 무대 뒤로 물드는 주황빛 노을, 물줄기 사이로 비치는 무지개에 금세 모든 기억이 미화되어버리는 것이다.

일요일 오후, 델리스파이스 김민규의 공연을 보던 순간도 아마 비슷한 풍경으로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고백>, <챠우챠우>, <항상 엔진을 켜둘께> 같은 곡들을 탁 트인 무대에서 양 팔 높이 들고 따라 부를 날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락을 하면 늙지를 않는지 20년 전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은 김민규의 고운 목소리까지. 델리스파이스의 노래는 20년이 더 흘러도 여전히 묘하고 애틋하지 않을까.

<환상특급>은 이날 부르지 않아서 아쉬웠던 곡이라 소개해 본다. 이 곡은 <고백>이 담긴 델리스파이스 5집 [Espresso]에 실렸다. 동경하는 무비 스타를 떠올리며 적은 노랫말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노래의 포문을 여는 순간부터 극장의 막이 올라가는 듯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무대를 목 빠지게 기다리다 드디어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을 닮았다. 노래가 끝날 무렵엔 눈앞이 번쩍이던 순간이 물러난 직후처럼 아련하고 허전한 마음이 든다. 기왕의 일상을 잠잠히 다지다 보면 이 환상의 순간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런 기대감으로 이 여름의 빅 이벤트도 후련하게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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