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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 “어쩔 수 없는 거 아님?”은 무엇을 씻어 내는가

‘X-워싱’에서 출발해 다시 읽는 아트워싱 논쟁

2026.07.25 | 조회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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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우리가 어떤 변화나 사건 앞에서 종종 내뱉는 말, “어쩔 수 없는 거 아님?” 이 말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이 말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단처럼 보이지만, 특정한 의도로 선택되고 설계된 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해버리는 고도의 체념이기도 하다. 도시가 발전하면 사람이 몰리고, 값이 오르면 누군가는 떠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말. 아쉽지만 피할 수 없는 인과라는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음’은 복잡한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체득한 감각일 수 있다. 매번 모든 변화의 책임과 인과를 따져 묻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 입에 머무는 동안 더 말해질 수 있었던 것들은 마비되고,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일에 대한 상상도 어려워진다.

이 글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태도와 그 의도가 오늘날 진화하는 각종워싱(-washing)’의 기술과 맞닿아 있다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워싱은 어떤 흔적을 덜 보이게 하고 책임의 경로를 흐리며, 특정한 변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번역한다. 여기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트워싱을 떠올리며, ‘-워싱이라는 표현에 뭉뚱그려진 쟁점들을 살펴본다.

 

어쩔 수 없이 씻은 손?

씻는다는 행위는 오래전부터 물리적 세척과 도덕적 정화 사이를 오가며 사용되어왔다. 이를 보여주는 잘 알려진 장면은 『마태복음』 27장에 등장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형을 앞두고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신은 이 사람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선언한다.[1] 여기서 손 씻기는 몸에 묻은 피, , 책임을 닦아내는 행위를 넘어,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는 책임이 자신을 떠났음을 공표하는 공개적인 제스처가 된다. 이 오랜 종교적 장면은 씻는 일이 과오를 정화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책임의 위치를 공개적으로 재배치하는 일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마티아 프레티, 〈손을 씻는 빌라도〉, 1663,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이미지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Public Domain.  
  마티아 프레티, 〈손을 씻는 빌라도〉, 1663,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이미지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Public Domain.  

 

 ‘X-washing’의 전개: 외양을 덧칠하기, 기원을 세탁하기, 가치를 빌려오기

오늘날 여러 ‘-워싱표현의 오래된 배경에는 희게 덧칠한다는 의미의 화이트워싱(whitewashing)이 있다. 화이트워싱은 결함 자체를 없애기보다, 그 결함이 보이는 표면을 덮는다. 여기서부터 워싱은 오염이나 결함 자체를 제거하기보다, 결함이 보이는 표면을 덮어내 깨끗하고 정당한 외양으로보이도록하는 일에 가깝다.[2] 즉 워싱은 무엇이 어떻게 보일지를 조정하는 시선의 기술이 된다. 또 다른 워싱의 기술로 떠올려보자면, 한국어 표현에서도 익숙한 돈 세탁(money laundering)이 떠오른다. 돈 세탁은 씻는다는 은유를 다른 방향으로 확장한다. 돈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어 합법적인 자금으로 보이게 한다. 워싱은 표면을 관리하는 기술이자, 출처와 경로를 흐리는 기술인 것이다.

  합성조어 'X-washing'의 패턴  
  합성조어 'X-washing'의 패턴  

여기에 1986년 등장해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그린워싱(greenwashing)’이 또 다른 기술을 더했다.[3] 그린워싱은 화이트워싱 개념에 환경친화적이라는 뜻의 녹색(green)을 결합한 말로, 환경친화적인 녹색의 심상과 이미지를 빌려 기업, 정책, 상품이 보이는 방식을 바꾸는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그린워싱 이후 핑크워싱, 스포츠워싱, 아트워싱 등 현대에 들어 ‘X-washing’의 패턴으로 합성되는 조어가 활발하게 만들어졌다.[4] 여기서 ‘X’는 씻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워싱에 동원되는 가치와 이미지가 들어가는 자리이다. 그린워싱은 환경을 정화하는 행위가 아니며, 핑크워싱이나 스포츠워싱 역시 성소수자 인권이나 스포츠 자체를 씻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워싱은 대문자 ‘X’가 가진 사회적 가치와 색의 심상, 장르적 특징과 인적 자원들의 속성을 빌려와 특정한 주체들이 보이는 방식을 재구성하는 행위에 가깝다.

아트워싱 역시 예술 자체를 정화하는 행위가 아니라, 예술을 X의 자리에 놓아두고서 작동하는 행위이다. 예술이 가진 창조성, 공공성, 제도비판성, 다양성의 이미지를 빌려 특정한 사람과 기업, 정책과 자본이 보이는 방식을 바꾸는 데 목표를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예술은 본래부터 자본과 권력의 후원을 받아왔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쟁점은 예술과 권력이 관계해왔다는 유구한 사실 자체가 아니라, 예술의 가치가 누구에게 빌려지고 무엇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지, 또 그러한 시도가 어떠한 이유로 실패하거나 성공하는지에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과 구조를 살피지 않은 채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말한다면, 아트워싱 논쟁의 중요한 핀트를 놓치게 된다. 아트워싱을 비판하거나 옹호하고, 반박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이 핀트부터 맞추어볼 필요가 있다.

 

아트워싱이 정치화된 순간

예술이후원의 형식으로 부와 권력과 관계 맺어온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오늘날 아트워싱이 직접적인 정치적 용어가 된 것은 2010년대 도시 젠트리피케이션 논쟁 속에서였다.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는 활동가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아트워싱은 예술이 불균등한 도시개발에 관여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언어로 자리 잡았다. 특히 2016~201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보일 하이츠(Boyle Heights)의 젠트리피케이션 반대 운동은 이 용어를 널리 알린 대표적인 사례였다.

로스앤젤레스 동부의 보일 하이츠는 역사적으로 라틴계와 치카노(Chicano) 공동체, 노동계급 거주민들의 삶이 형성되어온 지역이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인종차별과 국가적 방치, 공영주택 철거와 강제 이주에 맞서온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10년 무렵부터 보일 하이츠와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예술지구 사이의 산업 구역에 갤러리와 예술공간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낡거나 비어 있다고 여겨진 산업 공간이 새로운 문화예술의 가능성을 품은 장소로 주목받은 것이다.[5]

이러한 배경에서 2016‘PSSST’라는 이름의 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비영리 공간(artist-run space)이 보일 하이츠에 문을 열었다. PSSST는 공동체와 협업 과정을 중요시하며 동시대 미술계 안에서는 사회적 실천의 언어를 실험해보려는 공간에 가까웠다. 그러나 PSSST가 들어선 건물은 익명의 투자자가 이전 공장을 100만 달러 이상에 매입하고 개조한 뒤, 공간 측이 장기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 곳이었으며, 공간 창립자가 당시 문제시되던 부동산업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논란이 되었다.[6] 이러한 인적 관계는 PSSST가 내세운 진보적 프로그램과 별개로 이 공간을 부동산 투자의 구조에서 떼어놓고 볼 수 없다는 활동가들의 판단을 구체화했다. 더욱이 PSSST가 표방한 다양성과 포용성의 언어와 그 공간을 가능하게 한 부동산의 조건 사이의 모순을 선명하게 만들었다.[7]

  〈PSSST 앞 시위〉, 2016. 이미지 제공: BHAAAD. 이미지 출처: Southwark Notes.  
  〈PSSST 앞 시위〉, 2016. 이미지 제공: BHAAAD. 이미지 출처: Southwark Notes.  

외부 갤러리의 유입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지역 주민과 세입자 단체, 예술가와 문화 활동가들은 BHAAAD(Boyle Heights Alliance Against Artwashing and Displacement, 보일 하이츠 아트워싱과 강제이주 반대 연합)라는 긴 이름의 연합을 결성했다. BHAAAD는 갤러리가 외부의 방문객과 투자자를 끌어들이고 지역의 이미지를 바꾸면서, 부동산 가치 상승과 저소득 임차인의 강제 이주를 예고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고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아트워싱은 이러한 지역과 삶의 변화를 자연스럽고 수긍할 만한 도시의 발전으로 부드럽게 번역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PSSST는 결국 2017년 문을 닫았다. 공간 측은 장기간 이어진 공격으로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고 밝혔고, BHAAAD는 이를 임대료 상승과 전치에 저항해온 세입자들의 승리라고 선언했다. 무엇이 실패했고 무엇이 승리했는지를 둘러싼 해석은 정반대로 갈렸다.

그렇다면 보일 하이츠의 논쟁은 결국 PSSST라는 공간의 윤리적 잘못을 따지는 문제였을까? 오히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BHAAAD가 비판의 대상을 어디에 두었는가이다. 이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을어쩔 수 없는 변화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필연성의 서사 자체에 맞서고자 했음을 분명히 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정책과 투자, 선택이 축적된 결과이므로 집합적인 행동을 통해 저지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8] 특히 PSSST가 주요한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는 노골적인 상업 갤러리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 포용, 퀴어/페미니즘, 공동체의 언어를 사용해 진보적 공간임을 적극 표명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비영리 공간이라는 사실과 진보적인 의도만으로 공간에 얽힌 소유관계와 투자의 구조, 그리고 예술공간을 둘러싼 부동산 투기의 메커니즘, 나아가 거주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까지 어쩔 수 없는 일로 일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워싱이라는 복화술

여기서 이 글은 아트워싱을 행위자의 선악이나 단순한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하나의 고도화된 기술로 보자고 제안한다. 특히 위 PSSST 공간의 폐관 사례는 아트워싱이 도시 젠트리피케이션 속에서 정치화된 대표적인 사례인 동시에 아트워싱이 결코 '악한 누군가'에 의해 단독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BHAAAD의 팸플릿은 화이트워싱, 그린워싱, 트랜짓워싱, 핑크워싱, 하우징 워싱을 함께 언급하며, “안전하고 진보적이며 걷기 좋고 살기 좋은도시의 언어가 경제적 불의를 덮는 약속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9] 여러 워싱의 기술은 하나의 사건에 중첩될 수 있다.

이러한 ‘X-washing’은 오늘날 일종의 복화술과 닮았다. 실제 목소리는 복화술사의 몸에서 나오지만, 관객은 눈앞에서 움직이는 인형이 말한다고 믿는다. 복화술은 발화의 출처와 시선이 머무는 위치를 분리해, 말하는 이와 보이는 이를 효과적으로 어긋나게 만드는 기술이다. 관객은 소리가 실제로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끝까지 추적하기보다 인형의 입과 표정, 몸짓을 따라간다.

  존 토머스, 〈복화술사와 그의 인형들(Ventriloquist and His Dolls)〉, 약 1885년, 유리건판 네거티브, 이미지 출처: 웨일스국립도서관, Public Domain.  
  존 토머스, 〈복화술사와 그의 인형들(Ventriloquist and His Dolls)〉, 약 1885년, 유리건판 네거티브, 이미지 출처: 웨일스국립도서관, Public Domain.  

이 19세기 사진 속 복화술사는 서로 다르게 인종화된 인형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게 한다. 복화술사가 선택한 인형들은 특정 집단의 이미지와 사회적 유형화, 외양을 빌려와 다른 주체가 말하는 워싱의 구조를 다시 한번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복화술사의 존재가 그렇다고 완전히 지워지진 않는다. 인형에게서 눈을 떼어 복화술사를 관찰해보면, 입술과 턱의 움직임을 필요로 하는 발음을 하는 순간에 잠깐씩 티가 나곤 한다. 따라서 복화술은 이 티, 흔적, 자국을 완전히 숨기려 하는 기술이라기보다, 인형으로 시선을 분산시켜 실제 발화자의 존재를 옅게 만들어내는 상대적 보정 기술에 가깝다. 덜 보이게 될 뿐 복화술의 부자연스러운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듯, 워싱을 통한 온전한 도덕적정화역시 불가능하다.

또한 워싱의 흥미로운 특징은 활동가와 비판자들이 직접 ‘X’의 이름을 명명한다는 데 있다. 그린워싱, 핑크워싱, 스포츠워싱, 아트워싱이라는 말은 대개 실행 주체가 아니라 그것을 의심하는 이들이 붙인다. 이 명명은 환경, 젠더, 스포츠, 예술, 공동체, 다양성의 가치를 누가 필요로 하고 어디에 동원하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 덧붙여 흥미로운 점은 워싱의 논쟁에는 ①행위, ②그에 대한 비판, ③다시 그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는 삼중의 구조가 겹쳐져 있다는 점이다. 워싱에 따라붙는 이 담론적 구조는 워싱이 온전히 승리하거나 완벽히 패배하지 않도록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성공하지만, 바로 그 성공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워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 역설은 아트워싱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아트워싱과 그에 대한 논쟁은 워싱의 수혜자와 비판자들이 어느 지점에서는 동료이기도 한 불편한 상황을 낳는다. 워싱(논쟁)을 둘러싼 설득과 수혜, 저항과 불신, 그리고 충성은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끝없는 평행선만이 남는가

질문을 안고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어쩔 수 없는 거 아님?”이라는 말은 무엇을 씻어 내는가. 이 말은 단지 책임을 면제하는 말이 아니라, 일어난 일들을 자연스러운 필연으로 들리게 만드는 말이다. 워싱의 언어가 한 관객을 설득하는 순간, 다른 관객에게는 오히려 복화술사의 입이 잠깐 움직였다는 증거가 된다. 어떤 이에게 예술은 공동체와 다양성을 향한 약속으로 들리지만, 다른 이에게 같은 말은 이미 반복되어온 개발의 약속과 겹쳐 들린다.

그러므로 선택과 수혜, 갈등과 책임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남겨두는 일은 언제나 필요하다. 반목과 부침을 겪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봉합하지 않는 것. 모든 것과 무관해지려 하지 않는 것. 공공성과 공동체를 말하는 예술과 각종 행사가 늘어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 씻어 내 얻은 깨끗하고 위생적인 관계와 결론만은 아닐 것이다.

 


[1] 고대영어 ‘wascan’(씻다, 정화하다, 목욕하다)에서부터 출발하는 영단어 ‘wash’는 문자 그대로 죄와 죄책감을 정화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물리적인 세척과 함께 죄의 정화라는 두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씻는 행위 중에서 특히 손을 씻는다는 표현은 155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상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Douglas Harper, “wash,” Online Etymology Dictionary, https://www.etymonline.com/word/wash.

[2] Oxford English Dictionary, “whitewash, n.” “whitewash, v.” ‘Whitewash’는 원래 석회 등을 발라 표면을 희게 하는 행위를 뜻하며, 18세기부터 잘못이나 결함을 은폐하고 정직성·존중 가능성의 외양을 부여한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3]그린워싱(greenwashing)’ 1983년 환경운동가이자 학생이었던 제이 웨스터벨드(Jay Westerveld)가 피지 섬으로 여행을 간 후, 호텔이 환경보호를 위해 수건을 재사용해달라는 안내문을 보았고, 동시에 호텔이 인근 섬 생태계를 훼손하며 증축 공사를 진행한 모순을 목격하며 시작되었다. 용어의 사용은 그가 1986년 호텔업계가 수건 재사용을 요청하는 관행을 비판하는 에세이에 등장하며 이후 공유되었다. https://www.nrdc.org/stories/what-greenwashing

[4] Janja Polajnar, “Greenwashing, Pinkwashing, Whitewashing … der kritische Metasprachdiskurs um X-washing: Eine korpusgestützte diskurslinguistische Analyse,” Linguistica 64, no. 1 (2024): 41–77,

[5] 강지선, 「갤러리 공격 사건: ‘예술세탁’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기—로스앤젤레스 보일하이츠의 젠트리피케이션 저항 사례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사연구』 49, 현대미술사학회, 2021, 94–96쪽.

[6] Defend Boyle Heights, “DBH: On PSSST Gallery,” 2016. 해당 주장은 다음의 성명 확인.

https://alianzacontraartwashing.org/es/coalitionstatements/dbh-on-pssst-ingles/

[7] 강지선, 같은 , 97–100

[8] Boyle Heights Alliance Against Artwashing and Displacement, “The Short History of a Long Struggle,” 2016

[9] 같은 글, 6.


김나연 / 독립기획자, PP PICK 에디터 nykim1123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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