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홍이 문화를 만나다: 문홍's 人터뷰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매거진 서울문화홍보원'입니다!
저희는 인터뷰를 통해 한국 문화를 알리고, 또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을 조망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 마음속, '우리 문화'는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요?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 같지만 오히려 답은 간단할 지도 모릅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마틴 스콜세지 : 영화로서의 삶-비열한 거리>
2020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을 때, 수상소감으로 인용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유명한 격언이죠. 저희 매거진 서울문화홍보원은 위 문장을 다시 적어 보려 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문화적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우리 자체로 문화일지 모릅니다. 저희는 한국 문화 속, 개인의 문화, 그 소우주에 주목하는 것을 매거진의 지향점으로 삼고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저희의 여정에 함께 해주시겠어요? :)
🎙️ 문홍's 人터뷰 Vol.03 - Today's Topic
최초 외국인 가야금 이수자 조세린
📌세 번째 문홍's 人터뷰 주제는 바로 '최초 외국인 가야금 이수자'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치유한 경험이 있나요? 사람들은 슬플 때, 행복할 때, 우울할 때 감정에 맞는 음악을 들으며 때로는 감정을 증폭하기도, 조절하기도 합니다.
"가장 가깝게 마음을 틀 수 있는 게 음악 아니겠어요?"
성악가 조수미
성악가 조수미는 음악으로서 자신의 삶을 치유할 수 있고, 음악이 가진 힘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음악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높습니다. 음악은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고 삶의 동반자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죠. 연인과 이별을 한 후에는 슬픈 사랑 노래를 들으며 연인과의 추억에 젖기도 하고, 날씨가 좋을 땐 통통 튀는 팝송을 들으며 날씨를 만끽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주로 즐기는 음악 장르가 어떻게 되시나요? 힙합, 팝, R&B, 혹은 클래식인 분도 있을 것입니다. 국악은 어떠신가요? 전공자가 아니라면 아마 낯설으실 겁니다.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우니까요. '국악'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고리타분한 것, 대중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시지는 않나요?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잠깐 배웠던 것 같은데, 아리랑을 제외하고는 떠오르는 것이 거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국악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직접 확인해보시겠어요? 아래 영상을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자마자, 지하철 안에서 이 곡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처럼 국악은 생각보다 훨씬 흥겹고, 때로는 중독성까지 있는 음악입니다.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어렵고 고리타분하다'는 편견과는 사뭇 다르죠.
여러분은 우리나라 악기에 대해 몇 가지나 알고 계신가요? 아마 독자 여러분들에게 가장 익숙한 우리나라 악기는 '가야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가야금은 오늘날 현대 음악과도 자주 어우러지며,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30년 가야금 인생을 걸어오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배재대학교에서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계시는 조세린 교수님입니다. 먼 타국인 한국의 악기 가야금과 사랑에 빠진 조세린 교수님과 그 이야기를 들으러 가보실까요?
지금 시작합니다!
🎙️ 문홍's 人터뷰 Vol.3 - Today Interview
👩 Interviewee: 배재대학교 교수 조세린
👩💻 Interviewer: Editor 혜령
🖱️기획: Editor 혜령
🎥 촬영: 혜령
🎥 사진 편집: 이안
🗓️ 인터뷰 날짜: 2025.07.22
Intro.
👩💻ㅅㅁㅎ.mag
안녕하세요,작가님! 먼저 저희 독자 여러분들께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네 안녕하요, 제 이름은 Jocelyn Clark이고 한국인 이름은 조세린입니다. 1992년도 국립국악원 장학금으로 가야금을 배우러 한국에 처음 오게 되었어요. 배재대학교에서는 2008년부터 강의했고요. 국제학부로 시작해 문화예술콘텐츠학과, 이후 디지털미디어콘텐츠학과를 지나 지금은 교양학부 소속이에요. 이번 학기엔 ‘동아시아의미학‘, ‘영화로읽는동아시아종교철학‘, ‘한국문학을읽다‘, ’21세기 한류와한국의소프트타워‘ 등의 수업을 강의했어요. 하버드에서 석사 공부하다가 2005년에 다시 장학금으로 한국에 오는 등 미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했어요. 석사는 94년부터 96년까지, 박사 과정은 96년부터 시작해서 2005년에 졸업했어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주변 학생들이 교포여서 회화를 익숙하게 접할 수 있었어요.
👩💻ㅅㅁㅎ.mag
외국인으로서 90년대의 한국에서의 삶과
현재 2025년 한국에서의 삶이 크게 달라지신 것이 있을까요?
👩교수님
아무래도 사회적인 분위기가 보수적이었고 외국인을 위한 인프라는 거의 없었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도 부족했고요. 90년대에 한국에 왔을 때는 올림픽아파트에 잠깐 살았어요. 새로운 아파트였죠. 그때는 1~4호선 밖에 없었고 버스 배차 간격도 일정하지 않았어요. 식당 메뉴도 지금보다는 다양하지 않았고요. 지금은 한류 통해서 한국인들이 한국 문화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어요. 아직은 기본적으로 인프라가 한국인들이 우선이에요. 예를 들어서 교환 학생은 학생증이 늦게 만들어져 도서관에 늦게 들어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어요. 과거에 제가 국악 대회를 나갈 때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특정 항목의 상을 받을 수 없었어요. 렌터카를 빌리기도 어려웠죠.
👩💻ㅅㅁㅎ.mag
저보다 한국을 오래 경험하셨네요(웃음). 저는 2002년에 태어났거든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좀 더 노력이 필요하군요.
아무래도 한국인에게는 단일민족 개념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교수님의 일상과 근황이 궁금합니다.
👩교수님
전 학자라서 공연 준비하고 논문 쓰고 그래야 하므로 바쁘고 마음이 항상 급해요. 항상 긴장감이 있죠.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심심할 틈도, 외로울 틈도 없어요. 아침에 동료 교수님들과 같이 여기 뒷산에서 등산해요. 차 마시고 수업 준비를 마친 다음, 12시 반에 출발해서 점심 먹고 강의하면 4시 반이 돼요. 이후 등산을 안 하는 날은 헬스장에 가서 운동해요. 집에 가서 저녁 먹고 8시까지 쭉 쉬었다가 논문 쓰거나 공연 준비를 하죠. 8시는 되어야 충전이 돼요(웃음). 밤에 아파트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기 어려운 날도 있어서 학교에서 연습할 때도 있고요. 이런 일상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반복되고 금요일은 컨디션이 좋으면 서울 가서 공부해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날은 토요일이에요. 주말에는 전주에 내려가서 수련하죠. 일요일에 전주에서 자고 월요일에 대전으로 올라오면 다시 일주일 스케줄이 반복돼요. 방학 때는 아무래도 공연 준비에 시간을 더 많이 쏟을 수 있어요.
Main interview
👩💻ㅅㅁㅎ.mag
교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창 시절에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 말고도 다른 나라에서 거주하셨다거나 어린 시절에 경험한 다른 문화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교수님
6살에 멕시코를 간 게 첫 해외 경험이에요(웃음). 부모님께서 일이 있으셔서 어떤 집에 저를 맡겨놓고 일을 하려고 가셨죠. 저는 6살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있어야 했어요. 그때 스페인어를 배웠죠.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가 일본과 관련 있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일본을 많이 갔었어요. 대만과 홍콩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일을 몇 년간 했었고, 그러면서 독일어도 익혔어요. 여행과 일을 제외하고는 한국, 일본, 중국에서 살았어요. 일본과 연이 있는 건 이유가 있어요. 제 친할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때 공군이셨는데,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 거주하시게 되었어요. 그래서 일본문화에 친숙할 수밖에 없었죠. 아버지는 일어를 배우지 않은 것이 후회되셨기 때문에 딸들에게 일어를 배우게 하셨어요. 마침 일본의 경제 발전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어요. 처음 국제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일어를 배웠다는 점 때문에 시골에 있는 학교로 보내졌어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주판 등 많은 것을 배웠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살던 집과는 아직도 연락한답니다. 쭉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대학교 3학년 때 중국에 가게 되었고, 1년 후에 한국으로 갔습니다.
👩💻ㅅㅁㅎ.mag
일본 악기인 고토와 중국 악기 고쟁을 먼저 접해보신 것으로 아는데,
동양의 악기 중 가야금에 가장 큰 매력을 느끼게 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교수님
처음에는 가야금이라는 악기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음색, 음정, 박 모두 생소하고 어려웠거든요. 장학금을 받고 연구하게 되면서 공연을 많이 보고 음반도 사서 듣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점차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요즘은 이제야 국악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공부할수록 점점 귀가 밝아진 거죠. 국악에서 느껴지는 희로애락과 인간성이 좋아요. 물론 희로애락은 모든 음악에서 느낄 수 있죠. 국악은 종교적인 면이 약하고 인간을 위한 음악인 것 같아요. 국악은 천천히 시작해서 한을 다 풀어내고 흥으로 끝나는데, 사람의 진심이 담겨있어요.
👩💻ㅅㅁㅎ.mag
교수님께서는 가요나 현대곡을 연주도 하시나요?
제가 찾아본 영상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 가락만을 연주하시더라고요.
가야금 이수자분들은 가요나 팝송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교수님
전 민족 음악과 현대 음악에 관심 있어요. 그런데 팝송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잖아요? 물론 대중성을 잡고 젊은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퓨전 음악을 연주할 수 있어요. 조심해야 할 것은 전통적인 면이 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거예요. 현대적인 부분이 너무 강해지면 전통이 약해질까 봐 걱정스러워요. 전통이라는 건 우물과 같아요. 우물 안에 물이 있어야 물을 꺼내 마실 수 있는데, 우물 안의 물이 사라지면 더 이상 쓸 수가 없어요. 국악이라는 우물 안에 전통이라는 물이 있어야 언제든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거죠.
👩💻ㅅㅁㅎ.mag
사실 가야금 연주와 한복을 뗄 수가 없잖아요,
혹시 좋아하는 한복 스타일이나 자주 찾는 브랜드가 있으신가요?
👩교수님
정서미 한복 디자이너와 함께 일합니다. 볼레로 같은 개량 한복 스타일은 선생님들이 싫어하셔요. 쪽머리도 고수해야 하고요. 외국인이라서 더욱 전통 한복을 입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는 것 같아요. 파티나 행사에 참여할 때는 볼레로 같은 스타일도 입죠. 저뿐만 아니라 한복 스타일은 결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ㅅㅁㅎ.mag
가장 좋아하시는 곡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교수님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어요. ‘곡’이라는 건 서양에서 온 개념이에요. 그래서 한 가지 곡을 꼽기보다는 ‘산조’라는 장르를 말하고 싶네요. 제가 공부를 한 건 산조니까요. 더불어 병창도 좋아합니다. 시나위와 새가락별곡은 어려워서 좀 더 공부해야 해요.
👩💻ㅅㅁㅎ.mag
외국인이 이수자가 될 수 있는 규정은 최근에 바뀐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매주 전주와 대전을 오가며 평일에는 학교에서 일을 하시고,
주말에는 수련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외국인으로서 가야금 전문가로서 인정받는 것이 조금은 불확실하셨을 텐데 꾸준히 수련하게 하는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교수님
이수자가 되기 위해서 매주 수련을 한 것은 아니에요. 이수자가 될 수 없어도 했을 거에요. 다만 동료들이 이수자에 도전하니까 저도 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도 이수자가 되니까 인정받는 것이 좋아요. 자신감이 생겼고요. 항상 감사해요. 다른 사람들에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요. 그런데 ‘최초 외국인 이수자’라는 타이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보통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외국인’은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백인 혈통의 사람‘이에요. 국적 말고 혈통도 외국이어야 하죠. 사실 외국인 전에는 교포들이 가능했지만, 한국 핏줄이 아닌 외국인으로는 제가 처음이죠.
👩💻ㅅㅁㅎ.mag
혹시 명인에도 도전할 의향이 있으신지,
가야금 이수자로서 앞으로의 목표가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교수님
명인을 하고 싶기보다는 힘이 닿는 데까지 국악에 대해서 논문 쓰고 발표하고 공연하는게 목표죠. 산조를 녹음하고 싶기도 해요. 요즘 선생님께 소리를 배우고 있거든요. 선생님 계실 때까지 공부해서 스승님의 소리를 따라가고 싶어요.
👩💻ㅅㅁㅎ.mag
가야금 연주자, 소리하는 사람, 장구 치는 사람
이렇게 확실하게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군요?
👩교수님
안 그래요. 물론 주력 악기는 있지만 가야금 연주자가 소리를 하기도 하고, 장구를 치기도 해요. 소리를 하면 반주를 알아야 하므로 북과 장구도 자연스레 익히게 되죠. 저는 지금 한 달에 한 번 단체로 북을 배우고 있어요. 장단을 이론 말고도 몸으로 익혀야 체화가 된답니다. 매일 연습해야 몸의 근육이 기억하게 되죠.
👩💻ㅅㅁㅎ.mag
직접 국립국악원 원장님께 편지를 쓰셨다는 걸 보고 놀라웠어요.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삶을 개척하신 교수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에서 이런 ‘인생의 전환점‘이 또 있었을까요?
👩교수님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그랬어요(웃음). 제가 중국 남경예술대학교에서 유학할 때는 서예를 배웠어요. 행서초라는 천자문을 썼어요. 오보에도 배웠고요. 8살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는 수영 선수를 했어요. 제 고향 알래스카 사람들이 보통 그래요. 제 고향은 수도이긴 하지만 도로가 없고 섬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 차 문화보다 배, 비행기가 익숙해요. 옆 마을로 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고 부모님이 주신 생활비로 남의 집에서 살아야 하죠. 그래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것이 익숙해지게 되는 거예요. 북 알래스카에 가려면 잘 차려 입고 매너 있는 태도를 갖추고 가야 했어요. 동남 알래스카에는 그런 문화가 있어요. 그러다 보면 용기와 독립성이 자연히 생기게 되고 겁이 없어져요. 그래서 뭔가 해보고 싶으면 그냥 도전하는 거예요. 그런 영향 때문인지 고향 친구들은 다 유학했어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재미있는 일하며 살고 있죠. 요즘은 호텔도 생기고 비행기를 주로 타게 되어서 다른 문화를 경험할 기회가 별로 없어졌어요.
👩💻ㅅㅁㅎ.mag
교수님께서 가야금을 만 22살에 시작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지금 만 23살이거든요.
인생 선배로서 20대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나 가져야 할 태도를 알려주세요!
👩교수님
오 그렇군요.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거에요. 여자들은 남자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아니면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워요. 저도 옛날에는 나 자신을 많이 잃어버렸어요. 결혼해서도 부인으로서, 엄마로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자기 꿈을 잊어버리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지키세요. 그게 자신만의 매력입니다. 자신을 놓아버리면 본연의 매력도 없어지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떠나갑니다. 매너도 태도도 중요해요.
또한 실수가 있으면 인정하고 다른 사람 탓하지 말고 그냥 배우세요. 그러면서 자기 성찰을 해야 하죠. 사람들의 비평에 부드럽게 대응하고 자기 인식을 해야 객관적으로 해야 합니다. 잘못을 쉽게 인정하세요. 실수가 아예 없는 건 불가능하니 겁을 점차 없애가야 해요. 저도 겁이 많은 사람이에요. 옛날보다는 많이 없어졌어요. 저는 지금도 자신감을 어떻게 가지고 용기를 얻을지 계속 연구해요.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스토리가 다르니까 비교는 금물이에요. 실수 통해서 배우세요. 사랑으로.
Outer
👩💻ㅅㅁㅎ.mag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야금 문화를 보존하고 나아가 알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교수님
어려운 문제죠. 국악을 포함한 전통문화가 ‘쿨하지 않다’는 인식이 있어요. 일단 한국 사람들이 신경 써야 하죠. 보통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나 주류를 따라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교육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은 국악을 잘 모르기 때문에 국악을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여기죠. 한국 사람들은 서양 음악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국악을 어색해 합니다. 특히 서양과 동양은 박이 달라요. 서양은 4박이지만 국악은 3박이에요. 클래식 음악도 거의 4박이죠. 전통음악을 재해석할 때는 3박을 대중에게 이해할 수 있게 4박으로 바꿔요. 대표적으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와 정년이의 ‘새타령’이 그래요. 먼저 ‘범 내려온다‘는 5박을 4박으로 바꾼 거예요. 사람들은 4박 아니면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정년이 ’새타령’은 원래 10박(엇모리장단)인데 4박으로 바꾼 거예요. 4박 베이스에 노래를 하죠. 학교에서도 음악 선생님이 국악을 잠깐 가르쳐요. 국악을 정말 사랑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악의 매력이 학생들에게 와닿진 않는 거예요. 학교에서 국악을 어떻게 배웠어요?
👩💻ㅅㅁㅎ.mag
저는 자진모리장단 같은 박은 이론으로만 배우고
그에 해당하는 음악을 알고 있지는 않아요.
단소로 아리랑을 연주하는 수행평가를 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요.
👩교수님
아리랑을 언급하니 월드컵 아리랑도 생각나네요. 아리랑도 세마치장단 즉 3박인데 월드컵 아리랑으로 편곡하면서 4박으로 바뀌었어요. 단소 같은 경우 민속악기가 아니라 양반 악기인데, 성인이 된 지금 유의미하게 기억에 남지 않았잖아요 그죠? 요즘은 공연도 직접 보러 가지 않죠. 국악뿐만 아니라 클래식도 그래요. 다 휴대폰으로 보잖아요. 직접 연주해 본 경험이 있는 학생도 많지 않고 대부분 음악을 이어폰으로 듣죠. 전자기기로요. 그러다 보면 결국 'eco system'이 붕괴할 거예요. 국악도 전수하는 사람이 없으면 결국 사라지겠죠. 국악을 배우고 싶어도 사람들이 찾지 않으면 먹고 살아야 하니까 결국 주류 문화로 가게 되니까요. 한복 같은 경우 바느질이나 천 염색을 전수할 사람이 없어서 한복값이 비싸지고 수요도 사라질 거예요. 결국 연주자와 관객 모두 노력해야 해요. 90년대에 남원춘향제 때는 객석에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가사를 다 따라 하고 추임새를 넣어줬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마치 클래식 연주를 감상하는 것처럼 관객이 조용합니다. 마치 ‘침묵의 봄’ 같아요. 객석이 침묵의 봄이 되는 거죠.
👩💻ㅅㅁㅎ.mag
네. 오늘은 매거진 서울문화홍보원과 함께
'최초 외국인 가야금 이수자 조세린'교수님 의 가야금 여정을 돌아봤는데요.
짧은 시간,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의 여정도 응원하겠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문홍'Say
📢문홍이, 이번 인터뷰에 이렇게 답하다.
- 에디터의 한 줄: 전통이라는 우물
먼저 구체적이고 자세한 묘사와 친절한 태도로 인터뷰에 응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최대한 전달해주셨다.
이번 인터뷰는 '외국인'이라는 개념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파란 눈의 외국인', '금발의 외국인'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교포는 외국인으로 인식하지 않기도 하며, 한국 국적을 가지고 한국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외국 혈통이면 한국인으로 쉽게 인식하지 않기도 한다. 어떤 타이틀에 갇히게 된다면, 그 사람이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망각하게 된다. '최초 외국인'이라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조세린 교수님과 다른 이수자들을 분리해서 생각한 것 같다. 가야금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모두 같은데도.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전통문화를 대중화하는 것, 결국 그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교수님께서 전통을 우물에 비유한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 우물이 고갈되지 않게, 조금씩 우물에서 물을 긷고 또 채우고. 그러다 보면 우물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지 않을까? 국악에 익숙해지려면 실시간 공연을 보거나 국악 악기를 연주하는 문화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힙한 것'을 찾고 따라하려고 한다. 국악이 '힙한 것'으로 인식되면 눈치 보지 않고 국악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 Editor 혜령
❓About Us
매거진 서울문화홍보원(ㅅㅁㅎ.mag)과 서울문화홍보원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면?
🌏 서울문화홍보원 공식 홈페이지
🌏 서문홍 매거진(ㅅㅁㅎ.mag) 공식 인스타그램
🌏 서울문화홍보원 청년운영위원회 문홍이 인스타그램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