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이름
아마도 나는 언젠가 마흔이 넘으면 서울이 아닌 어느 곳에 작은 내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 말릴 마당이나 그게 아니면 작은 서재가 있고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내 이름의 책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그런 게 실패하지 않은 삶이라고 그게 아부지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그냥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요? 아부지 나는 이제 죽음이 뭔지 산다는 건 또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결국 죽는 일도 사는 일의 일부라는 걸 그때는 왜 알지 못했을까. 아부지가 없는 세상에서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 좋을지 알 순 없지만 아부지 나는 이제야 아부지가 제게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내내 눈으로 몸으로 삶으로 얘기해 왔다는 걸 아주 조금씩 천천히 깨달아 가고 있어요. 사랑하는 아부지. 부디 편히 쉬세요._부정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마지막 마음
드라마 인간 실격을 정주행했다. 보는 내내 내 안에 깊이 숨겨 놓았던 우울한 마음과 만나게 되었다. 부정과 강재의 사랑 이야기 보다는 그들이 나지막이 읊조리는 독백의 ‘아버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며칠 두통에 시달리며 복잡한 심경이 된 나는 드라마 대본집을 구입했다. 나는 통창에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집을 좋아한다. 집에서도 커튼을 활짝 열어 두는 편이고 되도록 햇살 가까운 곳에서 글을 쓰는 편이다.
북유럽의 추운 겨울보다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날씨를 사랑하고 여행지로 오키나와나 모로코, 튀니지를 선택하는 내가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같은 노르웨이 가수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쓸쓸하고 슬픈 기운 같은 걸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가까이 있는 데도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어쩌면 섬처럼 느껴지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마음 안엔 신적인 존재인 ‘아버지’가 있다. 평범한 보통의 날들엔 잘 몰랐던 아버지의 존재. 걸어서 10분 거리가 아닌, 알 수 없는 그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 아버지를 드라마 ‘인간 실격’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인간의 마음 안엔 한없이 본능에 충실하고 싶은 ‘안나카레리나’ 같은 자아가 있다. 아빠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겠지만 가족이라는 커다란 배를 운전해 가느라 많은 시간을 자신 보다는 가족을 위해 썼을 거다. 그것을 희생이라고 불러야 할까? 사랑이라고 말해야 할까?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부정은 남편에게 눈과 심장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사랑이 아니라 희생이라고.
칼 블로흐의 이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안에 있는 게 너야? 네 본심이 맞는 거야?’라고 가장 어두운 자아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찜찜한 기분인 채로 그림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둠이 가득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아이. 모자를 보니 밖은 태양 빛이 뜨거운 모양이다. 그 뒤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자세히 어두운 곳을 들여다보니 창가에 올려놓은 화병 안엔 싱그러운 꽃이 꽂혀 있다. 오른쪽엔 얽히고설킨 그물망이 마치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다. 릴과 싱커볼, 낚싯대도 보인다. 그러자 ‘아빠, 그 안에 있어요?’라고 묻고 싶어졌다.
아빠의 섬망 증상
아빠는 낚시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황망히 떠나기 한 달 전에도 아빤 낚시하고 있었다. 가장 무더운 한 여름, 들어가지 말라는 푯말이 붙어 있는 호수에 낚싯대를 던져 놓고 몇 시간이고 앉아 있던 아빠. 아빠는 어쩌면 자신의 시간을 조금 더 건져 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아빠의 ‘아버지’에게 독백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0킬로가 넘게 살이 빠져, 입고 있으면 팽팽했던 옷들이 모두 헐렁해진 채. 옆구리를 뚫고 나와 있던 3개의 호스를 아주 잠깐 안으로 넣고 있던 날들이었다. 몸이 조금 자유로워지고 나서 가장 먼저 가고 싶었던 곳은 낚시터였다.
암 환자는 열이 오르면 패혈증으로 갈 수 있어 매일이 고비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초록색과 빨간색 신호등을 헷갈리던 날. 좁은 병원 침대에서 한 시간도 채 잠들지 못하고 수시로 깨서는 천장의 낚싯대를 거둬 달라고 했던 일. 병원 밖에 낚시터가 있으니 거길 데리고 가 달라고 무섭게 소리치던 일. 밤마다 병원에서 고기 파티가 열리니 같이 준비하자고 했던 일. 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그땐 알지 못했다. 부정의 아버지처럼 뇌가 망가져 가고 있었다는 걸.
없음으로 있게 되는 것
아빠가 살아 있는 동안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곁에 없으니 비로소 있게 되는 일. 아빠는 당신의 아버지와 한창 사춘기 시절인 고등학생 때 사별했다. 아버지와 일찍 떨어진 아이는 늘 사랑에 목이 마르고 외로웠다. 그런 마음들 때문에 가족들은 자다 일어난 늦은 밤에도 손에 손을 잡고 ‘아빠하고 나하고’ 노래를 불러야 했다. 집엔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부정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마지막 독백처럼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천천히 깨달아 가고 있다. 사랑에 목이 마르고 외로웠던 어린 아빠 덕분에 한낮의 꿈 같은 추억이 많은 나는 아빠가 없고 나서야 그런 것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잦은 손님을 치르느라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잘 지낼 수 있게 된 것 모두 아빠 때문이 아니라 덕분이라는 사실을.
사랑하는 아빠. 부디 편히 쉬세요.
* 글쓴이 - 김상래
아뜰리에 드 까뮤 대표/작가/도슨트, 학교와 도서관 및 기관에서 성인 대상으로 미술 인문학, 미술관 여행 강연 및 글쓰기 강의를 한다. 초등학교에서 창의융합예술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문화·예술로 가득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고 있다. 그림과 글쓰기, 전시 감상 하는 '살롱 드 까뮤'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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