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세로입니다.
한 달 만에 편지를 쓰게 되었어요. 5월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전주 영화제를 다녀왔고요, 시네마세로 유튜브 채널의 두 번째 프로젝트인 '폴란드 여자, 한국 남자'의 촬영을 마쳤습니다.
이번 전주 영화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은 어렵게 티켓을 구한 영화 관람도, 영화인들과 함께 어울렸던 영화인의 밤 파티도, 한국 영화 위기 해결책에 관한 토론 포럼도 아니었습니다. 의외로 <AI와 영화산업 : 창작과 기술의 융합>이라는 테마로 개최된 한국영화학회의 학술대회가 가장 좋았어요. 그래서 AI 시대의 영화 제작에 관한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1. AI와 함께 영화를 만든다는 새로운 개념
AI가 창작자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는 호들갑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이런 과장된 전망들이 업계 곳곳에서 횡행하면서 영화 창작자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어요. 그런데 잠깐, 알파고 등장 이후 바둑계의 변화를 혹시 아시나요?
이제 바둑계에서는 모든 바둑 기사가 AI 기보를 당연하게 공부한다고 합니다. AI는 선택 사항이 아닌 디폴트값이 된 것이죠. 저는 앞으로 영화계도 유사한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AI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작자가 AI를 쓸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전주 영화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동의대학교 전병원 교수님의 논문에는 'HCI(인간-컴퓨터 상호작용)'라는 흥미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인간과 컴퓨터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느냐의 관점에서 영화 제작 프로세스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AI 이전의 패러다임을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직접 컴퓨터를 조작해왔습니다. 파이널 컷이나 프리미어 프로 같은 편집 프로그램, 한글이나 워드같은 글쓰기 프로그램부터 VFX 프로그램까지 도구를 배워서 직접 조작하는 방식이었죠.
그런데 AI 이후의 패러다임은 다릅니다. 기존 도구들처럼 AI를 직접 조작하는 형태가 아니에요. 'AI를 검색 엔진처럼 쓰지 마라'는 영상 혹시 보셨나요?
AI는 동료와 협업하듯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최종 목표나 결과물의 특징, 창작 의도를 인간에게 이야기하듯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결국 AI는 인간의 대체제도, 인간이 직접 조작해야 하는 도구도 아닙니다.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창작 파트너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2. AI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무엇일까요?
AI가 디폴트가 된 세상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영상을 만드는 것은 이제 쉬운 일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영상으로 사람들이 진심으로 반응하고, 심지어 돈까지 쓰게 만드는 일도 쉬워질까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신기하고 짧은 영상이 아닙니다. 지난 뉴스레터에서 다뤘던 해나 개즈비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디지털 시대의 영화적 스토리텔링 (혹시 궁금하시면, 지난 뉴스레터를 클릭 해주세요)
그녀는 인간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결국 영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창작자의 '이야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죠.
AI는 본질적으로 창작자의 창작 의도를 구현합니다. 따라서 AI 시대에 가장 큰 혜택을 받을 사람들은 두 부류라고 생각해요. 첫째, 원래 이야기를 잘 만들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탄탄한 스토리텔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AI를 통해 더욱 풍부한 표현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둘째,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여건상 구현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산이나 기술적 한계로 포기했던 아이디어들을 AI의 도움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야말로 AI가 가져다주는 진정한 민주화가 아닐까요?
3. 기존 영화 업계가 마주한 AI의 실체
그럼 원래 이야기를 만들던 사람들, 즉 영화 업계 20년차로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한 저 같은 고인물들에게 AI 시대는 어떤 의미일까요?
최근 구글의 Veo 3가 공개되면서 동영상 생성 기술에 대한 놀라움이 더욱 커졌습니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동영상 생성 기술 자체가 충격적이지만 실제 영화를 제작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제작자들에게는 사실 직접적으로 와 닿는 얘기는 아닙니다. 영화 제작은 영상을 생성하는 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앞서 언급한 HCI 패러다임 변화가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 변화예요. 기존에 직접 조작하던 프로그램 방식이 AI로 바뀌면서 노동 집약적이고 시간 소모적이며 창의적 탐색에 제약이 있고 높은 비용이 들던 기존 제작 과정이 크게 효율화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문제가 두 가지라고 봅니다. 첫째, 오래 걸리는 제작 과정 때문에 영화 기획이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시장이 파편화 되고 있는데 반해 제작비는 과다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 두 가지 문제들을 개선하는 데 AI가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작 시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창작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한국 영화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이 크게 향상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현재까지 한국의 영화인들이 AI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제작 환경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AI 기술에 관심이 있는 아마추어들은 실질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영화 제작 프로세스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영상 생성 기술에 집중하고 있고요.
그래서 세로는 현재 영화 제작의 실질적인 노하우를 AI 패러다임에 적용하여 개선하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요.
마무리: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릭 루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작자가 되는 것은 특정한 결과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창의성은 모든 사람의 삶에 자리가 있으며, 누구나 그 자리를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AI 시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결국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질문이 되는 것이죠. AI라는 도구로 인해 창작이 민주화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는 릭 루빈이 정의한 창의성의 본질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소스(Source)'는 모든 사람을 통해 흐르는 아이디어와 영감의 무역풍 같은 것입니다. AI 시대에는 이 무역풍이 더욱 강하게,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제 창작의 문턱이 낮아진 만큼, 우리 각자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여러분은 AI와 함께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어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으신가요?
이번 뉴스레터가 도움이 되셨다면 주변 창작자들과 공유해주세요. AI를 활용한 영화 제작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답장으로 보내주세요. 함께 AI 시대의 스토리텔링을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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