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청어람- 투쟁도 예배인가 예배도 투쟁인가] 편에서 김지애 활동가는 활동을 시작한 계기를 두고, “친구를 잘못 만나서”라는 대답을 합니다. 함께 출연한 송기훈 활동가가 김지애 활동가에게 “그 친구 이름을 말해 줄 수 있냐” 물었고, 김지애 활동가는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김유미”라고요. 거 참, 그 김유미가 누구인지.
네, 이번 틈 인터뷰는 친구찬스입니다. 지애님은 활동의 계기가 저였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맞아요, 언제나 잘못한 사람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법이죠.) 아무튼간에 김지애의 시작이 저였다니 앞으로 어깨를 높이고 다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께 저의 자랑스러운 친구를 소개할 수 있어 기쁘네요.

유미(유): 자기소개 해주세요!
지애(애): 안녕하세요! 전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연대사업팀장, 현 기독교대한감리회 주향교회 담임전도사, 예비 4.16연대 활동가 김지애입니다. 소개가 길죠? 무언가 드러낼 게 없을 때 몸집을 부풀려야 할 것 같아 소개가 더 길어지는 것 같아요. (웃음) 기독교 사회선교 속에 재난참사 영역을 담당하며 활동해왔고, 재난참사라는 분야에 더 집중해 연구하며 활동하고 싶어 이직을 결정하고 현재는 쉼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유: 얼마 전 SNS를 통해서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이하 고난함께)의 김지애로 전하는 마지막 인사’를 보았어요.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그러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고난함께’와 ‘김지애’라는 두 단어가 너무 찰싹 붙어 있어서 ‘마지막’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더라고요. 지애님에게도 고난함께는 참 각별한 공간일 것 같아요. 지애님이 ‘활동가’로 일하는 첫 무대이기도 했으니까요. 마지막 이라는 말이 아쉬워 그런지, 오늘 지애님께 제가 드리는 첫 질문에는 ‘고난함께에서의 처음’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어요. 첫 출근이 기억 나시나요?
애: 우선, 제가 고난함께에서 일을 하게 된 이야기부터 하고 싶은데요. 부당해고 현장의 기도회에서 한 두번 뵈었던 전남병 사무총장님께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전화를 주셨어요. 전화가 왔을 때 교회 기숙사에서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통화를 마치고 난 후 저에게도 이제 숨 쉴 구멍이 생긴 것 같아 엉엉 울었어요. 그래서 면접도 아주 잘 보고 싶었고, 출근날부터도 너무 너무 잘하고 싶어서 긴장하며 하루 하루를 보낸 기억이 나요.
첫 출근날을 떠올려보면, 정말 너무 긴장해서 배가 아팠던 기억만 나네요. 그때 당시에 저는 대형교회에 파트전도사로 일하면서 아주 힘들어하고 있었거든요. 교회 내 성차별적 구조, 계속되는 부목사의 괴롭힘, 수직적인 구조 안에서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는 분위기 등, 이 모든 것에 대해 대응하거나 말할 힘이 없었거든요. 긴장 속에서 출근을 하면서도, 고난함께에서 일을 하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내가 성장한다면, 내게도 말할 힘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것도 같아요.
입사를 해서 처음 맡았던 일은 한국 선교사인 조지오글 목사 1주기 추모 전시회였어요. 조지오글 목사는 한국노동운동계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인혁당 사건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분이에요. 제가 이 추모전시회를 담당할 때 노동운동이 무엇인지, 인혁당 사건이 무엇인지, 산업선교회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어요. 하지만 조지오글이라는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한국교회의 운동사에 대해서 제 스스로 조금 정리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조지오글 목사는 “예수를 전하려고 하지말고, 노동자들 안에 있는 예수를 찾아라” 라고 말했대요. 이 말이 지금도 제게 남아 있어요. 교회에서 오래 사역하며 지쳐가던 저에게 새롭게 신앙의 여정이 열린 것 같았죠.
조지오글 목사 추모제를 마치고 고난함께에서 어떤 일을 맡아야 할까 다시 고민하는 중에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참사 미수습선원의 가족들을 만났어요. 그게 또 다른 계기가 되어서 이후 사회적 재난참사를 저의 활동으로 삼아 걸어오게 되었어요. 돌이켜보니, 그 걸음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아요.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참사 가족들, 세월호 참사 가족들, 그리고 이태원 참사 가족들과 그 외 반복되었던 재난참사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어요. 그 중에 청어람도 있구요.
첫 출근과 지금의 저를 비교해보면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람인 것 같아요. 첫 출근일,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아무도 몰랐던 그 낯섦에 시간이 점차 쌓여 이젠 내가 많은 사람들을 알고, 많은 사람들도 나를 아는 수많은 관계와 연대를 얻었다는 것이 큰 차이같아요.

유: 고난함께에서 보낸 4년 6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많은 변화가 지애님께 있었네요. 첫 출근날 품으셨던 기대를 이루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배우고 얻은 게 많았던 시간인만큼 마지막 출근날 기분도 특별하셨을 것 같아요. 어떠셨어요?
애: 싱숭생숭 했어요. 사무실이 위치한 서대문은 제가 스무살부터 학부와 대학원 생활을 했던 곳이예요. 기숙사에서 살기도 했었고, 자취를 하기도 했었죠. 졸업하고 나서도 학교 근처에서 일을 했으니 진짜 저의 나와바리(?)였거든요. 올 초에 이사도 하고, 이제는 이직을 하니 서대문을 완전히 떠나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싱숭생숭 했던 것 같아요.
아침에 출근을 하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는데, 마지막 출근일에는 ‘텔레그램, 카카오톡 등 로그아웃하기’, ‘인계서 점검하기’, ‘짐 정리 할 것’이런 것들을 적으며 진짜 마지막 출근이라는 것이 실감났어요.
사무실에 앉아서 이모저모 로그아웃을 하고 있는데 문득, ‘내가 사무국에서 주는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에게 쌓인 시간들, 실력들은 사무국의 믿음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마움과 아쉬움이 마구 올라왔죠. 그러면서 동시에 미운 정(?)들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웃음)
출근을 했을 때는 사실 평소랑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전날 갑작스레 잡힌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제가 담당하던 기도회 순서자들께 다시 연락하고, 웹페이지에 올릴 포스터를 만들어 컨펌받고, 사무국과 함께 기자회견에 참여했어요. 기자회견을 마치고 진짜 퇴근을 하는데 그제야 ‘아- 끝났네’ 하며 퇴사를 체감했던 것 같아요. 시원했던 건 당분간은 복귀를 고민하지 않고 쉴 수 있다는 것에 엄청 큰 후련함을 느꼈어요. 휴가를 가더라도 늘 돌아와 밀려있을 일들과 해야할 일들을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이젠 그런게 없으니 무척이나 시원했죠.
유: 시원한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요. 퇴사 밈으로 유명한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네요. 그렇지만 지애님이 고난함께에서 보낸 시간은 굴레와 속박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다행이예요. 고난함께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어요?
애: 고난함께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채 1년이 되지 않았을 무렵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짤렸어요. 갑작스럽게 교회를 떠나라는 말과 여러가지 이유들을 듣게 되었지만 그 모든 말이 저에게 전혀 납득되지 않았어요. 제가 진심으로 열심히 사역했었거든요. 머리로는 ‘나는 잘못하지 않았고, 이건 부당한 일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 주일 사역을 마치고 다음날 사무실에 출근을 했는데,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 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더 애쓰지 않아서, 열심히 하지 않아서’ 교회에서 짤린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겁이 났나봐요. 고난함께에서도 일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부터는 까불지 않고 조용히 더 열심히, 얌전히 일해야지’하고 다짐했어요.
다짐을 하고 출근한 그 날, 사무국 다같이 강남에 미팅을 가야하는 날이었어요. 미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는데, 제 소식을 아는 동료들이 나름 저를 위로하고자 했던 것인지 아주 비싼 식당에 가는 거에요. 그 비싼 밥을 얻어 먹으면서 아주 불편했어요. 그래서 화장실에 가는 척 나와 몰래 밥값을 결제했어요. 식사를 다 마치고 돌아가는데 사무총장님이 제가 돈을 냈다는 걸 알고 엄청 화를 내시는 거예요. 식사비도 다 돌려주시면서요. 그러면서 너무 열심히 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 너가 중요하다고 했었나 뭐 그런 말씀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 말에 얻은 위로와 힘으로 지금까지의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어요. 나중엔 저도 누군가에게 그 말을 할 수 있게 됐구요. 활동 중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볼까 했지만 저는 여전히 제가 제일 중요한 지, 이 일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네요 (웃음)
유: 제 지론은 “밥 사주면 다 좋은 사람”인데요. 그 점심식사는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도, 잊지 못하는 기억일 것 같아요. ‘활동가’라는 직업의 매력은 함께하는 ‘동지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애님에게 좋은 동지들이 있어서, 지애님 역시 좋은 동지일 수 있고, 좋은 활동가일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직을 준비하면서 여행을 다녀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애: 퇴사 기념 여행 아주 잘 다녀왔습니다. 런던과 파리를 다녀왔는데요, 두 도시 모두 꽤 최근 다녀온 도시라 갈까 말까 아주 망설였어요. 그럼에도 다녀온 이유는 그래도 가봤으니 두번째로 가면 천천히 걸으며 쉼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웬걸- 정말 열심히 돌아다니고 정말 열심히 놀다 왔어요.
제가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2017년 런던에서 있었던 그렌펠 타워 화재참사 현장이었어요. 영국은 사회적 재난참사에 대해 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정부차원의 재난안전 메뉴얼, 피해당사자와 협의하는 과정에 대한 메뉴얼이 꼼꼼히 정리되어 있어요. 이 모든 것을 다 열람하거나 알수는 없지만 이 배경엔 도시 자체의 문화적 감각도 있을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시 런던을 방문하고 싶었고, 가장 최근 일어난 런던의 참사 현장을 먼저 가보고 싶은 마음에 퇴사 여행을 런던으로 떠났답니다.
하지만 현장은 생각보다 더 절박했어요. 이주민과 난민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 위치했던 그렌펠 타워는 런던시에서 주관해 지었던 이주민, 난민을 위한 공공주택이었어요. 이 공공주택 건축을 담당한 공무원은 고작 700만원을 빼돌리기 위해 건축 자재에 불에 타기 쉬운 자제를 사용했고 스프링쿨러는 설치하지 않았죠. 결국 냉장고 전선에서 시작된 불이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퍼졌고, 화재로 인해 사망한 분들보다 열기에 고통스러워 창밖으로 뛰어내리다 사망하신 분들도 계셨다는 참사 가족들의 증언도 들었어요. 얼마 전 그렌펠 타워 화재참사의 조사가 끝났고 보고서가 발표되었어요.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이 규명되었고 총리는 이에 즉각 사과문을 올렸죠.
하지만 사과 이후 유가족들과의 논의 없이 그렌펠 타워의 철거가 시작되고 있었어요. 철거를 위해 건물을 둘러싼 외벽엔 ‘안전’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적혀있었죠. 재난참사가 일어나면 모두가 같은 구호를 외쳐요. ‘진실’, ‘책임’이죠. 이 두 구호에는 단순히 진실을 알아내는 것과 이 재난참사의 책임자가 법적 책임을 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참사의 객관적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것을 참사 피해자, 유가족, 연대인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게 이해될 수 있는 진실로 재구성하여 전달하는 것까지가 진상규명의 모든 과정입니다. 책임자 처벌 또한 단순히 이 사실과 진실 속에 책임있는 사람이 법적, 사회적 지위의 책임을 지는 것을 넘어 윤리적 책임으로서 사과와 인정 그리고 이후의 행동을 완수하는 것이 완성된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의미 속에서 그렌펠 타워의 철거는 정부의 ‘사과’에 멈추고 ‘책임’으로 나아가지 못한 모습이겠죠.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품고 있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 책임당사자인 정부와 지자체가 유가족과 함께 논의하고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왜 무언가 크게 잃고 나서야 안전을 말할까요? 왜 누군가의 무엇을 빼앗아 안전을 세울까요? 그 무엇도 뺏기지 않고는 안전할 권리를 가질 수 없는걸까요? 그렌펠 타워 앞에서 그런 고민에 잠겨있다 왔어요.
이 고민을 함께 나눌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요. 여행 내내 한인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는데,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룸메이트들에게 제가 해 왔던 일들을 나누었어요. 대화 속에서 각자가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결국 한국의 재난참사에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경험하게 되었어요. 가방에 늘 들고 다니던 노란리본을 마구 마구 나누어주었답니다. 사실 파리에서도 ‘펜박’이라는 사회적 재난참사를 연구하고 지원하는 단체에 다녀오고 싶었는데, 불어도 영어도 안돼서 가지 못했어요…
유: 퇴사기념여행이 아니라 출장을 다녀오신 것 같은데요? 퇴사기념여행은 언제 가시는 거죠? (웃음) 곧바로 출근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새롭게 일하는 곳과 그곳에서 지애님이 맡으신 역할에 대해서도 함께 소개해주세요.
애: 416연대에서 새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단체의 전체 이름은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인데요, 말 그대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생명 존중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세월호 참사 피해자와 시민, 단체가 함께 만든 ‘통합적 상설단체’입니다. 출근 전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맡아 하게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무처장님과 여러차례 식사자리를 가지면서 제가 하고 싶은 재난참사운동은 무엇인지, 4.16연대가 나아가는 방향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더불어 제가 함께 하게 되었을 때 나아가게 될 방향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번의 대화 속에서 간략한 밑그림을 함께 그렸는데,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웠어요! 저의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져준다는 사실과 밑그림을 함께 그려갈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고 감사한 시간이었어요. 출근을 해서 정해질 일들에 대해 기대가 되기도 긴장이 되기도 합니다. 앞으로 제가 고민하고 운동을 해나가고 싶은 방향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 더 빠르게 반복되는 재난의 시대 속에서 공통된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을 정리하며 생명이 존중되는 안전사회를 만들고 계속해서 발생되는 사회적 재난참사들을 멈추기 위해 연결되야 할 다양한 여러 다른 의제(예로 기후위기, 젠더, 주거권 등)들과 연결하며 고민해가고 싶어요!

유: 설레는 마음 반, 긴장되기는 마음 반일 것 같아요. 한 편으로는 기독교사회선교 단체를 떠나 시민사회로 가는 길에 대한 감상이 있을 것 같은데요. 기독교사회선교 단체의 김지애 활동가와 시민사회 단체에서 일하는 김지애 활동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차이가 있을까요?
애: 저의 개인적인 변화, 마음이나 행동의 변화를 물으신다면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아요. 처음 이직을 결정했을 땐 저에게 너무 큰 변화가 오는걸까 싶어 두려워하기도 했어요. 나름 쌓아온 저의 경력과 활동이 무시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으면 어떻게 하지, 내 운동에 있어 중심이 되는 신앙적 가치가 훼손될까 이런 걱정들이었죠. 하지만 4.16연대 사무처장님과의 여러차례 만남과 대화를 통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상쇄되어서 마음이 많이 괜찮아졌어요.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는데 그 틈에 열심히 방파제를 쌓아올린 느낌이랄까요. (웃음)
저는 욕심이 많은 사람같아요. 하고 싶은게 너무 많고, 제가 얼만큼 성장해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가 궁금해요.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친구가 욕심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욕심쟁이인가 고민해보았는데, 맞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기독운동 안에 재난참사 운동을 보다 전문적으로 집중해서 펼쳐나갈 단체를 만들고 싶고, 생명안전 운동을 기독언어로 재해석해서 재난참사 앞에 교회가 더 열심히 연대하게 만들고 싶기도 해요. 사실 이보다 더 많은 꿈을 꾸지만 부끄러워서 더 말하지 못하겠어요.
그래서, 출근을 하고 적응을 했을 때 달라질 수 있지만, 차이는 없고 싶어요. 고난함께를 나올 때 사무국과 주위 기독운동 동료들에게 “나는 기독운동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러 간다”고 말했어요. 그건 제가 떠나 아쉬워 하는 동료들을 위로해주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진짜 제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해요. 기독운동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기독운동을 확장하고 기독운동 활동가 김지애로서 재난참사 운동과 생명안전 운동에 대한 전문성이 좀 더 채워지길 바라요. 차이가 아닌 성장을 바라며 잠시 판을 옮길 뿐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유: 인터뷰의 마지막 순서는 김지애의 신앙 소스리스트*를 들어보는 시간입니다. 지애님의 신앙여정에 영향을 준 세가지의 소스리스트를 들려주세요. 소스는 책이 될 수도 있고,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지애님이 만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소스 리스트는 2021년 1월에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재미공작소의 오프라인 문학 행사의 이름입니다. 소스 리스트에서 호스트 작가는 자신의 첫 시집 혹은 첫 소설집 탄생에 영향을 준 영감의 원천 열두 가지를 '소스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소개를 해요.)
애: 저의 신앙의 소스리스트,,, 저는 여전히 저의 신앙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소스리스트라는 것이 마치 신앙의 여정 속에 최소 제 1의 목적지에는 도달해야 정리가 가능할 것 같아 쉽지 않은 질문이네요! 아직 어떤 마무리도 되지 않아 민망하지만 이 자리에서라도 괜찮다면, 용기내어서 3가지 정도를 꼽아볼게요.
먼저 떠오른 건, 몇년 전 먼저 떠나간 한 친구에요.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시작하면서 처음 저를 강하게 연결시켜준 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떠났지만, 그가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천국’이 있다고 믿고 싶어졌어요. 천국이 있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인사 없이 떠난 친구를 언젠가 다시 만나 내가 걸어온 여정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가서 들려줄 자랑거리들을 만들고 싶은 마음도 한켠에 담아 더 열심히 활동하기도 했죠. 아마 그 친구를 먼저 보내고 난 후에 재난참사 운동에 더 마음을 두기도 했던 것 같아요. 피해가족들의 마음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딘가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믿음은 함께 나누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싶어지기도 했구요.
두번째로 떠오른 건, 엄기호 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라는 책이에요. 책에서 고통을 겪은 이들의 예시를 말하며 당사자들이 이 고통을 어떻게 소화하는지의 예를 보여 줍니다. 그 중, 종교의 힘으로 고통을 바라보고 종교라는 공동체 속에 공유되는 어떤 주문으로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나 결국은 그 주문을 아는 사람들 안으로만 고립시킨다는 예가 등장해요. 그러면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해요.

“사회과학적 언어든 심리학적 언어든 혹은 정말 주문이든 간에, 이런 말들은 고통의 다른 차원을 대면하고 고통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사실은 불가능한지를 직면하는 것을 방해하는 ‘주문’이다. 모두가 각자 다른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말에 조금 기분이 나빴어요. 반항아 같은 마음이었달까요? 괜히 만나서 변명을 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어요. 이 말이 왜이리 신경을 건들었을까 생각했는데 제가 너무 기독교인이더라고요.
신앙이 공유되지 못한 이들에게는 기도회와 예배가 소음에 불과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현타를 맞았었나봐요. 이 책을 읽고 얼마 후 서울광장에 있던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에서 추모 기도회가 있었어요. 기도회 끝 순서에 광고를 전하는 시간인데, 해야하는 광고는 하지 않고 이 책의 소감을 말했었어요. ‘낯선 언어임에도 이 예배에 참여해주신 가족들께 감사하다. 종교가 특히나 기독교가 여러분께 반복되는 주문이 되지 않게 더 애쓰고 행동하며 함께 하겠다’라고요.
그때의 그 말은 지금 저에게도 유효해요. 공감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거대한 참사를 겪은 가족들, 피해자들, 생존자들에게 내가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기독교가, 그 안에 언어가 그들에게 단순한 주문이 되지 않도록 애쓰고 싶어요. 얼마나 더 저를 이끌 힘이 될지 모르지만 지금의 생각으론 아마 더 오래 저를 이끄는 신앙의 리소스가 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데요, 위러브의 [시간을 뚫고]입니다.
해고당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할 때 청소년들과 함께 찬양팀을 했었어요. 교회 청소년들은 늘 학업에 지쳐있었고 자기의 말을 하는 것에 어색하고 두려워했었죠. 이들에게 여러 방법으로 다가갔지만 대화를 하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렸어요. 전도사로서 제가 학생들에게 무얼 해주어야 할까 늘 고민했지만 할 수 있는건 가끔 만나 밥을 먹고 실없는 소리들로 웃겨주는게 다였어요. 노력을 했지만 노력에 비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었죠. 그러다 갑자기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 예배를 드리던 날 한 청소년이 작은 케익과 손편지를 선물해줬어요.
그 손편지에 이 노래가 적혀있었죠. 이 노래를 함께 부를 때 너무 좋았다고요.
부모님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가지만 재미는 없고, 자존감은 떨어져 대화하는 게 힘들었는데 함께 부른 이 노래가 자기를 변하게 했다고 적었더라고요. 사실 편지가 있다는 건 교회를 떠나고 시간이 꽤 지나 알게 되었고 읽었어요. 교회를 갑작스레 떠나게 되었을 때, 그 교회의 모든 인연과 기억을 지우고 싶었거든요. 교회 사람이 아니더라도 연락이 무섭고 두려웠던 때였어요.
그런 중에 편지를 읽게 되었고, 이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는데 저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어요. 가사 하나 하나에 마음이 꼬집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은 보다 건강히 목회도 활동도 이어가고 있지만 종종 다 그만두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때 가끔 이 노래를 들으며 다시 힘을 얻곤 합니다. CCM을 추천하는게 왜인지 부끄럽네요:)
지금 저에게 활동도 목회도 삶의 중심이 되었어요. 가끔 시소처럼 둘 중 어떤 것에 더 집중하는 순간들이 오지만, 둘의 무게를 잘 맞추려 나름 애쓰고 있답니다. 저의 리소스가 목회도, 활동도 함께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김포에서 청소년 두명과 함께 예배를 꾸리고 있는데, 성서를 함께 읽으며 우리는 하나님이 지은 이 세상의 권리 주체라는 걸 같이 깨닫고 있어요. 내 삶의 권리 주체이자, 이 사회의 권리 주체로서 내 삶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신앙 안에서 고민하고 활동으로 보여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 31호 '여름 끝의 신간'에 남겨주신 답장을 소개합니다.
- 유익한 내용들👍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몽땅 읽었어요! 요즘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들이 자꾸 눈길이 갔는데 메일 읽고 결국 결제를 해버렸습니다! 좋은 책, 눈에 띄는 책, 꼭 읽어봐야 할 책들 마구마구 추천 감사합니다😊 → 몽땅 읽고 결제하셨다니 뿌듯하네요. 다음호에서도 좋은 책을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현철님. 아침 인사와 함께 보내주신 신간 리스트 잘 받아보았습니다. 덕분에 이번 여름 동안 나온 책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 무척 반갑습니다. 개인적인 취향과 기준이 담긴 선별이라 오히려 더 흥미롭고, 참고할 점이 많네요. 지난달 발간 건너뛰신 부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준비 과정을 성실히 알려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리고, 9월의 새로운 큐레이션 인터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늘 애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저도 책 많이 읽는 하루가 되기를 다짐해봅니다.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아 참 오늘도 한문단 챌린지 화이팅!!! 전 해외독자라 추천주신 거 다 보긴 힘들지만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되는 대로 보겠습니다. → 해외에서도 관심있게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와 정말 이번 책들은 다 읽고 싶네요. 새 책이라 빌릴 수도 없고, 책 값 많이 들어 어떻게 하나요 ㅠㅠ → 이 댓글을 '출판사들이 좋아합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이 다가오네요. 성큼 다가온 가을을 잘 맞으시길 바라고, 다음호에 인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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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건강하고 지혜로운, 멋진 기독운동 활동가님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시민단체 가셔서도 계속 힘내시길 기원합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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