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오쓰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원래 주제로 잡고 있던 뉴스레터를 지우고, 새로운 주제를 선정하였습니다. 오쓰와 캔디가 처음 함께 맞게 된 장례식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날은 오랜만에 오전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두고 침대에 널부러져 있던 나를 아침 운동을 다녀온 캔디가 다급한 목소리로 깨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소식을 들은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구글 캘린더에 들어가는 일었다. 취소해야 하는 일정과 연기해야 하는 일정을 추리고, 여기저기 연락을 했다. 빈소가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연락을 다 돌리기란 어려웠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옷부터 챙겨 입고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00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빼놓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내가 그 때문에 돌잔치를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내가 돌잔치를 할 무렵 할아버지가 환갑이었다. 지금은 환갑이라고 잔치를 하는 집들이 없지만 그 당시만해도 환갑에는 잔치를 했다. 한 해에 집안 잔치를 두번 할 수 없으니 내 잔치는 건너 뛰고 그의 잔치를 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우리집의 대장이었다. 성군은 아니었다. 그는 늘상 소리를 질렀고 물건을 잘 집어던졌다. 나도 그에게 이것 저것으로 맞아보았다. 딱히 나에게만 물건을 던진 것은 아니어서 큰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도 맞고만 있지도 않았다. 한 대를 맞고 그칠 것을 지지않고 덤벼들어 열 대를 맞았다. 아무도 그 일을 못했는데 나는 그 일을 했다.
커다랗고 시끄럽고 꼬장꼬장한 노인네. 나는 할아버지를 싫어했고 또 그만큼 좋아했다. 그건 아마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01 상복
병원에 가기 전에 나는 결혼 예복으로 맞췄던 검정 정장을 챙겨 입었다. 옷을 맞출 때부터 염두해두었던 일이다. 기성복으로 나온 ‘남성’정장들은 내 몸에 맞지 않았고, ‘여성’정장들은 모두 허리선이 잘록하게 잡혀 있었다. 결혼 예복을 맞추며 테일러에게 내 몸에 맞으면서도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 싶다고 주문했다. 그 옷을 입고 내 결혼식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결혼식에 갔고, 또 그만큼 많은 장례식에도 갔다. 이번엔 할아버지의 장례였다.
할아버지는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 옷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 보여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내 옷. 내 몸에 딱 맞는 내 옷을 보시라고. 잘 어울리지 않느냐고.
사실 굳이 옷을 챙겨 입고 가지 않아도 됐다. 상조회사에서 상복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남성용’ 상복(검정 정장)은 너무 클 것이 뻔하고 ‘여성용’ 상복(검정 한복)은 입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옷을 미리 챙겼다. 결과적으로 큰 무리 없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예를 갖출 수 있었다.
02 커밍아웃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앞으로 펼쳐질 사흘이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했다. 친척들은 정장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 옆에 있는 낯선 존재(캔디)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할까. 파도가 밀려오듯 밀려올 조문객들에게 나는 캔디를 잘 소개할 수 있을까. 나와 캔디는 무사히 빈소를 지킬 수 있을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지난 설 명절과 어버이날에 캔디와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뵙다는 점이다. 부모님의 형제자매들에게는 이미 인사를 나누었으니 큰 짐은 덜은 셈. 그래도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장례는 직계가족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시간이니까. 할아버지의 평안보다도 나는 나와 캔디가 더 걱정이 되었다.
03 첫번째 조문객
첫번째 조문객은 아버지의 손님이었다. 그가 분향을 하고, 할아버지 앞에 두 번 절을 하고 우리와 맞절을 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와주어 고맙다고 했고, 나와 동생을 차례로 소개했다. “여기는 우리 딸, 우리 아들” 그리고 아버지는 캔디를 향해 손짓하고 “우리 딸 파트너”라고 말했다. 캔디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조문객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별 말 없이 넘어갔다. 아마도, 소개를 할 만해서 한 것일테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그의 소개가 사흘 동안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를 함께 하겠다는 다짐처럼 들려서 고마웠다.
04 입관
큰아버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다. 장례지도사도 거들었다. 다 들어갈 필요 없으니 손녀들은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놀랄 수 있다고. 코웃음을 쳤다. 나는 들어갈 것이라고,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 번을 더 만류하길래 힘 주어 말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고. 그들의 걱정과 다르게 무서울만한 것이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시간도 아니고 얌전히 누워만 있는데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나. 할아버지가 확실히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기가 없다는 것은 물기가 없다는 뜻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꼭 북어같아’라고 생각했는데 어디가서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고 뉴스레터에 써버리기)
할머니가 딱딱하게 굳은 할아버지를 붙잡고 곡을 했다. 수술하신지 얼마되지 않아 할머니가 쓰러질까 걱정되었다. 할머니를 부축하며 죽은 할아버지 곁을 빙글 돌았다.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고 들어왔는데 할머니를 붙드느라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관으로 들어가고 관의 문이 닫힐 때 고모는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꼭 꿈 같았다. 그때 캔디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내가 나를 생각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 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가 있어서 큰 다행이었다.
05 완장
입관을 마치고 빈소로 돌아와 남자 가족들은 완장을 여자 가족들은 머리핀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장례지도사와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내가 완장을 달라 했기 때문이다. 장례지도사는 완곡히 거절했다. 예법이 그러하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더 따져 말하지 않았고 알겠으니 달라고 했다. 물러설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완장의 종류는 세가지가 있다. 줄이 두개 있는 완장은 상주가 찬다. 줄이 하나가 있는 완장은 사위나 결혼을 한 손주가 찬다. 줄이 없는 완장은 결혼을 하지 않은 손주가 찬다. 장례지도사가 줄이 없는 완장을 주려 하길래. 나는 결혼을 했으니 한 줄짜리 완장을 달라고 했다. 장례지도사는 마지못해 내가 달라고 한 완장을 줬다.
큰 소리를 내는 것에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도 내가 만들고 싶고, 지키고 싶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에게 맞서 싸우며 키웠던 나의 구력을 뽐내고도 싶었다.
06 나의 손님
부친상도 아니고 조부상이니 부고문자를 따로 돌리지는 않았다. 일정 조율을 위해 간단히 사무실과 SNS에만 소식을 알렸다. 장례식장이 은평인 탓도 컸겠지만 내 손님들이 많이 왔다. 내가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긴 것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짬을 내어 빈소에 들러주었다. 얼마나 많이 왔는지 조문객들과 계속 맞절을 해야하는 상주(=큰아버지)가 정치를 할 작정이냐고 투덜거릴 지경이었다. 조문객을 맞으며 한 번을 울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친구들을 보고 눈물이 왈칵 터졌다. 내가 울자 그들이 금세 따라 울었다. 왜 우느냐고 서로를 타박하면서 계속 울었다. 눈물을 그치고 완장을 자랑했다. 이게 뭔 줄 아느냐. 투쟁 끝에 얻은 완장이다. 자랑을 했다. 울다가 웃었다. 엉덩이에 털이 났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나에게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라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땐 고등학교를, 고등학교에 들어갈 땐 대학교를 말하더니, 이내 시집가는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는 다 보았다. 다 보고 돌아가셨다.
07 포옹
나는 누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이 싫다. 악수도 어지간해선 싫고, 포옹이라면 딱 질색이다. 결혼식에 축가를 불러주었던 교회 사람들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갈 때 나를 안아줬다. 이름을 부르고 안아주는데 가끔은 안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쏜살같이 장례가 끝났다. 별 탈없이 캔디와 함께 사흘 내내 빈소를 지킬 수 있었다. 캔디에게 애써주어 고맙다고 했다. 캔디는 이거 하려고 결혼 한 거야. 라고 답했다. 그렇구나, 우리는 이걸 하려고 결혼 한 거구나. 결혼해서 다행이다.

결혼을 처음 하고 싶다 생각한 것은 다 장례식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돌아가셨을 때, 상심하고 있을 나를 위로하기 위해 적어도 3일 이상 나의 파트너가 꼭 와있기를 바랬고, 그 시간동안 그가 나의 옆에 있는 모습에 어떤 수근거림도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결혼이기도 했다. 나의 경조사를 누구보다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줄 사람이 내 옆에 있기를 바라는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성소수자들에게는 그것조차 고민거리여야 한다. 왜, 그것조차.
오쓰를 만나고 의식적으로 가족의 경조사에 오쓰와 함께 갔다. 둘째 조카의 돌잔치, 아빠의 칠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함께 갔고, 가족들은 가족이 아닌 사람이 함께 온 것에 낯설어했지만, 나와 함께 산다는 동생(?!)을 환대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라고 하는 존재들에게 조금씩 스며들어갔다.
오쓰의 친척들은 대부분 결혼식 때 처음 보았다. 이번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오쓰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님은 지난 설에 처음 뵈었다. 부모님 본인의 직계들에게 커밍아웃 하는 것은 우리가 강요하고말고 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결혼 이후 몇 번의 명절에는 따로 따로 친지를 찾아 뵙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 설, 오쓰의 양가 조부모님들을 함께 보러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오쓰의 부모님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 되셨던 것이었나보다.
처음 오쓰가 우리 가족들을 만났을 때처럼, 오쓰의 가족들도 뭔가 얼떨떨하지만, 나를 환대해 주었다. 이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보다 일찍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랴부랴 검정색 옷을 챙겨입고 길을 나섰다.
사실 조금 두려웠다. 나는 장례식 내내 어떤 위치에 머물게 될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계속 있을 수 있을지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바로 알 수 있었던 것은, ‘아, 이 사람들(오쓰의 친척들)은 내가 누구고 여기 왜 왔는지 알고 있구나’였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내가 먼저 가서 인사를 하거나, 그들이 나에게 와서 인사를 하는 대신, 우리는 힐끔거리며 그냥 서로를 인지했다. 일단 안심이었다.
가족들이 상복을 입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오쓰의 아버님께서 ‘오쓰랑 캔디는 검정색 입고 왔으니까 저거 그대로 입으면 되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상복 그게 뭐라고 약간 아쉽긴 했지만, 지금 이 집에서 나의 위치는 여기까지라고 생각이 되었다. 뭐, 한복 상복 안입어도, 난 그집 사람 같이 보였다. 그리고 나중에 상주 하얀 삔도 찔렀으니 뭐. 되었다.
손님들이 계속 몰려왔다. 나는 인사를 해야 하나? 해도 되나? 피해야 하나? 나를 소개 시켜주실껀가? 나는 가족인가? 고민이 밀려들어왔다. 첫 손님을 만나고 오쓰의 부모님은 나를 ‘오쓰의 파트너’라고 소개하셨다. (다행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구구절절한 소개가 있어야 했고, 결국 장례식장의 대화 주제가 바뀌어가는걸 목격해야했다.
그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그 다음 손님의 왔을 때, 오쓰의 아버지는 나를 ‘우리 큰 딸’이라고 소개하셨는데, 음…. 누구도 그 말을 믿진 않았을 것이다. (막내 동생도 아니고 큰 딸이라고요? 저를 몇 살에 낳으신건가요…..) 그 후부터는 우리 모두의 눈치싸움이었다. 눈치껏 인사 할 곳에는 따라가고, 인사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면 부르지 않고, 가끔은 모른 척 하고, 가끔은 나를 소리높여 부르시고는 소개하셨다.
친척들과는 사흘동안 몇마디 안되는 대화를 나누었다. 가령 OO를 찾는 조문객 앞에서 내가 두리번 거리자 어디서인지 모르게 나타난 큰고모님께서 ‘내가 OO(이름)이다.’라고 하신다거나, ‘고모님! 누가 오셨는데요!’를 한다거나 뭐 이런거 정도? 상중에 가장 많이 한 일 중의 하나는 오쓰 어머님이 울 때 손을 잡아드리고, 안아 드린 것. 오쓰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것. 그리고 괜찮은 척 하는 김오쓰를 다독인 것 정도였다. 아! 그리고 엄마가 문상을 왔다. 와서 인사도 드리고, 오쓰도 많이 걱정해주고 가셨다. 이런 일을 꼭 챙겨야 하는 사이가 된 것이 정말 맞나보다. 발인까지 마치고, 큰고모님께서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셨는데, (내 이름은 안불러주었….모르시는걸까?) 이정도면 되었다 싶었다. 자신의 감정을 너무나 잘 컨트롤하는 김오쓰여서, 슬픈 일에 슬퍼하지 못할 것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오쓰의 옆에 있을 수 있었고, 그 옆에 있는 시간이 곤란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오쓰네 가족의 첫번째 장례식이었다.
별거 아닌 팁.
- 그냥 같이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물어 볼 정신이 없다. 오랫만에 온 친척들은 ‘쟤도 친척인가?’, ‘사돈 쪽인가?’ 뭐 그러고 만다.
- 가끔은 능청과 너스레를 장착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고, 매우 외향형인 나도 어렵다. 하지만, 와이프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무엇인가.

이번 뉴스레터의 이장의 추천은 잠시 쉬어갑니다. 죄송합니다. 잘 쉬었다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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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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