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혼자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비슷한 또래의 1인 가구가 대부분이다. 이곳에 산지 4년이 넘었지만, 같은 층이나 다른 층에 살고 있는 입주민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어쩌다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 사람끼리 타게 되면, 서로 괜히 민망해하며 속도를 조절하거나 오히려 빠르게 가버리면서 '서로가 최대한 먼 집이기를' 바라는 느낌을 풍기곤 했다.
어릴 적엔 나도 건물의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하거나, 사소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게 꼭 그립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1인 가구 위주의 오피스텔에선 서로의 집 위치를 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워낙 큰 공간이라 교류나 대화는 쉽지 않은 듯 했다. 나조차도 괜스레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그간 내가 보았던 소통은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붙여둔 종이들 뿐이었다.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아달라'는 경고문이거나 이사를 가게 되어 어떤 물건을 내놓으려고 하니 가질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 나는 그마저도 뭔가 반가워서 엘리베이터에 그런 쪽지가 붙으면 사진을 찍어두곤 했다. 이 오피스텔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지. 그렇지. 하면서.
지난 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강아지를 데리고 있는 다른 입주민을 만나게 됐다. 나는 개보다는 고양이를 더 좋아하지만, 개도 충분히 예뻐한다. 그 개는 붙임성이 좋은 듯 했고, 내게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꼬리를 흔들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만져도 될지 조심스러운 와중 상대가 먼저 '애가 워낙 사람을 좋아해서요. 만져달라고 하는 거에요. 괜찮으시다면 만지셔도 돼요'라고 말을 붙여왔다.
개에게 말을 붙이고, 개를 쓰다듬어주며 몇 마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4년 넘게 사는 기간 동안 다른 입주민과 말 한 마디 나눠본 적이 없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이렇게 쉽게 대화를 나누고, 나는 내 층에 내리며 개와 사람 둘 다 잘 가라며 인사를 보내고, 서로 웃어보이는 일들. 경계심 대신 호의와 웃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는 일.
#2
긴 여행을 앞두고, 빨래방을 찾았다. 비가 오가는 날이기도 하고 이곳저곳 다닐 일이 많아 평소 가던 빨래방 대신 집 바로 앞 건물의 빨래방으로 향한 날이었다. 가깝지만 이곳을 가지 않은 이유는, 건조기를 썼을 때 제대로 마른 적이 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평소보다 양이 적기도 하고 잘 마를만한 친구들이었으니 괜찮겠지하며 빨래를 맡겼다.
하지만 여전히 건조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그렇다고 가격이 다른 곳보다 싸지도 않다). 딱 맞춰 옷들을 집에 가져가는 걸로 일정을 짜놨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며, 15분을 추가 결제했다. 집을 오가기도 애매해서 그 빨래방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나마도 오래 있자니 더워져서 바깥에서 서성거리기도 했다.
다행히 15분이 지나니 나름 괜찮아보였다. 얼른 담아 집에 가져와 빨래를 개는데, 여전히 잘 마르지 않은 옷가지들이 꽤 많았다. 아니면 마르긴 했지만 묘하게 축축한 느낌이 남아있기도 했다. 처음에 몇 가지가 나왔을 때는 그냥 집에서 남은 걸 말려야지 싶어서 걸어두었는데, 갈수록 그 양이 늘어나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안그래도 습한 여름 날에 집에 빨래까지 이렇게 왕창 걸어놔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애초에 나는 잘 마른 빨래들로 바로 여행짐을 싸둘 생각이었는데.
평소에 정말 짜증이 잘 나지 않는 성격이지만, 마음 깊이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느끼며 다시 빨래를 담아 평소에 가는 빨래방으로 갔다. 처음부터 거기를 갔으면 5천원이었으면 끝날 일인데 이미 난 7500원을 썼고 여기에 더해서 시간과 돈을 또 쓰러 가고 있었다. 비가 그쳐서 가는 길에 비를 맞지 않는게 다행이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 삼을 일이었다.
기계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자니, 앞에 선 젊은 남자가 먼저 쓰라며 차례를 양보했다. 감사하다고 하고는 건조기에 15분을 입력했다. 이번에도 왔다갔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건조기 앞에서 기다리려고 하는데,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계속 헤매는 게 보였다. 뒤에서 지켜보자니 외국인인듯 했다. 영어에는 정말 요만큼도 자신이 없지만, 결제가 되지 않는 카드로 같은 에러 메시지를 반복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나서서 말을 걸었다.
그 카드는 지원하지 않는 카드라고 하네요. 라면서 함께 과정을 다시 밟았다. 비교적 단순한 키오스크지만, 메뉴의 내용이 오로지 한글로만 적혀 있었다는 걸 이 동네에 산 지 4년이 넘은 만에 처음으로 알게 됐다. 회원가입을 해야 하는데 회원이 아니니 비회원으로 해야했고, 카드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현금으로 하자고 다시 과정을 밟는데 이 사람이 들고 있는 현금은 지폐 뿐이었다. 입구에 있는 줄 알았던 동전교환기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좋을까-싶다가 말을 다시 걸었다. 그냥 내가 결제해주겠다고. 내 아이디에는 2만원 정도는 충전되어 있었고, 그처럼 복잡한 과정을 겪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지폐를 꺼내보였지만 나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돈을 받자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대신 건조도 해야 할 게 아니냐며, 그 카드는 안되니 돈을 바꿔와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이 모든 대화가 유창하게 이어진 건 아니다. 그도 영어를 잘 하지 못했고 나는 제대로 된 문장을 구성하지 못하고 당황해서 떠듬거렸다.
그는 어색한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고 하고는 동전으로 바꾸겠노라고 하고 밖을 나갔다. 이 세탁방은 아무리 회원제로 바꿨다지만 어째 교환기 하나가 없나-하고 생각하던 중 내 건조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야 키오스크 아래에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나간 뒤였고, 별 수 없이 나는 건조가 끝난 빨래를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다행히 바싹 잘 말려 있었다). 다만 문의용으로 남겨진 번호에 외국인이 얼마나 올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외국인을 위한 설명문구가 한 장 인쇄되어 있다면 어떨까 싶다는 문자를 하나 남겼다.
빨래를 개며, 내가 짜증을 냈던 일이 오히려 기분 좋은 결과가 됐다 싶었다. 집 앞 빨래방에서 건조가 잘 되지 않았기에 나는 그가 헤매던 시간에 원래 가던 빨래방을 찾았고, 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별 거 아닌 일은, 내 일상에서 기억남을 만큼 즐거운 경험이었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는 거야. 그게 돌이켜 보면 나를 위한 일이 되기도 하는 거야. 세상 일은 그렇지하며 날려버린 시간과 추가로 나간 돈을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살지만, 그 거리는 얼마나 먼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지. 우리는 함께 이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얼마나 까먹고 살아온 것인지. 우리 사이엔 거대한 벽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걸 왜 몰랐는지. 아주 작은 순간과 친절로 우리는 서로의 일상에 작은 위로나 도움,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걸 왜 4년 만에 알았는지. 그 경험들을 종종 곱씹곤 한다. 그리곤 '그 때 사실 영어로 이 문장으로 말했어야 했는데...'하고 후회하면서.
의견을 남겨주세요